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아드리아스의 함정 >
“당장 수도로 연락을 해라.”
메이튼 백작이 성벽 위에서 말했다.
적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메이튼의 동문으로 다가와 있는 상태.
그것도 소수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닌 꽤 많은 숫자였다.
“메이튼 각하! 남문! 남문에도!”
“뭐라고?!”
메이튼은 거대했다.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외성벽은 모두 둘러보려면 한 세월이 걸릴 정도.
그렇기에 지금 그가 서있는 동문에서 남문까지 가려면 꽤 시간이 걸렸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브람스는?”
“기사단장은 지금 막 병력들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남문은 브람스에게 맡기겠다. 어서 전언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각하.”
상황이 급박한 가운데 메이튼 백작의 아들인 켄드릭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성벽 아래에서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며 물자를 급하게 준비했다.
“화살! 화살은 저쪽으로 옮겨야지! 아니, 기름은 여기서 끓이고 가지고 올라간다고 말했지 않나! 성벽 위에 두면 병력들이 오가는 길목이 좁아진다고!”
평소 빈틈없던 메이튼 백작의 교육 덕분에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일을 처리했다.
아직 성벽 위로 직접 올라서서 적들의 모습을 확인한 건 아니라 긴장이 덜한 것도 있었다.
“아! 크롬웰 각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지?”
“방금 막 도시 안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매일 도움은 안 되고 바깥만 싸돌아다니더니 오늘은 부리나케 돌아왔군.”
요 며칠 아드리아스를 관찰하려던 켄드릭은 번번이 그 계획을 무를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아스는 매일 도시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하고 돌아왔다.
게다가 꼭두새벽부터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기에 도저히 말을 붙일 틈이 없었다.
그가 뭘 하고 다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워낙에 바빴던 탓에 미처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면 한 번 알아볼 생각이었지만 아드리아스가 이곳에 온지 고작 나흘 만에 이런 비상상황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소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야?”
“남문에도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아니 다른 영지들은 눈 뜬 장님들이었다는 말이냐? 야만족들이 이곳까지 올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울분을 터트린 켄드릭은 이내 사람들을 지휘하며 남문을 위한 물자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적들을 막아야 할 때였다.
진짜 문제라면 적들의 규모를 아직까지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너무나 갑작스러운 습격에 적에 대한 정보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남문은? 남문의 상황은 어떻지?”
“남문도 마찬가지로 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화살부터 서둘러라! 적의 접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남문은 늦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적의 진군을 그대로······.”
마치 순간 이동을 한 듯 갑자기 나타난 적으로 인해 대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켄드릭은 일단 자신의 비서에게 사람들의 지휘를 맡기고 서둘러 남문으로 달렸다.
그리고 곧이어 성벽 위로 올라서자 드러난 광경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갑자기 나타난 병력인 만큼 많아도 그리 많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눈앞의 시야를 빼곡히 채운 인간의 파도는 그의 예상을 부정했다.
“소가주. 오셨습니까.”
“브람스 경. 저건······.”
메이튼의 기사단장인 브람스가 결의를 다진 얼굴로 켄드릭을 맞이했다.
“소가주. 이런 말을 제가 한다면 무례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도 되겠습니까?”
“마, 말씀하십시오.”
“적들은 남문과 동문으로 왔습니다. 비록 수도로 향하는 길목은 막혔으나 그렇다고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 말은 지금 저보고 도망치라는 소립니까?”
“목소리를 낮추셔야 합니다. 병사들이 들으면 사기가 떨어집니다.”
“전 죽어도 메이튼에서 죽습니다. 이 땅은 우리 메이튼 가문의 것입니다. 여길 버리고 어디로 도망간다는 겁니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이어지는 미래는 암울합니다. 메이튼이 함락되고 제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후에 제국이 승리를 거두더라도 메이튼을 다시 거두기는 힘들 겁니다.”
“죽으면 그런 것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전 귀족입니다.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삽니다.”
“알겠습니다. 소가주의 뜻을 받아들이지요.”
브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다시 봐도 믿기지가 않는 숫자의 적이 드글드글했다.
메이튼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후방의 병참기지로 운용이 되는 영지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외벽까지 내준다고 가정하고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이틀을 버티기 힘들겠군요.”
“그런 말을 해도 전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부디 지원이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그렇게 켄드릭과 브람스가 본인들만 들리는 목소리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눌 때.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우우우웅-----
거대한 공명음이 도시 전체를 울렸다.
아니, 도시 내부가 아닌 도시를 둘러싼 땅들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또 뭐야!”
병사들과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지휘관들은 그런 그들을 애써 다독이며 혼란스러워했다.
“이건 마법진의 공명음입니다!”
동문에 있던 메이튼 백작 휘하의 마법사가 소리쳤다.
그의 말을 들은 메이튼 백작이 서둘러 물었다.
“야만족들이 마법도 다룬다고?”
“그, 그럴 리 없습니다. 야만족들은 마법과 같은 고차원의 문명을 알 리가······.”
“그렇다면 저 마법진의 공명음은 뭐란 말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각하.”
돌연 다른 곳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메이튼 백작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온 피오네가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하고 있었다.
“저건 우리 마법진이에요.”
“뭐라? 우리 마법진이라니? 그보다 크롬웰 공은 어디 있지?”
“저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데 일단 크롬웰 공은 남문 쪽으로 갔어요. 하아, 그동안 무슨 뻘짓을 그리 하나 했더니······.”
말을 채 잇지 못한 피오네가 이내 손짓했다.
“시작됐어요.”
성벽 위에 있던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야만족들을 밟고 있는 땅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콰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대지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
“이게 대체······.”
켄드릭이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거대한 폭음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틈에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었다.
“누, 누구냐······. 크롬웰 각하?”
“소가주님. 지금 이곳의 지휘관이 소가주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여기 있는 브람스 경이 남문 지휘관입니다.”
“브람스 세비에르라고 합니다.”
브람스가 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나는 곧바로 그에게 말했다.
“브람스 경. 지금 당장 성문 밖으로 나갈 병력을 준비할 수 있습니까?”
“성분 밖으로 나갈 병력 말씀입니까?”
“예. 저걸 보십시오.”
내가 손짓한 곳에는 마법진에 의해 진형이 붕괴되고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는 적의 병력들이 보였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물론 이대로 있어도 수성에는 성공하겠지만 정돈이 된 병력과 부딪히면 큰 피해가 있을 겁니다. 차라리 지금 나가서 적들을 쳐부숴야 피해 없이 상대를 전멸시킬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브람스가 잠시 고민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오히려 옆에 있던 켄드릭이 소리쳤다.
“한슨 경!”
“옙!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성벽 위의 병력들을 성문 앞으로 집결시키시오!”
“아, 그······. 옙! 지금 바로 집결시키겠습니다!”
잠시 브람스의 눈치를 살피려던 한슨이라는 기사가 곧바로 병력을 준비하기 위해 떠났다.
그 사이에도 폭음은 끊임없이 들려왔으며 끝날 줄 모르는 마법이 진행되고 있었다.
“브람스 경. 이번 월권행위는 후에 달게 죗값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성문 앞으로 가보지요. 경께서는 지휘를 계속 부탁합니다.”
“아닙니다, 소가주. 저도 따라가지요.”
브람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이라 당황한 모양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내 최소한의 인원만 남긴 채 모두가 남문에 있던 모두가 거대한 성문 앞에 집결했다.
나도 말 한 필을 빌리며 선봉에 선 브람스와 켄드릭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출진이다! 개문하라!”
“개문! 개문하라!”
순식간에 이루어진 판단과 상황 변화, 그리고 명령이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병사들은 본인의 두려운 감정이나 의지를 배제한 채 명령을 따르는 모습이었다.
이내 거대한 성문이 열리며 도개교가 내려갔다.
“출진이다! 전속력으로 돌격하라! 정신을 못 차리는 적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브람스가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옆으로 나와 켄드릭을 따라나서자 병사들도 정신없이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크롬웰 각하! 혹시 저 마법진은 각하께서 준비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말을 달리며 켄드릭이 옆에서 물어왔다.
아직 거리는 조금 남았기에 시간은 꽤 있었지만 전투를 앞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켄드릭이 다시 보였다.
긴장하지 않는 건가?
“마법진은 그럼 언제 끝납니까?”
“지금.”
내 말이 끝나는 동시에 폭음이 잦아들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 적 진형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확인하지 않아도 붕괴되었을 거라는 것이 명확했다.
“늦지 않았다! 달려라, 이놈들아!”
브람스가 뒤따라오는 기사들을 재촉했다.
어차피 보병 병사들은 우리가 쓸고 나간 후에 남은 잔반들을 처리할 테니 문제될 게 없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우리는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몰아쳐야 했다.
“보인다!”
이내 육안으로 식별이 될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적들은 지금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처참한 상태.
“다시 말한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적들이 살아있으면 언제 너의 가족을 헤칠지 모른다!”
브람스가 긴장한 기사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치며 가장 먼저 적의 진형으로 들어갔다.
푸슉-
“크억!”
마법진으로 인해 이미 피칠갑을 한 야만족 하나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차례로 이루어지는 기마병들의 충돌에 적들은 저항 하나 못하고 그대로 쓸려나갔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
언뜻 보면 잔인했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내 마법진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반대가 되어 메이튼의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갔겠지.
솔직히 이렇다 할 활약도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검으로 베었다.
내 검을 막는 상대는 단 하나도 없었고 모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목을 내주기만 할 뿐이었다.
“적들이 도망친다!”
“쫓아! 쫓아라!”
제대로 수습조차 안 된 채 도망치는 적들은 기병들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결국 남문으로 온 야만족들은 대부분이 죽고 도망친 이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이겼다!”
“승리다! 메이튼이 승리했다!”
병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숨을 골랐다.
비록 손쉬운 승리였다고는 하지만 기가 다 빨려버린 느낌.
정신이 피폐해졌다.
“크롬웰 각하! 우리가!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게 다 각하 덕분입니다!”
켄드릭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내게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의 몸도 온통 적의 피로 물들어있었다.
“기뻐하기는 이릅니다. 아직 동문이 남아있어요.”
“아!”
“이곳에만 마법진을 깔아둔 건 아닙니다. 네 군데의 성문 앞에 모두 깔아두었지요. 아마 동문도 마법진이 제대로 발동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승리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켄드릭이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곧바로 전장을 수습하던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이대로 동문으로 진격한다!”
병사들이 지쳐 보이지만 어쩔 수 없겠지.
일단 피오네한테 미리 계획을 말하며 메이튼 백작에게 보내놓았지만 어떻게 됐을 지는 알 수 없었기에 빨리 가봐야 했다.
‘그리고 아직 못 봤어.’
야만족 부대가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당연히 흑마법사의 짓이었다.
그렇다는 건 방금 전까지 흑마법사가 야만족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
“크롬웰 각하께서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도 확인을 해야 할 게 있어서 같이 가겠습니다.”
“아! 전장을 확인하겠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그 흑마법사의 정체였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흑마법사들이라고 하면 다 똑같은 그게 그거인 녀석들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느 파벌에 속한 녀석들이 야만족의 뒤에서 전쟁을 어지럽히는지 알아내야 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나는 말의 속도를 높이며 동문을 향해 달렸다.
< 202화. 아드리아스의 함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