< 220화. 통곡의 협곡 >
깎아지른 절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풀 한포기 없이 그저 바위로만 이루어진 험준한 산맥.
그리고 그 산맥의 한가운데에는 감히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웅장한 요새가 지어져있었다.
“통곡의 협곡. 저도 말로만 들어봤지 와본 건 처음이군요.”
에반이 그 장엄한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통곡의 협곡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워보였으나 실제로는 한나절을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만큼이나 북부산맥은 크고 넓었다.
“여기까지 와서 묻는 말이지만 과연 저들이 그냥 들여보내 줄까요?”
“미리 말해뒀습니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에반이 더 특이해보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했을 텐데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군.
“슬슬 기척이 느껴지는군요.”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지만 에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지금까지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왔지만 통곡의 협곡이 가까워진 만큼 야만족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는 모양이었다.
“이왕이면 조용히 진입하고 싶네요.”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에반이 앞장서며 말했다.
여러모로 에반을 만나게 된 건 뜻밖의 행운이군.
그는 앞서 기척을 읽어내며 야만족들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은 더 지체되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요새의 입구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쿵쿵쿵!
요새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성문을 크게 두드렸다.
“누구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작은 창이 열렸다.
곧이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야만족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냐?”
다시 한 번 묻는 그의 음성에 의문이 담겼다.
“난 제국의 백작,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다. 네 상관한테 가서 내가 왔다고 전해라.”
홀연 듯 나타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대답 없이 바라보던 그 눈동자는 이내 창을 닫으며 사라졌다.
“야만족들을 우습게 봤었는데 안심할 일이 아니군요.”
“뭔가 느껴지십니까?”
“요새 내부에서 초인들이 느껴집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수군요.”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플레이어보다 NPC의 비중이 높은 에피소드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지만 아무리 저라도 다수의 초인을 홀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팔짱을 낀 채 성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들이 공격하면, 죽는 건 저들입니다.”
이윽고 요새의 문이 천천히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틈으로 보이는 야만족들이 잔뜩 기세를 뿜으며 기다리는 게 보였다.
“환영 인사가 거칠군.”
“간댕이가 부은 녀석이군. 옆에는 누구냐?”
“내 호위기사다.”
“단 둘이서 왔다고?”
“그래. 겨우 둘뿐인데 겁먹은 개새끼처럼 으르렁대지 말고 좀 비키지 그러나?”
내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한 야만족이 무기를 뽑았다.
“제국의 애송이가 집에 겁대가리를 두고 왔군! 당장 모가지를 따주마!”
“멈춰라.”
웅혼한 마나의 기운이 잔잔하게 흘렀다.
나에게 달려들려 했던 이는 급하게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바흐크!”
“물러나라. 그 자는 대족장의 손님이다.”
한 눈에 봐도 오러 마스터임이 분명한 근육질의 사내가 말하자 분위기가 환기됐다.
달아올랐던 기세를 낮춘 야만족들을 보며 나는 새로 온 사내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끝났나.”
“제국의 귀족이여. 뭘 믿고 그리 까부는지는 몰라도 도발은 적당히 해라. 수틀리면 죽는 수가 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어서 안내나해. 대족장한테 안내하려고 온 거 아니야?”
“무례하군.”
우리는 지금 둘뿐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평소보다 강하게 나가고 있었다.
인간 관계, 특히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싸움이 생각보다 중요했다.
상대가 우리를 얕보는 순간 협상 환경은 더욱 안 좋아지겠지.
이왕이면 대족장을 만나기 전에 실력 행사를 해서 기 좀 죽여 놓으려 했는데 그건 실패했네.
“따라와라.”
바흐크라는 오러 마스터를 따라가자 요새 내부에 있는 수많은 야만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에반의 말대로 두 곳 정도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한곳은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대족장이 있는 곳이니 오러 마스터가 적어도 셋은 있다는 이야기군.
‘예상했던 대로다. 나머지는 전장에 나가 있겠지. 충분히 할 만해.’
이제 정말로 두려울 게 없어졌다.
물론 대족장이 상상 이상의 괴물이라는 건 게임 속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미리 간접적으로 만나서 느껴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의 내 곁에는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수인 에반이 함께 하고 있었다.
대족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에반과 비슷하거나 그 이하겠지.
“마법사도 있습니다.”
에반이 내게 귀뜸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마법사라면 흑마법사일 거다.
보르기옌을 침공했던 네크로맨서가 어쩌면 이곳에 있을 수도 있겠군.
“도착했다.”
특이하게도 대족장이 있는 곳은 영주성이 아니었다.
요새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영주성이 따로 존재했는데 막상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평범한 민가였다.
쿵!
“손님들을 데려왔다.”
바흐크는 그 말을 끝으로 알아서 들어가라는 눈짓을 하며 본인은 문 앞을 지켰다.
마치 퇴로를 차단하겠다는 그 움직임에 나는 슬쩍 비웃었다.
“거기를 지키는 것보다 대족장의 옆을 지키는 게 좋을 텐데.”
“퉤! 제국의 배부른 귀족이여, 그대는 대족장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직접 만나보면 네가 한 말이 얼마나 멍청했던 소리인지 깨달을 것이야.”
바흐크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연 나와 그의 얼굴 둘 중에서 누구의 미소가 지워질지 궁금하군.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바로 정면에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으로는 미리 이곳에 와있었던 니켈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에휴.’
저 미친놈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대가 이 이상한 녀석의 주인인가.”
“제국의 백작,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다. 옆에는 내 호위기사인 에반 경.”
니켈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던 대로 대족장은 혼자 있었다.
본인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절대적이라는 반증.
“들어와 앉아라.”
그의 말대로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 탁자 앞에 의자를 꺼내 자연스레 앉았다.
마침 대족장도 앉아 있었기에 마주 볼 수 있게 됐다.
“배짱이 두둑하군. 설마 둘이서 올 줄이야.”
“둘이라니. 옆에 하나 더 있잖아.”
“살지도 죽지도 못한 괴물이라 신기하긴 하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방심하고 있군.
오히려 좋아.
물론 내 목표는 대족장의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살아남아서 북부 설경지역으로 넘어가는 게 베스트.
그러나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를 죽인다는 선택지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괴물이 가져온 내용이 사실인가?”
“그럼 당연하지. 내가 미쳤다고 여기까지 몰래 왔겠어?”
내 말에 대족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넌 독 안에 든 쥐다. 그건 알고 있겠지?”
“네 아들은 내 손에 있다. 그건 알고 있겠지?”
내가 똑같이 맞받아치자 대족장의 기운이 방안을 침식해나갔다.
어쭈, 무력행사를 하겠다 이건가?
“허허허. 기운을 갈무리 하시지요. 안 그러면 제 검이 당신의 목을 가를 겁니다.”
에반이 웃는 얼굴로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대족장의 기운과 에반의 살기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족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에반을 쳐다보았다.
“뭘 믿고 까부나 했더니 한 수가 있었군.”
“에반 경이 없었어도 내가 여기서 죽을 일은 없어. 그것보다 간은 그만 보고 빨리 결정해라. 나와 거래를 할 건가, 말 건가.”
“일단 내 아들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한다. 그 전에는 안 돼. 그리고······.”
그는 중얼거리며 문 너머를 바라봤다.
동시에 나는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네 말이 사실인지 내가 어떻게 믿지? 넌 제국의 돼지다.”
“멍청하군.”
내가 분명 경고를 했을 텐데 말을 듣지 않았군.
이러면 일이 조금 복잡해지겠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새로 등장한 인물이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역시나 아는 인물이었다.
“퀜튼 브룩. 분명 우리 파벌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나한테 함부로 명령하지 말거라, 이 기분 나쁜 것아. 어떻게 스승님을 현혹한 건지는 몰라도 네 잘못은 우리가 바로잡겠다.”
니켈을 보내며 함께 보낸 서신에는 분명 흑마법사들도 납치 사건에 연관되었으니 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무슈를 데리고 오는 일행들에게 약간의 고생이 더해지겠군.
흑마법사들이 분노를 순순히 보내주지는 않을 테니까.
“내 잘못? 내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다는 거지? 난 그저 납치된 아이를 건네고 이 전쟁을 끝내려는 것뿐이다. 그 사이에 이득도 겸사겸사 챙기고.”
“카이락. 이 녀석의 말은 거짓이다. 네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면 우리가 진즉에 찾았겠지. 애초에 이 전쟁을 우리가 돕고 있고, 저 녀석은 제국의 개다. 분명 널 속이고 이 요새를 다시 빼앗으려는 제국의 속임수야.”
“그럼 우리 내기를 하나 하지.”
나는 탁자를 두드리며 주의를 끌었다.
“무슈를 내가 데리고 있는 건 확실해. 그리고 거래를 위해 지금 이곳으로 데리고 오고 있다. 만약 이틀 안에 무슈가 오지 않으면 내기는 내가 진 걸로 하고 지지든 볶든 알아서해.”
“무리수를 두는구나, 애송이.”
퀜튼이 지그시 나를 쳐다봤다.
아마 저들도 지금 무슈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쯤은 깨닫고 있겠지.
“하지만 만약 무슈가 내 일행들의 의해서 이곳까지 오면. 대족장, 너는 여기 있는 흑마법사들을 전부 죽여라.”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그리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대족장이 내 말을 믿는 눈치로 변했다.
아마 내가 무슈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겠지. 꽤 자연스럽게 말했으니까.
“근데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어.”
“갑자기 쫄리나?”
퀜튼이 날 비꼬았지만 나는 꿋꿋하게 할 말을 했다.
“무슈가 오고 있다는 걸 내가 말한 시점부터 이 흑마법사놈들이 방해를 할 거다. 그리고 이미 황제의 그림자들도 붙었다는 소식이 있거든. 꽤 상황이 어려울 거야.”
“······위치를 말해라. 대전사 하나를 직접 보내 확인하겠다.”
대족장, 카이락의 포커페이스가 살짝 무너졌다.
아마 무슈가 굉장한 위험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나야 무슈의 곁에 붙여놓은 게 누구인지 아니까 별 걱정은 없었지만.
“대족장.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기야. 그냥 유희라고. 무슈가 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지 안 오는지는 운에 따라야해.”
“미쳤군. 무슈가 무사하지 못하면 네가 원했던 거래는 고사하고 넌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그딴 거 알 바 없어. 난 죽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점차 초조해지는 카이락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재밌겠다. 과연 누가 내기에서 이길까? 아! 무슈가 오기만 하면 되는 거니 죽어서 와도 되는 건가?”
콰앙!
탁자가 산산조각났다.
그와 동시에 에반이 검을 뽑으며 내 앞을 막았다.
“날 도발하려 한 거면, 아주 제대로 먹혔다고 말하고 싶구나.”
살을 에는 듯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지금껏 이만한 기운은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
막시민이 진심으로 기운을 낸 걸 본 적이 없기에 지금 경험하는 기운이 여태껏 느꼈던 것 중에 최고 기록이었다.
“진정해, 대족장. 내가 죽으면 네 아들은 내기조차 상관없이 죽어.”
“말해라. 내게 뭘 원하는 거냐.”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일이 이상해지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퀜튼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카이락! 녀석에게 현혹되지 마라!”
“일단 저 흑마법사놈부터 내보낼까? 시끄러워서 협상을 못하겠군.”
내 말에 카이락이 고개를 돌려 퀜튼을 보았다.
“나가라.”
“카이락!”
“나가라고 했다!”
살기와 뒤섞인 그의 기운은 내 예상보다 어마무시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에반하고도 괜찮은 승부가 될 것 같은데?
결국 퀜튼은 입술을 씹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직전에 내게 한마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넌 반드시 내가 죽이거나 집회에서 제명시켜주마.”
“아주 마음대로 해보세요. 지지든지 볶든지.”
결국 퀜튼이 쫓겨났다.
그러자 여전히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카이락이 울그락붉으락 해진 얼굴로 숨을 내뱉었다.
“자, 이제 말해라. 네 녀석이 원하는 게 뭐냐?”
“좋아. 드디어 거래를 할 마음이 생겼나보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소를 띄었다.
“진득하게 이야기를 좀 나눠보자고.”
< 220화. 통곡의 협곡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