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태풍의 눈 >
피오네 아르디는 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전장은 거의 정리가 된 분위기.
애초에 아드리아스의 마법진이 제대로 먹힌 시점에서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기가 막히네.”
공격용 마법진은 상대가 미리 대비만 하고 있다면 파훼하기도 쉽고 막기도 쉬웠기에 전장과 같은 실전에서는 아군에게 사용할 수 있는 방어용 마법진이나 보조 마법진만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허를 찔렀다.
적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본인들이 허를 찔렀다고 생각했기에 전혀 대비를 할 생각이 없었을 거다.
습격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빨리 성벽을 함락할 생각만 하지 미리 공격을 예상하고 마법진을 깔아둔 걸 누가 과연 짐작하겠는가.
“여기 있었군. 피오네 아르디.”
잠시 멍하니 서있자 메이튼 백작이 피에 젖은 몰골로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저렇게 지저분해졌을까 생각한 피오네는 고개를 숙였다.
“승리를 축하드리옵니다.”
“이건 내 승리가 아니다. 크롬웰 공과 자네의 승리지.”
백작의 말에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피오네의 얼굴이 금갔다.
이건 엄연히 아드리아스의 계획과 함정.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그저 그를 따라다니며 한심하게 쳐다본 것뿐이었다.
사실 아드리아스의 개인적인 무력은 너무나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그 외의 요소들은 실망을 많이 했었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인물.
거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불쾌한 사람.
그게 요 며칠 아드리아스를 따라다니며 생각한 피오네의 감상이었다.
“이 모든 일은 크롬웰 공의 계책이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아니지. 그대가 동문으로 와서 출진할 것을 조언해주지 않았다면 이만한 대승을 거두지는 못했을 거야.”
“그 조언도 크롬웰 공이 시킨 일입니다.”
“그래. 하지만 결국 나를 설득하여 성문을 열게 만든 건 자네지. 사실 그대의 말을 듣고도 출진할 생각은 없었어. 그러나 그대는 잃을 걸 두려워해서는 얻는 것도 없다고 말하며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지.”
“과찬이십니다. 전 정말 아무 공이 없습니다.”
“고집이 센 기사로다. 알겠다. 일단은 돌아가도록 하지.”
병사들에게 전장 정리를 맡긴 백작이 이내 도시를 향해 말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수많은 인마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핫핫핫! 이번 전장의 주역이 저기 오는군. 남문도 잘 지켜낸 모양이야.”
다가오는 인물들을 확인한 메이튼 백작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동문으로 왔다는 것은 남문도 무사하다는 증거였기에 기쁘지 않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각하! 무사하십니까!”
켄드릭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메이튼 백작은 웃어 보이며 양팔을 벌렸다.
“보다시피 멀쩡하다! 핫핫핫!”
“다행입니다. 이곳도 성문을 개방했군요.”
“그래. 여기 있는 피오네 경이 조언해주었지.”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가온 아드리아스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꾸벅 숙여보였다.
그 과묵한 모습에서 오히려 호감을 느낀 메이튼 백작이 소리쳤다.
“메이튼의 영웅이 오셨군! 이 모든 일들이 크롬웰 공 덕분이오!”
“아닙니다. 애초에 결과를 만든 건 여기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노고지, 제 덕분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피오네 경도 그러더니 크롬웰 공도 너무 과하게 겸손하오.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정말 할 말이 없소.”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혹시 적들 중에 마법사를 못 보셨습니까?”
“마법사? 야만족 중에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드리아스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본 메이튼 백작은 주변에 물었다.
“혹시 이 중에 적의 마법사를 본 자가 있느냐?”
함께 온 기사들이 전부 못 보았다고 대답하자 메이튼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확인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왜 물어봤는지 물어도 되겠소?”
“적들은 소리 소문 없이 메이튼까지 왔습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당연히 마법사의 도움이 있었다고 판단되어 물어봤습니다.”
“그렇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어.”
메이튼 백작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전투를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마법사의 흔적은 생각나지 않았다.
“통곡의 협곡이 함락될 당시에도 흑마법의 흔적이 나왔다고 하니 이번에도 흑마법사들이 개입한 건가. 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주 쥐새끼처럼 행동하는 모양이오.”
“전방에서는 종종 흑마법사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켄드릭도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튼 백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야만족들이 제국을 공격하는 것도 흑마법사들이 배후에 있을 지도 모르겠군. 후방에 있다고 안심하지 말고 대비를 철저히 해야겠어.”
메이튼 백작은 시선을 돌려 피에 젖은 대지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적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피가 강을 만들고 있었다.
아드리아스가 아니었다면 저 시체들의 주인은 메이튼의 것이었을 수도 있는 일.
“할 일이 많군.”
메이튼 백작의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
쾅!
최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호화스러운 책상이 반으로 부러졌다.
책상을 내려친 주인은 무표정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차가운 분노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당장 재상을 불러와라.”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부름을 받은 헥토르 카자프가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헥토르. 내가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하지?”
평소와 다른 황제의 분위기에 헥토르는 침을 삼켰다.
사실 헥토르도 조금 전에 들려온 메이튼의 지원 요청에 정신이 없었던 상태였다.
“감히 제국을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대놓고 후방을 노리고 있다. 그렇게 많던 제국의 초인들은 보상을 내걸었음에도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지. 짐의 명이 우스운 건가?”
“아니옵니다, 폐하. 아마 그들도 갑작스러운 전쟁에 당황하여 준비가 늦는 걸 겁니다.”
“헥토르. 헥토르 카자프.”
“예, 폐하.”
“짐은 눈 뜬 장님이 아니다. 우롱하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헥토르는 곧바로 검을 뽑을 것 같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참았다.
원래는 원정이 되었어야 할 이번 전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제국은 북부 야만족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오명을 남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주변 국가들에서 제국의 독선에 대한 불만 어린 목소리가 나오고 있던 가운데, 이번 일은 크나큰 패착이었다.
아마 더 이상 제국의 위상이 예전만 못 할 건 당연한 일.
“그래서. 메이튼에 지원을 갈 병력은?”
“지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혹 폐하께서 원하시는 파견 부대가 있으시다면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메이튼은 이미 늦었다. 바로 코앞까지 적들이 왔다고 하니 아마 함락당하겠지. 버틸 수 있는 시간도 고작해야 하루 이틀이고.”
“······그렇습니다.”
“태양 기사단을 파견하겠다.”
“태, 태양 기사단······!”
황궁에 있는 여러 기사단 중 근위기사단을 제외하고 수위를 다투는 기사단이었다.
전원이 오러 마스터로 이루어진 근위기사단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강자들이 모인 전투 부대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메이튼에서 수도까지는 꽤 멀지만 그렇다고 안심을 할 수도 없지. 듣기로는 야만족들 중에도 오러 마스터가 조금씩 보인다고 들었다. 만약 메이튼을 공격한 야만족 무리에도 오러 마스터가 있다면 꽤 골치 아픈 일이 될 테니 애초에 싹을 제거하겠다.”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급한 정보가 있다는 무언의 신호에 황제가 들어오기를 허락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막 도착한 전언입니다. 메이튼의 방어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습격한 적들을 괴멸, 도망친 적들은 극히 적고 대부분 사살했다고 합니다.”
“뭐라?”
적들이 쳐들어와 지원을 요청한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적들을 괴멸시켰다는 보고에 헥토르와 황제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간략한 전공 보고에는 이번에 메이튼으로 지원 파견이 된 아드리아스 크롬웰 백작이 며칠 전부터 미리 준비한 마법진을 이용해 적들을 분쇄했다고 합니다.”
“크롬웰 백작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의 등장에 황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렇습니다. 마법진이 발동된 이후, 당황한 적들을 향해 성문을 열고 출진하여 분쇄했다고 합니다.”
“지원 요청 건은?”
“괜찮다고 합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졌다.
분노하던 황제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알았다. 이만 나가보아라.”
“예! 폐하!”
급보를 전하러 온 수하가 나가자 집무실 내부는 침묵에 잠겼다.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헥토르는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습격 소식, 그리고 이어진 승전 소식.
사실 그가 알고 있는 메이튼의 전력으로는 적을 하루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그렇기에 이미 메이튼이 함락이 되었을 것을 가정하고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때 조용히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무도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후방에서 굳이 마법진을 설치한 것도 이상하고, 마치 미리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군요.”
“태양 기사단의 출전은 번복하지 않겠다. 대신 모두를 보내는 게 아닌 3조의 인원들만 보내지.”
“메이튼으로 말입니까?”
“메이튼을 경유해서 전방으로 간다. 그리고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한 번 살펴보게 해라.”
“알겠습니다.”
“이제 혼자 좀 있고 싶군.”
황제의 축객령에 헥토르는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서 나온 그는 곧바로 정보부서로 향했다.
황제의 명령도 하달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메이튼의 일이 어찌 된 건지 정확한 파악이 필요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그래. 메이튼의 소식은 들었나?”
“저희도 방금 확인했습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또 한 건 했더군.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피오네의 연락은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쁜 모양입니다. 아마 오늘 안에는 이번에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보내줄 것 같습니다.”
피오네 아르디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던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있었던 보고에서 아드리아스가 메이튼 주변으로 마법진을 그리는 기행을 벌인다고 했을 때는 헥토르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행을 벌인다고 생각할 뿐.
하지만 이번 전투로 인해 그 생각이 완전 뒤바뀌었다.
‘미리 예측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야.’
조심성이 많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치기에는 너무 시기적절한 행동이었고, 만약 적들이 하루나 이틀 빨리 왔으면 완성되지도 못했을 대규모 마법진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것이냐.”
최근 그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도 그렇고, 그와 거래를 한 모하임 공작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태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원래는 모든 걸 주도했어야 할 황궁이 아드리아스에게 주도권을 뺏딘 기분이 들었다.
‘그건 너무 억측인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일로 인해 그의 위상이 높아질 거라는 사실.
앞으로 점점 더 아드리아스를 건드리기 애매해질 게 분명했다.
“하아. 이제 제국 전역으로 그의 이름이 퍼지겠구나.”
아드리아스 크롬웰.
헥토르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203화. 태풍의 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