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소용돌이 >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막시민을 주시했다.
잠깐의 틈, 그 사이에서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막시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나 펜드래곤이 아니군. 누구지?”
“막시민 크로넬.”
루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막시민의 말대로 이미 그녀는 루나가 아니었다.
“이브 밀레니엄인가.”
“조용히 넘어가려했지만 굳이 내 이름을 부르는구나.”
“추하군. 그런 모습으로라도 남아있고 싶었던 거면 살려줄걸 그랬어.”
갑자기 급변한 분위기에 무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그렇게 비꼰다고 이미 죽은 나를 모욕할 수는 없단다.”
“역시 흑마법이야. 술사의 의도를 배제한 채 멋대로 발동되다니. 네가 나온 건 루나 펜드래곤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독한 마법이군.”
“막시민이여, 나는 이미 과거는 그저 과거로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부디 이 아이에게 괜한 말을 하지 말거라.”
“이브 밀레니엄. 내가 알고 있던 넌 그렇게까지 모성애가 강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인간은 경험을 빌미로 변할 수도 있다네. 특히나 난 죽음이라는 것을 겪었어. 내가 변할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본단다.”
싸늘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그렇게 잠시 서로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가운데, 티무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크르르.
“아드리아스인가? 알았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크흥.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브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천하의 막시민 크로넬도 꼼짝을 못하는 구나.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막시민은 아예 무시를 해버렸다.
그 반응에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이 된 이브는 티무르를 한 번 살펴보고는 막시민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신의 단서를 찾은 모양이지?”
“신의 단서? 그건 내 목표가 아니었다. 난 그저 이자벨만 무사하면 상관없으니까.”
“그 관 속에 여인? 설마 깨어난 건가?”
“아는 게 하나도 없군. 네 딸이 말해주지 않았나?”
이브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분명 강력한 신의 가호였다. 그대는 그걸 저주라고 말했지만 엄연히 가호였어. 그걸 지워냈다고? 고작 인간에 불과한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너와 네가 빌리고 있는 그 몸도 인간인 걸 잊은 모양이군.”
루나의 몸을 빌린 이브의 눈빛이 갈수록 빛났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찾은 듯 초롱초롱해진 그 모습에 막시민이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는 거야. 일개 필멸자가 신의 가호를 부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
“혹여나 아드리아스를 건드리면, 널 죽이겠다.”
“난 이미 죽었다만?”
“말장난하는 게 아니야. 네 딸을 죽이면 그게 곧 너를 죽이는 일이겠지.”
-크헝!
티무르가 으르렁거리며 이브와 막시민 사이를 끼어들었다.
결국 막시민이 먼저 고개를 돌리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지.”
“재밌네, 재밌어. 그대의 그런 약한 모습도,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가졌다는 신의 능력도. 언젠가 자네의 피앙세인 이자벨이라는 흡혈귀도 한 번 만나게 해주면 좋겠구나. 혹시 아느냐? 그대도 알다시피 내 혈통은 한 때 신을 섬겼던 가문.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막시만은 대답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결국 언데드와 작은 인간 꼬마와 남게 된 이브 밀레니엄은 시선을 돌려 티무르에게 말을 걸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듣고 있겠지? 내 딸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멋대로 부리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잘도 이용하고 있구나. 루나는 체스 판 위의 말이 아니다.”
-크릉.
“난 항상 그녀의 곁에 있으며 같이 보고 듣고 있단다. 그 사실을 명심하거라.”
이브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무슈는 천천히 티무르의 곁에 다가갔다.
“괜찮은 거지? 나, 집으로 갈 수 있는 거지?”
-킁!
티무르의 거대한 손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탕!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북부 아르디 영지.
애매한 지리적 요건 덕분에 오히려 이번 전쟁을 빗겨간 장소였다.
피오네 아르디의 거래가 아니었으면 영지를 벗어나 전선에 합류해야 했던 아르디 후작은 자신에게 온 편지를 곱게 접어 품안에 넣고 일어났다.
“안되겠군.”
그는 딸에게서 온 편지의 내용을 생각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가문을 위해 힘써준 덕분에 전쟁의 혼란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편지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각하!”
“무슨 일인가?”
급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려던 아르디 후작은 갑자기 나타난 가문의 집사를 보고 멈췄다.
집사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알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아르디 후작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가 당황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로들렌 마탑의 마법사들도 함께 왔습니다. 아무래도 전장과 관련된 일이지 않을까 하는······.”
“지금 어디 계시나?”
“일단 원칙대로 응접실에 모셔지고 있습니다.”
“바로 가지.”
피오네가 보낸 편지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지금 당장 닥쳐온 일부터 해결해야 함이 옳았다.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알븐 전하! 재작년 연회 이후로 처음 뵙는 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자연스레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는 아르디 후작을 바하트가 고요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일세.”
“갑작스런 방문에 제대로 대접을 못해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요.”
“불편하다는 소리냐?”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그저 더 좋은 접대를 해주지 못해 아쉽다는 말이었습니다. 전하를 뵙는 건 드문 일이니 잘 보이고 싶은 생각에 입이 방정을 떨었군요.”
응접실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 장소에는 바하트를 제외하고도 부탑주인 켄트 하이지스 백작과 명성이 높은 로들렌 마탑의 전투 마법사, 데릭 가드너가 함께 하고 있었다.
의외인 건 그 옆으로 로들렌 마탑 소속이 아닌 젊은 여인과 비교적 젊어 보이는 또 하나의 마법사가 서있었다.
“뭘 그리 멀뚱히 서있나. 앉게.”
“예, 전하.”
“혹시 급한 일이 있었나?”
“예? 아, 아닙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아르디 후작은 내심 소름이 돋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봤지만 바하트라면 분명 뛰어난 통찰력으로 무언가를 포착하고 묻는 말이었을 터.
어색하게 행동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치고는 어설펐나 싶은 아르디 후작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쪽은 하이지스 공, 그리고 이쪽은 데릭 경.”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군요. 오랜만입니다.”
서로 목례를 하며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자 바하트가 나머지 둘을 소개했다.
“여기는 내 딸인 디에네 알븐.”
“작년 토너먼트 결승은 저도 직관했습니다. 장래가 유망하신 마법사를 직접 뵈어 영광이군요.”
“과찬이십니다.”
디에네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은 짧고 정적이었지만 기품이 넘쳤다.
“그리고 이 자는······자네도 알겠지?”
“로들렌 아카데미 마법학부장이신 베리얼 카스테로 경 아니십니까?”
“그래, 맞네.”
베리얼은 본인을 소개하고 있음에도 주변을 둘러보며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무례한 태도에 아르디 후작이 잠시 헛기침을 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흠흠.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리얼 경.”
“음? 아! 반갑군요, 아르디 각하. 조금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
아르디 후작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자 바하트가 나섰다.
“우리가 잠시 아르디에 머무를 수 있겠나?”
“당연합니다.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르디 후작은 궁금한 표정으로 바하트를 바라봤다.
그러자 곧바로 답이 나왔다.
“요새 주변 정세가 좋지 않네.”
“주변이라는 말씀은······?”
“제터, 모리겐, 하우펜, 네빌렝, 그리고 메이른.”
바하트의 입에서 주변 왕국들의 이름이 나오자 아르디 후작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설마 그 녀석들이 작당이라도 모의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평화가 길었던 모양이야.”
“정신이 나갔군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감히 제국을 맞서겠다는 겁니까?”
“내가 그걸 알겠나? 따지고 보면 메이른의 왕자가 이곳까지 견학을 와서 죽었던 사건도 있고, 야만족들을 빨리 정리하지 못하니 얕보인 것도 있겠지.”
“겨우 그런 일로······.”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아마 부추기고 있겠지.”
바하트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비록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없지만 그의 영지와 가문, 그리고 마탑도 제국 내부에 있는 이상 그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
“덕분에 우리가 직접 나서게 됐지. 야만족들을 빨리 끝내라는 폐하의 어명이다.”
“그렇다는 건······.”
“자네도 함께 가야하네.”
바하트가 품안에서 서신을 꺼내 아르디 후작에게 건넸다.
서신을 확인한 후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풀렸다.
“그렇군요.”
“바로 출발하는 건 아닐세. 일단 조금 더 지켜본 뒤에 출전할 테니 그때동안 미리 병력을 준비해놓게.”
“알겠습니다.”
아르디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빌어먹을······.’
간신히 마법받이가 될 수도 있는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딸의 도움과 희생으로 가문을 지켜냈건만 황가는 그런 약속을 대번에 무너뜨려버렸다.
‘혹시 피오네의 행동을 눈치 챈 건가?’
딸, 피오네는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을 하였다.
바로 황가를 속이고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돕기로 한 것.
아마 그 사실이 들켰으면······.
‘아니다. 들켰으면 고작 이런 일로 끝나지 않았어.’
오히려 고작 이런 일이었기에 들키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 들어 심해지는 황제의 폭정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황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면 될 터.
“생각이 많군. 불만인가?”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저희 가문만 이렇게 편해도 되나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다행이군요.”
“거짓말이군.”
바하트는 피식거리며 딱 잘라 말했다.
“예?”
“자네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기묘한 긴장감이 응접실을 휘감았다.
베리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조심히 바하트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잠깐 나가있어라. 아르디 공과 단 둘이 할 얘기가 있군.”
“예.”
부탑주가 대표로 대답하며 모두를 끌고 나갔다.
그렇게 둘만의 자리가 만들어지자 바하트가 웃었다.
“딸이 있다지?”
“그렇습니다. 올해 로들렌 아카데미에 입학한 과년한 딸이죠.”
“내가 왜 자네의 딸 이야기를 꺼냈을까?”
바하트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하자 아르디 후작은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전하의 따님과 같은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서······?”
“세 번 말하게 하지 말게.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결국 아르디 후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아시는 내용 그대로일 겁니다. 모르는 척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난 전장에 나서지 않은 자네를 뭐라 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요새는 그게 귀족의 미덕이지. 어차피 나가서 피를 흘려봤자 얻을 것도 별로 없는 전쟁. 자네와 자네의 딸이 행한 처신이 옳은 것이겠지.”
바하트의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깊게 숙인 아르디 후작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근데 상대가 먼저 약속을 깼구나.”
“······예.”
“분하지 않나?”
“제가 감히 어찌······.”
“이봐, 아르디 공. 자네가 황제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건 알지만 그게 충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 솔직해지자고.”
계속해서 나오는 바하트의 곤란한 말에 아르디 후작은 난감한 기색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자네가 황가의 은밀한 공인 하에 흑마법사들과 거래를 하고 있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 때문에 아르디 가문이 친황제파를 표명하는 것이겠지.”
“흐흠.”
“조금 전에 말했듯이 쬐끄만 녀석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그리고 이는 곧 기회야.”
“기회라니 설마······.”
“야만족들과의 드잡이질과는 달리 먹을 게 아주 많은 싸움이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나는 여기에 틀어박힌 채 야만족놈들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국지전만 치러야하네. 폐하께서도 그걸 노리고 나를 굳이 이곳으로 파견을 보냈겠지.”
아르디 후작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하트가 말한 기회, 그것은 분명 비옥한 땅을 지닌 타국들과의 전쟁을 의미함이었다.
“폐하께서는 나와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전 병력을 북부에서 물리실 거다. 이미 병력을 다 모아놨으니 따로 모집할 필요도 없이 그냥 이대로 들이닥치면 그만인 거야.”
“전하,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일이 생각보다 커지고 있었다.
아르디 후작은 조용히 생각하다 이대로는 자신의 가문도 아무 이득 없는, 오히려 피해만 막심한 소모전에 동원될 처지였다.
황제의 생각을 알게 되자 피오네가 배반한 것이 사실 알려진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이미 알려졌다면······. 아니지,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이대로 가면 다른 가문이 성장할 때 우리 가문만 퇴보한다.’
이제는 황제가 알았냐 몰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어명은 내려졌고 남들이 달콤한 과실을 취하러 가는 동안 아르디 가문은 집지키는 개가 되어야했다.
그러던 중 후작은 문득 피오네의 편지가 다시 생각났다.
“전하.”
“생각이 끝났나?”
“그렇습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군요.”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우리는 전력을 다해 야만족들을 박살낸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래서 다른 귀족들로부터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를 하고 우리도 후발대로 합류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 가문의 힘이 꽤 많이 필요해.”
아르디 후작은 잠깐 망설였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바하트에게 말해도 되는지.
그러나 그 망설임은 곧 흩어졌다.
귀족 사회에서 뒤처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당장에는 그 영향력이 보이지 않아도 이대로 흐르면 다음 대에서 아르디 후작가는 멸문이 될 수도 있는 일.
“전하. 사실 제게 한 가지 정보가 있습니다.”
“말해줄 건가?”
“이미 어명을 받은 시점에서 저희는 한 배를 탄 것과 같지요.”
“흐흐. 그렇지.”
“후우.”
아르디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전혀 의외의 이름이 등장하자 바하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온단 말인가?
“갑자기 아드리아스가 왜······?”
그의 물음에 아르디 후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크롬웰 백작에게 저희의 활로가 달려있을 수도 있습니다.”
< 219화. 소용돌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