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변수 그리고 위기 >
호넨과의 대련은 뜻밖의 일로 무산이 되었다.
호넨의 뒤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마주친 후작가의 기사가 급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러세웠다.
“아! 크롬웰 각하! 마침 잘 됐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보르기옌에서 지원을 바란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보르기옌에서?
분명 무사히 막아낸 위기였다.
지금쯤이면 지원도 도착했을 테니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보르기옌이면 이번에 언데드들이 날뛰었다는 그곳 아닌가? 무사히 막아냈다고 들었는데?”
함께 있던 호넨도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후작가의 기사는 곧바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에도 다시 대규모의 병력이 침공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번에는 흑마법사가 모습을 직접 드러내어 전장이 혼란스럽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많이 밀리고 있는 겁니까?”
“상대 흑마법사가 네크로맨서입니다.”
기사는 그 한 마디로 설명을 대신했다.
가장 큰 두 가지 위기를 막아내고 마지막 변수라 생각했던 흑마법사들이었는데 대놓고 날뛰는군.
보르기옌에는 비비안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모든 플레이어블이 안전한데 플레이어블이 아닌 비비안이 가장 위험한 곳에 있군.
‘혹시 몰라서 용아병하고 니켈을 남겨둔 게 다행이네.’
보르기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땅속에 잠복하고 있는 내 언데드들을 다시 꺼낼 생각을 하며 기사에게 물었다.
“지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저희 쪽 병력 일부와 아카데미 지원생들 전원이 될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에 호넨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쯧. 대련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짐을 챙기러 가야겠군.”
호넨이 사라지자 기사는 아직도 남아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있습니까?”
“후작 각하께서 크롬웰 각하는 어찌 하실 거냐고 의견을 물어보고 오라 했습니다.”
“저도 지원에 참가할 수 있는 겁니까?”
“사실 후작 각하께서는 내키지 않아하시는 눈치시지만 원하신다면 그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내 즉답에 기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후작의 말은 겉치레와 같은 말이었다.
내키지 않아한다는 말이 본심이고 원하면 참가하라는 말은 정말로 참가하라는 게 아닌 그냥 의례적인 말.
근데 나는 후작의 눈치 따위 보지 않았다.
마나의 문제 때문에 크리브마허와 루도를 소환 해제한 상황이라 보르기옌에 있을 비비안이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생각을 다시 재고 해보심이······.”
“다시 생각해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작이 화를 낼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내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었다.
만약 비비안이 보르기옌에 없었다면 나도 잠자코 이곳에 있었을 테지만 그건 안 되지.
“알, 겠습니다. 그럼 바로 후작 각하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집결지는 어디죠?”
“내성 북문 앞입니다.”
“알겠습니다.”
기사가 사라지자 나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그와 동시에 땅 속의 공간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니켈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선은 가는 도중에 니켈을 통해서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알아봐야했다.
달그락!
니켈의 긍정적인 반응이 전해지고 나는 북문으로 향했다.
**
“질기군. 그리고 많아.”
사실상 보르기옌을 혼자 막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
태양 기사단의 3조장이자 오러 마스터인 레이튼은 온몸을 바람으로 감싼 채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의 바람검에 휩쓸린 수많은 언데드들이 산산 조각난 채 흩어져있었다.
“레이튼 경! 서쪽에 적의 오러 마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누군가가 급히 외치자 레이튼은 곧바로 바람을 이용해 서문으로 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달린 그는 마침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한 기사를 보았다.
‘비비안이라고 했나.’
로들렌 아카데미에서 온 지원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 수준이 절대 학생의 그것이 아니었다.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오러 마스터를 붙들고 있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휘익-
콰아아앙-----------!
바람의 힘을 이용해 높게 치솟은 레이튼은 운석처럼 거한의 오러 마스터에게 꽂혔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아 늑대의 형상의 오러가 단숨에 공격을 차단했다.
“드디어 왔나? 심심했다.”
“냄새나는 입 다물어라.”
레이튼은 싸늘하게 일갈하고 다시 엄청난 속도로 거한에게 쇄도했다.
돌풍이 휘몰아치며 초인끼리의 전투가 진행되는 사이, 무사히 몸을 뒤로 빼낸 비비안이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성벽의 한 가운데.
그녀에게 휴식을 취할 사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콰직!
마침 눈에 들어온 누군가의 위기를 구해낸 비비안은 상대를 살피고 쓰러진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비비안과 달리 얼굴이 드러난 피오네가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몸으로 비비안의 손을 잡고 일어나 검을 고쳐 잡았다.
“괜찮겠어?”
“예.”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여기서 안 괜찮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이미 마나는 고갈이 난 상태고 체력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겪어본 전쟁이라고는 메이튼에서 있었던 완전무결한 승리가 전부였기에 전쟁을 얕보던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틀 째 겪고 있는 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이 오만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이게 진짜 전쟁······.’
메이튼도 원래였으면 이와 비슷한, 아니 이보다 더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걸 아드리아스가 막아냈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 번 존경심이 피어오르는 피오네였다.
“저, 적이 다시 온다!”
적들은 무자비했다.
한 번 밀물처럼 야만족들이 들어왔다가 한 번에 쭉 빠지고 그 자리를 언데드들이 대신했다.
그렇게 언데드를 다 처리했나 싶으면 충분히 휴식을 취한 야만족들이 다시 밀고 들어오는 형식의 반복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길 수 없어.’
피오네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적들의 차륜전으로 인해 결국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지금의 보르기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전방의 영지들로부터 또 다른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일 뿐이었다.
“정신 차려.”
옆에 있던 비비안이 짧고 굵게 말했다.
피오네는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마. 결국 막다 보면 끝이 올 거야.”
비비안은 우직하게 말하며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를 부쉈다.
하지만 피오네는 그 끝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의문이 들었다.
이미 성벽 밖으로는 다음 타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흐압!”
쿠아아앙--------!
꽤 많은 병력을 혼자서 담당했던 레이튼조차 적의 오러 마스터에게 붙들린 상황에서 야만족들이 사다리를 통해 기어코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야만족들이 올라왔다!”
“성벽 아래로 밀어서 떨어트려 버려!”
야만족들은 그나마 상대를 할만 했다.
비록 힘이나 기술에서는 야만족들이 언데드보다 우월했지만 언데드들의 무서운 점은 고통과 감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데드는 팔 한쪽이 날아가도 나머지 한쪽으로 공격을 해오고 기세나 사기 따위가 없었기에 그냥 앞만 보고 우직하게 공격을 해왔다.
그 광경은 인간이 보기에는 공포나 다름없었다.
“막아! 컥!”
그러나 그렇다고 야만족들을 상대하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언데드들 덕분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온 야만족들과 달리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몸을 움직이는 보르기옌의 병력들은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곧 지원이 도착할 시간이다!”
어느새 눈가에 큰 부상을 입은 매그너가 한쪽 눈을 감은 채 외쳤다.
함께 검을 휘두르던 호란은 그런 매그너의 말에 안색을 굳힌 채 묵묵히 할 일을 했다.
호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원이 곧 도착한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병사들이 힘을 내게 하기 위한 백색 거짓말.
“다시 나타나지 않는 건가.”
눈에 튄 야만족의 피를 닦아낸 호란이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지금 다른 영지에서 올 지원보다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저번 전투 때 보았던 전설적인 존재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부탁한다.”
호란이 애절하게 중얼거리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야만족 하나를 찔렀다.
그렇게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성벽 위는 거의 함락 직전에 도달했다.
“매그너 경! 이제 더 이상 안 됩니다! 병력의 수도 온전치 못하고, 무엇보다 성벽 위에 적들이 너무 많이 올라섰습니다!”
“으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검을 휘두른 매그너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호각을 불어라. 내성벽으로 후퇴한다.”
“알겠습니다!”
내성벽으로 후퇴한다는 말은 외성에 존재하는 백성들의 집과 가게, 재산들을 포기한다는 의미.
하지만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뿌우우---
매그너가 명령한대로 호각이 울리자 보르기옌의 병력들은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는 자들도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두 내성벽으로 물러난다! 레이튼 경! 부디 적들을 저지해주길 바라오!”
병력들이 내성으로 빠지게 되면 적들도 쫓아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들의 시선을 끌며 막아야했기에 매그너가 레이튼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거한의 오러 마스터와 전투 중이라 그럴 여유가 없어보였다.
“내가 할게.”
그때 검붉게 변한 전신 갑옷의 비비안이 나섰다.
매그너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이런 학생에게 부탁해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실력을 전쟁 기간 동안 여실히 느낀 탓에 안도하는 마음도 들었다.
“선배님. 제정신이세요? 죽을 거라고요!”
하지만 그런 그들 사이를 피오네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매그너 경은 지휘를 계속해야해. 누군가는 막아야하고, 그건 지금 나밖에 없어.”
“그래도 선배님은 아카데미 지원생이잖아요! 아니, 애초에 로들렌 제국 사람도 아니면서! 이곳에 죽으러 온 게 아니라 지원을 온 건데······!”
두서없는 피오네의 말에 비비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오네.”
그리고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땀에 젖은 그녀의 녹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쏟아졌다.
“만약 내가 죽으면, 아드리아스를 잘 부탁해.”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이 왜 죽어요!”
이틀 동안의 전장은 피오네조차 바꿔 놓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로의 목숨을 지켜준 전우애는 너무나 단단했기에 비비안의 선택을 피오네는 돌이키고 싶었다.
“됐어요! 지금이라도 빨리 저랑 같이 내성으로······.”
“매그너 경. 피오네 아르디를 잘 부탁해요.”
비비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적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녀는 무표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를 피오네와 매그너는 느낄 수 있었다.
“비비안 벨로칸!”
피오네가 마지막까지 소리쳤지만 이내 전투의 소음이 휩쓸려 사라졌다.
매그너는 그런 피오네를 억지로 붙잡으며 그녀를 한쪽 어깨에 메고 내성으로 뛰었다.
“이거 놔요!”
“미안하다. 나중에 제대로 사과하지.”
매그너도 묘령의 여인에게 이런 위험한 임무를 맡긴 게 마음이 아팠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이 죗값은 나중에 제대로 치루지.”
그렇게 모두가 내성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길목을 막아선 비비안이 적들을 맞이했다.
서걱! 석!
스륵-
마치 귀신과도 같은 검술에 적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점차 많아지는 적의 수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으럅!”
쿵!
야만족이 휘두른 철퇴에 어깨 갑주가 부서졌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비비안은 결국 부서진 갑주를 벗어냈다.
“흐흐.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
비비안을 둘러싼 야만족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도리어 뒤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임무는 무사히 성공했다.
모두가 내성벽에 들어가고 문을 걸어 잠근 상태.
‘됐어.’
그녀는 미소 지었다.
“비비안!”
내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오네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비비안은 천천히 검을 들어 자신의 목에 대었다.
“네 녀석! 목숨을 끊을 셈이냐!”
야만족 중 하나가 급히 소리쳤다.
그리고 비비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을 그으려 할 때.
퍼버버벅!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며 주위에 있던 모든 야만족들을 베어넘겼다.
“아?”
비비안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드리아스?”
< 209화. 변수 그리고 위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