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그들의 과거 >
전쟁이 고착화 된 상태에서도 꾸준히 교전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북부를 대표하는 가문인 클로슈 공작가는 하루도 빠짐없이 적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와하하하! 이 겁쟁이들아, 내가 다시 왔다!”
사자 갈기와도 같이 사방으로 뻗친 붉은 머리가 북풍에 휘날렸다.
짐승의 거친 털로 장식된 가죽 갑옷을 입은 싱클레어 클로슈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롱소드를 든 채 홀로 나타났다.
“또 네 녀석이냐.”
“슬슬 결판을 내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야만족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통곡의 협곡에서 머무르는 가운데 대전사이자 수문장이라 불리는 대전사, 와투나가 거대한 뱃살을 출렁이며 진지 밖으로 나왔다.
“난 너를 이길 생각이 없다구우. 내 임무는 이곳을 지키는 일이라구우.”
“이길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이길 수 없는 거겠지. 잔말 말고 내 칼이나 받아라.”
붉은 오러가 줄기차게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웅혼한 기운이 싱클레어를 중심으로 터져 나갔다.
“즐겁구나!”
콰앙--------!
싱클레어의 공격은 와투나에게 간단히 막혔다.
야만족 대전사 와투나.
비록 공격 능력은 형편없었지만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기형적인 형태의 오러 마스터였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도 거대한 철벽처럼 생긴 방패와 짧은 손도끼 하나 뿐.
“너랑 놀아주는 것도 지겹다구우.”
“하하하하!”
마음껏 자신의 힘을 발산하는 싱클레어는 와투나와 달리 즐거워보였다.
실제로 그가 매일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도 다름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었다.
이미 이곳을 뚫겠다는 생각도 일주일 전에 물 건너간 상태.
애초에 와투나를 뚫을 수가 없었다.
콰과과광---------!
콰드드드득!
그렇게 서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폭음만이 울려 퍼졌다.
야만족 진지 내의 병사들도 근 2주 가까이 반복되는 상황에 익숙해진 듯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놀랍군! 야만족 따위한테 오러 마스터들이 존재할 줄이야.”
“네 녀석 따위는 대족장한테 일합 만에 쓰러질 잔챙이라구우.”
“그니까 길 좀 비켜봐라! 그 대족장이라는 작자를 만나보고 싶구나!”
“정 만나고 싶으면 저 산을 넘어서 가라구우. 혼자라면 충분히 갈 수 있다구우.”
“으하하! 마음 같아서는 가고 싶지만 나도 일단 지휘관이라 책임져야할 게 많아서 말이지!”
그렇게 말한 싱클레어는 정말로 산맥을 넘고 싶은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통곡의 협곡은 북쪽 설경지대에서도 난공불락이었지만, 반대로 내륙에서도 넘어가기 힘든 지형이었다.
“응?”
그때 싱클레어의 눈에 이상한 게 포착됐다.
너무 멀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산맥을 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게다가 마치 허상인 것처럼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본적인 호흡이나 맥박 따위가 전혀 안 보이는 게 특이했다.
마치 죽은 사람인 듯한······.
쿠웅!
“한눈 팔지말라구우.”
보기 드문 와투나의 반격에 싱클레어는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아무리 공격능력이 형편없다고는 해도 상대는 오러 마스터.
날붙이에 베이면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죽는다.
“그래, 그래. 오늘도 실컷 두들기다 돌아가 주마.”
방금 본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대로 정찰조를 파견해 흔적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싱클레어였다.
**
둘뿐인 북부행은 단조로웠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것이 목표였기에 문제가 생길 틈조차 없었다.
“역시 걸어가는 건 느리군요. 문명의 위대함을 새삼 느낍니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에반의 말대로 그동안 대부분의 장소를 마나 부상 열차를 이용해서 다녔기에 체감이 컸다.
통곡의 협곡 근처까지 가는 열차도 원래는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난 직후 전략적인 차원에서 폭파시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근데 계속 궁금했던 것인데 무슨 방법으로 야만족들과 대화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왕이시라면 뛰어난 혜안으로 방법을 강구해두셨을 테지만 그 방법이 궁금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걸 주고 물러나게 할뿐입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
“예. 다른 쪽도 거의 다 도착했군요.”
“설마 지금 언데드도 함께 부리고 계시는 겁니까?”
“예.”
에반은 이미 내 정체를 아는 인물.
덕분에 뭔가를 설명할 때 곤란한 구석이 없었다.
“제가 알기로 언데드와 같은 사역마는 소환자의 곁에서 멀어지면 소환을 유지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 능력 덕분인지 유지가 되더군요.”
“아, 특이체질 말씀이시군요.”
사실은 원죄 때문이지만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체질 때문이 아니라 그저 무식할 정도로 빠른 마나 회복과 넉넉한 마나량으로 버틸 뿐이었다.
“역시 왕께서는 특별하십니다.”
“예, 뭐······.”
그렇게 한참을 에반의 나에 대한 예찬을 들으며 걷자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통곡의 협곡에 도착하려면 아직 남았던 터라 우리는 산 속 한 가운데서 야영을 준비했다.
“요 며칠 느끼는 거지만 정말 능숙하시군요.”
“노숙은 익숙하거든요.”
“높으신 귀족치고 노숙이 익숙한 분이 많지는 않은데 왕께서는 확실히 별나십니다.”
금세 야영의 준비가 끝났다.
나는 거리낌 없이 용아병 하나를 소환하며 공간확장 배낭을 건네받았다.
니켈에게서 배낭에 대한 인수인계를 받은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데려온 드래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분명 그때 에반은 던전 밖으로······.
아! 완전히 밖은 아니고 성벽 위로 옮겨졌으니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니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에반의 태도에 대한 의문이 조금 벗겨졌다.
“저도 함께 있었으니 당연히 알고 있죠.”
“사실 그때 루나와 단 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반은 먼저 빛무리에 휩쓸리셔서 생각을 못했군요.”
나를 왕이니 빛이니 하며 따르는 게 어쩌면 내가 루나를 구하는 장면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루나도 볼 수 있겠군.
“루나도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도 제국에 있는 겁니까?”
“예. 제 부탁으로 저를 도와주고 있어요.”
“흐음······.”
그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자신의 수염을 만졌다.
히든 던전에서부터 느꼈던 거지만 에반은 루나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진 듯했다.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 허어. 제가 걱정을······.”
내 말에 그는 놀라며 중얼거렸다.
자기가 걱정을 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건가?
“그렇군요. 저는 방금 그 아이를 걱정했군요.”
“에반, 실례가 안 된다면 루나와 얽힌 이야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또 괜한 호기심을 건드린 모양이군요. 주군께서 부탁하시는 말이니 못해드릴 것도 없지만 그닥 재밌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니까요.”
에반은 적들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대놓고 피워놓은 모닥불을 뒤적였다.
마치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그 모습에서 나는 그가 말해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루나 펜드래곤. 사실 그 아이와는 별 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모친과 많이 엮였었죠.”
“이브 밀레니엄.”
“강력한 마녀였습니다. 워록이면서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생소한 형식의 마법을 구사하는 마녀. 대체로 오리지널 마법이라고 해봤자 원래 있던 틀에서 변형만 되거나 파생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의 마법은 정말 말 그대로 그녀만이 사용하는 오리지널 마법이었죠.”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루나의 마법도 다른 누군가가 전수받기는 힘들 거다.
그건 오리지널 마법 이전에 선천적인 특질이 필요한 기술이었으니까.
“딱히 그녀를 쫓은 데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성국이 명했었습니다. 저는 이브 밀레니엄의 담당이 되었죠. 오러 마스터가 되기 전부터 그녀를 쫓았으니 인연은 꽤 길었습니다.”
“혹시 이미 죽은 상대에 대한 배려입니까?”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지금의 저는 모르겠지만 주군을 만나기 전까지의 저는 이브 밀레니엄은 무조건 처형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의 죽음도 당연시 여겼겠죠.”
“하지만 시간이 반복됐던 그 공간에 갇혔을 때도 에반은 루나를 신경 써줬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히든 던전에 갇혀있던 시간은 예상 외로 길었다.
그 시간은 루나에 대한 에반의 태도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긴 시간.
그는 분명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했어도 루나는 조심스러워했었다.
“만약, 제가 제 손으로 직접 이브 밀레니엄을 죽였다면 그 아이도 죽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미 세상에 공표했지만 이브 밀레니엄은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반이 죽인 걸로 알고 있죠. 겸손해서 공을 돌리려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가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말한 것뿐이죠.”
나도 이브 밀레니엄이나 루나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이브는 이미 게임 시작 시점에는 죽은 인물이고, 루나도 게임 시나리오 중반쯤에 죽어버린다.
게다가 집회 소속의 워록인 만큼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그녀의 죽음이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정말 웃긴 이야기지만 이브 밀레니엄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예?”
“제가 대륙 10인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지신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칭호를 얻게 된 일화가 바로 막시민 크로넬과의 전투죠.”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다 엉킨 이야깁니다. 막시민과 싸운 일이 거짓은 아니나 전 그의 발가락만큼도 따라가지 못했죠. 그 상황에서 저를 구한 건 이브 밀레니엄. 저를 대신해서 죽었죠.”
“······예?”
“죽기 전에 그녀가 남긴 부탁이 있었습니다. 부디 그녀의 딸만은 헤치지 말아 달라는. 물론 성기사의 입장이었던 저로서는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지만 적에게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이었던 터라 무의식중에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만요. 그렇다면 이브 밀레니엄을 죽인 게 막시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뭔가 잘못됐다.
지금 무슈를 데리고 통곡의 협곡으로 향하는 인물들은 루나와 막시민.
나는 에반을 놔둔 채 급하게 티무르의 시선을 공유했다.
**
“이 수인이 죽은 시체라는 게 안 믿겨.”
“심장에 손을 대면 심장이 안 뛰잖아! 시체 맞다니까?”
티무르를 두고 양쪽에서 왈가왈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막시민이 나른하게 앉아있었다.
아드리아스의 식객인 만큼 밥값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덜컥 부탁을 들어주었지만 후회가 몰려오는 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자벨이라도 같이······.’
그러던 중 문득 루나의 후드가 벗겨지며 은빛의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달빛과 어울려진 그녀의 머리카락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이브 밀레니엄의 딸이었군.”
잊고 있었던 사실.
루나도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돌렸다.
“우리 엄마?”
“그래.”
나른한 이의 눈동자가 오팔빛의 눈과 마주쳤다.
< 218화. 그들의 과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