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등장 >
모하임의 역사는 길었지만 최근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유약한 문사의 이미지가 강했던 모하임은 개국공신 가문이자 공작가였지만 그 힘이 강하지 않아 언제나 여기저기에 치이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일어났다.
서부에서 가장 강한 가문이었던 벤제마 후작가.
그 벤제마 후작가가 모하임에게 정략결혼을 요구해왔다.
사실 후작가와 공작가가 맺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라 별로 큰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후작가가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지위 여부와 상관없이 오로지 힘으로 결정되는 시대상의 논리였다.
대체로 지위와 걸맞은 힘을 가졌던 다른 가문들과 달리 모하임은 약했기에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들이 눈치 챘습니다.”
“오히려 잘 됐다. 후퇴하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피로 물든 대지에서 하얀 정장을 입은 근육질의 사내가 명령했다.
전장까지 직접 참전한 미누스 모하임의 등장이었다.
“흐흐! 흐헤헤헤!”
“대너드. 클루소 녀석은 너한테 부탁한다.”
“이 미친놈을요? 아이고.”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리며 발광하는 꼽추의 사내를 대너드가 한숨을 내쉬며 바라봤다.
전투력은 오러 마스터와 맞먹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 사내는 오로지 미누스의 명령 밖에 듣지를 않았기에 착잡해 보이는 대너드의 반응은 당연했다.
“오늘은 나도 나갈 거니까. 흐으.”
미누스가 금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 지었다.
피가 들끓는 그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혈향에 한껏 고무되었다.
“그동안 사무 작업으로 스트레스가 쌓였었는데······좋군.”
그 말이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모하임 가문의 전사들이 달려 나갔다.
그들은 가문의 정규군이라기보다 용병의 그것과도 같이 통일되지 않은 복장이었으며, 보다 실전적인 형태의 다양한 장비들을 착용한 상태였다.
“대너드 양반! 난 먼저 가겠소이다! 하하!”
“큭큭. 클루소 뒷바라지나 열심히 하소!”
“이런······.”
한 마디씩 하며 달리는 동료들에게 뭐라 하지도 못한 채 대너드는 미친 듯이 날뛰는 클루소를 쫓았다.
그리고 미누스는 힘껏 기합을 내지르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아군들을 양손으로 걷어냈다.
“비켜라! 내가 가장 앞이다!”
광기에 물든 그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모하임 가문의 어울렸다.
포식하는 모하임.
서부의 가장 유력한 가문이었던 벤제마 후작가를 시작으로 긴 세월 모하임을 핍박해온 모든 가문들을 피로 숙청한 광기의 가문.
그 광기의 시초인 전대 모하임 공작, 광견 호그마 모하임으로부터 그 기질을 그대로 빼다 박은 금빛의 미누스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적을 찾아 헤맸다.
“모하임의 이름으로! 모! 조! 리! 죽여라!”
**
전세가 뒤바뀌었다.
외성에 들어온 야만족들과 이제 막 외성벽을 넘고 있던 야만족들은 모하임 가문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그대로 짓눌렸다.
퇴각할 경로조차 확보되지 못한 탓에 안으로는 용아병들에게 당하고 밖에서는 모하임에게 당하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변한 듯한데?”
매그너가 입술사이로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도 웃었다.
그러나 흑마법사는 전혀 당황한 모습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네 녀석들이야. 그리고 난 부탁받아서 돕는 거라 전장은 딱히 상관은 없거든.”
“그런 것치고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군?”
“믿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이 하찮은 것아.”
빙의 됐던 병사들이 하나, 둘씩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냥 무너지는 것이 아닌 독 안개를 뿜어내며 끔찍하게 녹아내려갔다.
“물러나라!”
독 안개에 휘말린 이들이 귀와 눈,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자 매그너가 급하게 소리쳤다.
“어차피 이번 전쟁 자체가 승리에 목적을 둔 게 아니다, 하하!”
서걱-
비비안이 달려들어 말을 하고 있는 이를 베었지만 곧 다른 사람이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는 ‘집회’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나와 같은 말단은 사방에 널렸다. 진정한 어둠은 움직이지도 않았어.”
“아아······.”
사람들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저 괴물 같은 능력만 해도 범접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드는데 그보다 더한 흑마법사들이라니······.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곧 세상을 덮을 어둠이 그대들을······.”
“거기 있었군.”
그때 지금껏 듣지 못한 제 3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주인을 알아차린 비비안이 고개를 돌려 그 주인공을 찾았다.
“아드리아스?”
전격의 해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일은 영주성에 붙어있는 첨탑을 덮쳤다.
콰과과광----!
거대한 충격과 함께 첨탑이 흔들렸다.
마나 저항의 마법진이 설치된 만큼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있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피해가 갔을 법한 파괴력.
그러자 빙의가 됐던 병사들이 끈이 끊긴 인형들처럼 한꺼번에 쓰러졌다.
“도망쳤군.”
“진짜 아드리아스 선배님이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이는 비비안의 예상대로 아드리아스였다.
피오네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그를 알고 있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환호성을 뱉어냈다.
“아드리아스 선배다!”
“아드리아스 선배님! 우린 살았어!”
그들의 환호로 아드리아스의 신분을 확인한 매그너가 그에게 다가갔다.
“크롬웰 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도움을 주어 감사합니다. 그러나 실례지만 이 내성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매그너의 말에 피오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구해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할 판국에 의심을 하다니.
“실례가 되는 물음이지만 저는 이곳의 지휘관으로서······.”
“보르기옌 백작을 만났습니다. 그가 알려주더군요.”
오늘따라 유난히 자주 나오는 주군의 이름에 매그너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습니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르기옌 백작께서는 무사히 황궁 쪽으로 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가 무사하다는 말에 병사들의 안색은 도리어 안 좋아졌다.
분노를 참는 듯한 그 모습에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비비안이 냉큼 다가왔다.
“아드리아스.”
“비비안,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저도 있어요!”
피오네가 급하게 끼어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비비안이 몸으로 아드리아스를 가렸다.
“안 돼. 지금은 내 거야.”
“예?”
비비안은 뻔뻔한 얼굴로 아드리아스의 앞을 막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잠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던 아드리아스는 이내 비비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응.”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응.”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아스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뒤로 학생들이 외쳤다.
“조심하세요!”
“아드리아스 선배! 다치면 안 됩니다!”
“보르기옌을 지켜주십쇼!”
그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학생들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그의 출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보르기옌의 병사들도 저 멀리 나부끼는 모하임과 크롬웰의 깃발을 보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보르기옌에 승리를!”
“와아아아!”
보르기옌 수성전은 제 2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
“어머, 어머. 이 누추한 곳까지 오실 줄이야.”
“허허. 누추하다니. 이 늙은이가 있기에는 과분할 곳이구먼.”
긴 곰방대로 연초를 피우던 에이카 임프가 긴 의자에 누운 채로 모른 드왈스키를 맞이했다.
단 둘만이 존재하는 그 장소에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래서? 분노 때문에 왔다고?”
“그렇다네. 이제 내가 데려가야겠어.”
“흐응. 네가 데려간다고?”
에이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콧소리를 내며 모른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모른도 감정의 변화 없이 그저 웃는 낯으로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정확히 말해봐. 정말 네가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정확히는 우리의 수장께서 원하시는 거지.”
“와, 천하의 모른 드왈스키가 애송이한테 휘둘리는 모습이라니 놀라운 걸?”
“애송이?”
모른의 미소에 금이 갔다.
“말을 조심하거라, 마녀여.”
“왜? 애송이 맞잖아? 고작 스물 남짓한 꼬맹이를 그럼 애송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스릉-
쾅!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칼날이 에이카의 얼굴 옆에 꽂혔다.
하지만 에이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능글댔다.
“어머나! 무서워라. 설마 지금 폭력 행사하러 온 거야?”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무시하는 건 그에게 모든 걸 맡긴 나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일. 자네는 지금 노부를 무시하고 있는 거라네.”
“하이고. 알았어, 알았어. 늙은이가 욱하는 성격은 변하지를 않네.”
“노부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요물이 할 말은 아니군.”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에이카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뭘 줄 거야? 설마 빈손으로 가져가려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다음 차례가 우리였을 텐데?”
“아직 시간이 덜 됐잖아. 미리 가져가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하지 않겠어?”
“흐음······.”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 모른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회를 하나로 만들었을 때, 죽이지 않으마.”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오만한 말에 에이카의 입 꼬리가 씰룩였다.
그리고는 참지 못한 그녀의 웃음이 공간을 흔들었다.
“아하하하하!”
모른은 다시 차분한 기색으로 돌아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에이카 임프. 이미 자네는 우리 수장에게 꼬리를 친 죄로 죽을 운명이었다. 나로서는 많은 양보를 한 셈이야.”
“모른. 나를 웃겨 죽일 셈이야? 네가 살려주기도 전에 웃다가 죽어버리겠잖아!”
여전히 키득거리던 에이카는 이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져가.”
“현명한 판단일세.”
“현명한 판단? 아니지, 그냥 단순히 나를 웃긴 것에 대한 보답이야. 뭐, 내가 웃음이 헤픈 편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서 가장 웃겼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에이카는 이내 숨을 고르고 자리를 가리켰다.
“이왕 온 김에 얘기 좀 하다 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러지.”
모른이 자리에 앉자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 복면의 괴인이 차를 따라주고 사라졌다.
“고맙군.”
“요즘 너네 수장이 꽤 말이 많아. 알고는 있지?”
“대단한 분이시지.”
“어차피 나는 이번 전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페이드나 제스터는 꽤 열이 받았을 거야. 그 두 곳이 전쟁 중에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노리면 꽤 위험할 텐데?”
“허허. 그 분께서는 고작 그런 일로 위험해지지 않는다.”
“흐응, 그래?”
흥미롭다는 듯 모른의 얼굴을 살펴본 에이카는 자연스레 대화를 돌렸다.
“용아병, 거인형 언데드, 그리고 본 드래곤.”
“······.”
“모른, 네 언데드가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어. 넌 이미 위치가 우리한테 노출되어 있으니까. 조금 의심스러운 건 파이시 켈러 정도? 아니면······.”
에이카가 곰방대를 물며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녀는 한껏 입에 머금은 연기를 내뿜으며 어느 형상을 만들었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 녀석이 아닐까? 그게 아니면 네가 고작 손자뻘에 불과한 젊은 흑마법사에게 모든 걸 걸지는 않았을 텐데?”
“허허. 나도 그 언데드들이 우리 수장의 사역마였으면 좋겠군. 하지만 아쉽게도 본 드래곤이 나타난 장소와 수장께서 계셨던 위치가 전혀 달라.”
“재밌네.”
에이카의 눈빛이 요염하게 빛났다.
“정말 재밌어.”
“뭐가 말인가?”
“무려 본 드래곤이잖아? 누구 건지 모른다는 것도 흥미롭고······그동안 집회도 고일대로 고였었는데 조금 변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드네. 그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로 인해 변할 걸세.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자네도 이쪽으로 붙는 건 어떤가?”
“글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증명이 된 게 없는 걸? 그리고 따로 하고 있는 일들도 많아서 정신이 없거든.”
개구쟁이와 같은 표정을 짓는 에이카를 보며 모른은 이곳에 혼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에이카 임프.
그녀는 변덕스럽고 위험한 마녀.
비록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고 있지만 저 표정에서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만약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면 그때 다시 생각해볼게.”
“그리하마.”
“하하! 애초에 날 포섭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마! 괜히 죽이고 싶어지잖아.”
“걸렸나? 허허허.”
살짝 나사가 풀린 대화가 지나가고 에이카가 손짓했다.
그러자 어느새 갑자기 다시 나타난 검은 복면인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저 늙은이한테 분노를 내줘.”
“고맙네.”
모른은 이내 복면인에게 안내를 받으며 에이카가 있는 장소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에이카는 다시 곰방대를 태우며 연기를 흘렸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아드리아스 크롬웰, 아드리아스 크롬웰······.”
어딘가 이상해진 사람처럼 아드리아스의 이름을 되뇌는 에이카였다.
< 211화. 등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