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엇갈리는 운명 >
“아무리 실책이 있었다고 해도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군.”
통곡의 협곡이라 불리던 북부 산맥의 관문 요새는 야만족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야만족들을 지원해주는 집회의 몇몇 흑마법사들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이다! 갑자기 나타난 용아병과 본 드래곤이 내가 일으켜 세운 언데드를 모두 쓸어버렸다고!”
“용아병? 본 드래곤? 전장에 나가서 꿈이라도 꾸고 온 건가, 아니면 패배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건가?”
“함께 있던 야만족들도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당장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나!”
퀜튼이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평소에 냉정하고 침착하기로 유명한 그가 이 정도로 열을 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함께 있던 흑마법사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화를 지켜보았다.
퀜튼을 몰아붙이던 에이카 파벌의 흑마법사, 코마가 코웃음을 흘렸다.
“이미 들어봤다. 누가 야만족들 아니랄까봐 신을 봤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거하게 하더군.”
“그 신이라는 게 내가 방금 말한 본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지만 거인으로 만든 것 같은 구울도 있더군.”
“······너, 정말 머리 괜찮은 거냐?”
“사실이라니까!”
“아니,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네크로맨서니까 잘 알 것 아니야. 그게 정말 가능한 언데드들이라고 보는 거냐?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본 드래곤과 거인 구울? 용아병은 우스운 수준이군.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사역하고 있다는 거지?”
“나도 모른다.”
퀜튼이 굳은 안색으로 말하자 역시 보라는 듯 코마가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네크로맨서들은 네가 알 것 아닌가? 그런 네가 모른다면 도대체 누가 알지? 그런 언데드들을 사역할 만한 네크로맨서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네가 모르면 안 될 텐데?”
“아마 파이시 켈러가 아닐까 추측은 하고 있다.”
“그 반송장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코마의 공격적인 말투에 퀜튼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사실 파이시가 그런 언데드들을 사역하고 있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비록 중립에 속하는 네크로맨서였지만 그녀도 엄연히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흑마법사.
교류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처음부터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녀는 중립이 아닌 본인의 파벌을 따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역사에 이름을 알렸던 네크로맨서인 불변의 하룬겔이 환생이라도 한 것인가.
퀜튼은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것도 그렇지만 온몸을 엄습해오는 짙은 패배감으로 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언데드는 확실한 본 드래곤.
그러나 퀜튼은 드래곤의 사체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고 해도 언데드로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 격차에서 다가오는 패배감은 오히려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다시 가겠다.”
“뭐? 보르기옌에?”
“그래.”
“보르기옌에는 이미 지원군이 도착했어. 게다가 그 지원군에 태양 기사단도 합류했다고 하더군. 차라리 다른 곳을 공략해야해.”
“닥쳐라.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지? 난 모른 드왈스키의 수석 제자다! 내가 보르기옌을 공략하겠다면 공략하는 거지, 감히 너 따위가 막아서?”
“이성을 잃었군.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이번 실패로 집회에서 네게 페널티를 줄 거니까 처신 잘하라고.”
코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흑마법사들도 퀜튼의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비웃음을 머금으며 사라졌다.
그러나 퀜튼은 주변의 반응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본 드래곤······. 그래, 내가 술사를 죽이고 강탈하면 그만이다.”
사실상 술사를 죽이면 그대로 소멸하는 사역마를 강탈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퀜튼은 자신의 사형제들인 모굴과 아스란을 처리하며 얻어낸 물건들로 충분히 가능하리라 보았다.
“기다려라.”
퀜튼의 얼굴이 섬뜩한 살기를 품었다.
**
피오네는 예상치 못한 여정에 참가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 후작가 쪽에서 아드리아스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받은 뒤 그쪽으로 가려했지만 어쩌다 엮이게 된 태양 기사단과 함께 최전방 영지인 보르기옌까지 오게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정말 마가 끼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드리아스가 살아있다는 소식 뿐.
그의 서신에 따르면 적은 오러 마스터가 아니었다고 했다.
사실 적이 오러 마스터가 아니어야 아드리아스가 살아있는 게 말이 되기는 했지만······.
‘뭔가 있단 말이야?’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조금 있었다.
그 부분을 콕 집어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그저 의문으로만 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오네 아르디.”
이곳에 오자마자 보게 된 비비안 벨로칸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예, 선배님.”
“얘기해줘.”
전날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그녀는 곧바로 아드리아스에 관한 소식만을 물었다.
그가 함께 왔냐는 질문부터 다친 곳은 없는지, 또 무슨 문제는 없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탓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래서 지쳤으니 다음날에 이야기해준다며 빠져 나왔었는데 식사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 기가 질려왔다.
“저도 지금 상태는 잘 몰라요. 어제 간략하게 말했다시피 아드리아스 선배님은 클라우디아에 있고 괜찮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이에요.”
“어땠어?”
“예? 뭐가요?”
“계속 따라다녔잖아. 아드리아스가 메이튼에서 활약했다며.”
“예, 그랬죠. 그냥 평범하게 대단했어요. 그 이상의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
“아······.”
메이튼에서의 활약도 집회의 정보로 해낸 게 아닌가하며 살짝 의심하고 있는 피오네로서는 이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하다가는 아드리아스에 대한 질문만 받을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면서 들었는데 여기도 완전 큰일이었다면서요?”
“응. 괴수 대전이었어.”
“괴, 괴수 대전?”
비비안의 나온 말이 맞나 다시 한 번 확인한 피오네는 이어진 비비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엄청 큰 언데드들이 도와줬어. 그리고 작은 언데드들도.”
“사실 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거든요. 흑마법사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서 서로 싸우다니······.”
“아드리아스 아직도 좋아해?”
겨우 화제를 돌렸나 했는데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비비안의 물음에 피오네가 진땀을 흘렸다.
“물론이죠. 선배님의 활약을 직접 보기도 했고······.”
“······그래. 아드리아스가 멋있긴 하지.”
체념한 듯 중얼거리는 비비안을 보며 피오네가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비비안 선배님도 좋아하세요?”
“응.”
즉답이 나오자 오히려 놀란 피오네가 조심히 물었다.
“저도 아드리아스 선배님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괜찮은 건가요?”
“어쩔 수 없어. 누군가의 감정을 내가 막는다고 막을 수는 없으니까.”
뭔가 해탈한 듯한 그녀의 말에 피오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게다가 아드리아스는 내가 아닌 너를 선택했으니까.”
무표정해보이지만 눈동자에 담긴 깊은 슬픔을 읽어낸 피오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렇죠. 아드리아스 선배님은 저를 선택해서 데리고 가셨으니까요.”
피오네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흠칫했다.
비비안을 도발할 생각도 없었고, 튀어나온 그 말은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응.”
비비안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다 먹었으니까 먼저 일어날게.”
“예, 선배님. 들어가세요.”
왠지 씁쓸해 보이는 뒷모습의 비비안이 떠나자 혼자 남은 피오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그랬지?’
방어기제처럼 내뱉은 말.
마치 아드리아스를 빼앗기기 싫은 것처럼······.
“그럴 리가.”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고작 며칠 동안 함께 있던 사이.
게다가 이성으로 서로를 생각했던 적은 전무했다.
그저 성격 나쁜 변덕이 들었었나보다 생각하며 피오네는 마저 식사를 마쳤다.
**
클라우디아에 도착한 지 벌써 사흘 째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정말 운이 좋게도 피오네가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보르기옌으로 떠났다는 말에 쾌재를 불렀다.
“운이 좋군.”
피오네만 생각하면 분명 운이 좋았지만 이곳에는 뜻밖의 불청객이 있었다.
“뭐가 운이 좋다는 말이냐?”
호넨이 친한 척을 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분명 이 녀석한테는 따로 용건이 있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물론이지! 난 새벽부터 일어나서 몸을 푼다고. 그것보다 넌 너무 게으른 것 아니냐? 어떻게 그리 게으르면서 괴물이라는 칭호를 가졌는지 모르겠군.”
무투의 호넨.
아니, 불사자 하네스라고 불리게 될 이 남자는 후에 제파르 교단에 가입하여 제파르의 화신이 될 남자였다.
“그보다 여기는 전방이라면서 생각보다 조용하니 심심하군. 이왕 이리 된 거 나와 대련이나 하지 않을래?”
호넨의 제안에 잠시 망설였다.
그는 분명 미래의 골칫거리가 될 강력한 빌런.
하지만 지금 그를 죽이는 게 정답일까?
그는 엄연히 로들렌 아카데미에 초대되어 온 손님이자 무려 제국을 위해 싸워주는 용병.
아마 그를 죽이게 되면 보통 일로 끝나지는 않겠지.
‘하지만······.’
더 이상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그를 이곳에서 만난 게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가 강력한 빌런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요새 안색도 좋지 않더니 아무래도 메이튼에서 한 방 먹은 모양이군. 하하! 약자를 상대로 대련을 요청하는 것도 대인배가 할 짓은 아니지. 오늘은 내가 물러주마.”
“아닙니다.”
나는 니켈과 용아병들을 여전히 소환해놓은 탓에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시죠. 대련.”
“오오? 정말 괜찮겠나? 몰골이 영 힘도 못쓰고 질 것만 같은데?”
“당신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호넨의 입가에도 호선이 그려졌다.
“그래? 그렇다면 기대되는군. 참고로 나는 밀레니엄 아카데미에서 단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 소문의 괴물은 얼마나 강한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 게다가 이번에 메이튼에서도 활약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호넨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미 나는 마음을 다잡은 상태.
곧 죽을 녀석의 말을 귀담아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 빌런이 된 녀석은 아니지만······.’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게 있었다면 지금까지 내가 죽인 모든 인물들에게 사과를 해야겠지.
“그럼 연무장으로 가볼까?”
“그러죠.”
나는 지금부터 미래의 빌런이 될 호넨을 죽인다.
< 208화. 엇갈리는 운명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