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계획 >
저녁이 되자 살렘의 호출이 있었다.
노아의 진단이 대충은 끝났나 싶어 나 혼자 그의 골방에 가자 꽤 흥분한 기색의 살렘이 보였다.
“재밌어. 아무래도 죄악이랑 연결된 것 같아.”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연결이 됐었던 거겠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생체실험을 죄악으로 진행한 것 같다. 지금은 집회의 손에 있는 ‘질투’로.”
질투.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죄악.
예상은 했지만 집회가 가지고 있었군.
다시금 깨달은 건데 집회 소속이 된 것치고는 집회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주의를 좀 해야겠네.
“아마 집회에서 회수하기 전에 사용된 모양이야. 솔직히 말하면 운이 좋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저 녀석은 죽었을 거야.”
“치료는 가능합니까?”
“가능할 거라 보고 나한테 부탁한 거 아니냐?”
“그렇죠.”
“일단은 해보겠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어. 대신 나도 결과가 궁금한 만큼 최선을 다 할 거라고는 대답해주지. 조화의 단서를 찾아낼 절호의 기회니까 말이야.”
조화를 익혔음에도 아직 전부 깨우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골방에서 연구하고 있는 거겠지만.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그것도 장담 못해. 길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짧으면 며칠 안에 해답이 나오겠지.”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노아는 휴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나는 살렘과 대화를 마치고 곧바로 아이비에게 갔다.
그녀는 비비안과 함께 방을 쓰고 있었는데 안에는 루나가 함께 있었다.
“이거!”
“이거?”
의외로 비비안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언제 둘이 저렇게 친해진 거지?
아이비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던 건지 내가 오자 곧바로 노아에 대해 물었다.
“뭐래?”
“일단은 확답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치료 여부도 불분명하고 기간도 알 수 없어요.”
“쯧. 돌팔이 아니야?”
“그건 아닙니다. 아마 이 분야에 관해서는 대륙 제일의 전문가일 거예요.”
본인의 몸으로 생체실험을 하고 대륙 10인이 된 양반인데 전문가는 확실하지.
“하아, 그래?”
“아마 노아는 휴학을 해야 할 겁니다. 기간도 정확히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 어차피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니까. 애초에 같이 살았던 것도 아니고.”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에게서 탈출한 이후로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왜 그렇게도 끔찍이 여기는 동생과 따로 사는지 모르겠다.
“만약 노아가 치료된다면,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게.”
“예. 꼭 그러세요.”
사양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비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웃음이군.
“친구! 같이 하자!”
“예. 같이 하죠.”
아이비마저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면 큰 이득이긴 했다.
거기다 노아까지 딸려오면 금상첨화.
부디 살렘이 치료하길 빌어보는 수밖에.
**
통곡의 협곡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금세 제국 전역을 뒤덮었다.
단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제국민들로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는 그동안 덜 떨어진다고 무시해왔던 북부의 야만족들.
북부의 영지들은 전시 상황으로 돌변하고 그 여파는 전국적으로 퍼져 각종 물자와 식량들이 동결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상단과 가문들이 막심한 손해를 보는 가운데 서쪽의 모하임 가문은 오히려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르기옌에서 2차 파견을 급히 원하고 있습니다.”
“2배로 불러. 그래도 받아들이면 파견해라.”
모하임 가문의 집무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연락과 서류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서는 미누스가 결재 서류들에 도장을 찍으며 집사에게 대답하는 중이었다.
밀린 일이 많았지만 이것들이 모두 돈이라고 생각되자 기분이 좋은 미누스였다.
“다음은 몽테뉴에서 1500명분의 장구류를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보냈습니다. 가격은 적힌 바와 같습니다.”
“흐음. 10%만 올려봐.”
“알겠습니다. 바로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그것만 확인하고 조금 휴식을 갖지.”
요 며칠 잠도 자지 못한 미누스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의 수하들도 자신들의 주인을 따라 잠을 자지 못했기에 모두 피곤한 안색이었다.
그래도 표정만은 모두가 밝은 게, 이 모든 일들이 다 자신들의 지갑을 두둑이 만들어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게 좋냐?”
“아이고!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너무 좋습니다!”
누군가가 외치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미누스도 피식하고 웃으며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바짝 당겨보자고. 좀만 고생해라.”
“알겠습니다!”
서부의 모하임에는 이번 전쟁의 여파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미리 대비를 해두었던 탓도 있지만, 그들은 타고나기를 용병으로 타고난 자들.
오히려 이러한 전쟁의 기운은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내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전하의 혜안은 놀랍군요. 처음에는 이 많은 물자를 준비하라고 하셨을 때는 뭘 잘못 드신 게 아닌가 했습니다. 자칫하면 파산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누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대너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부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을 지니고 생긴 것도 우락부락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는 종이 냄새를 하루 종일 맡고 있는 그였다.
“나한테도 지낭(智囊)이란 게 생겼거든.”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과 거래를 하셨다고 하셨죠?”
최근 들어 모하임 공작가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공작의 여동생인 그레타의 부군이 될 수도 있었기에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뭔데.”
“크롬웰 백작은 일이 이렇게 될 걸 미리 짐작하고 있었을까요?”
대너드의 물음에 집무실에 있던 수하들은 각기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 누가 생각하더라도 야만족들이 제국의 악명 높은 요새를 함락시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기에 그저 운이 좋았다고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미누스만은 예외였다.
이미 그는 이번 전쟁을 제외하더라도 아드리아스의 조언으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았던 상태였다.
그것은 뮤리엘에서의 회담을 통해 이어진 계획이었고, 현재도 진행형이었다.
최종목표는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및 왕가의 구축.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저 목표를 크게 잡고 달려 나가는 느낌일 뿐, 실현 가능성은 낮았다.
“크롬웰 백작이 전부 짐작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녀석이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야.”
분명 아드리아스는 이 이후에 훨씬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친다고 했었다.
그리고 잘만 이용하면 이 또한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던 걸 떠올렸다.
“우리는 그저 시류를 잘 읽고 파도를 잘 타면 되는 거야.”
“저희는 뭐, 전하께서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할 말이 있다.”
미누스는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을 천천히 입 밖으로 꺼냈다.
“크롬웰 가문은 분명 우리의 우군이다. 하지만 그 세력은 미비하기 짝이 없지.”
“동료라고 불리기는 애매하죠. 사실상 아드리아스 크롬웰 하나만 있는 가문이니.”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힘을 좀 실어주려고.”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이건 아직 추측이다. 아마 야만족들은 생각보다 더 성가실 거야. 그렇게 되면 결국 황제도 모병이 아닌 징집을 선언할 테고 제국의 총력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영주들이 나서겠습니까? 이긴다고 해도 상처뿐인 전쟁인데.”
“끝까지 들어봐라. 황제도 바보가 아닌 이상 미끼를 내걸겠지. 그것도 꽤나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말이야.”
“먹음직스러운 미끼라······. 혹시 황제 직할령이라도 떼어주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지. 그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이번 전쟁은 크롬웰의 이름으로 좀 나서볼까 해.”
미누스의 발언에 모두가 잘못 들었나 싶어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대너드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니, 그러면 저희 공을 모두 크롬웰에 주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솔직히 말하마. 이미 아드리아스와 이야기는 끝나 있다. 그를 빌미로 이번 정보를 얻고 물자를 비축한 거기도 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전쟁에서의 공을 모두 준다는 건······.”
“대너드. 요즘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달라진 걸 못 느끼냐?”
미누스의 물음에 대너드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끼고 있습니다. 견제를 당하는 기분이 들지요.”
“그래. 이번 전쟁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꽤 시샘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이번 일로 그런 눈초리는 더욱 심해지겠지. 그런데 생각해봐. 안 그래도 모난 돌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전공까지 쏙 빼먹는다? 아마 당장에는 달콤한 과실을 취할 수 있겠지만 모두가 적이 될 거야. 황궁은 물론이고 같은 서부 지역의 세력들까지 전부!”
“그렇다면 크롬웰을 도와준다는 건······.”
“이중장부를 만드는 거지. 아, 조금은 개념이 다른가? 정확히 말하자면 유령상단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크롬웰을 모하임의 제 2의 세력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지.”
미누스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크롬웰을 나중에 우리가 흡수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되면 결국 크롬웰이 크는 게 모하임이 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잖아? 지금 당장은 이목을 피해야하니까 보상을 크롬웰 쪽으로 돌려받자는 거지.”
“아드리아스가 그런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할까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레타와의 혼약도 그래서 거절한 걸 거고. 알면서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거래에는 응한 거겠지.”
“흐음. 역시 전 치고 박고 싸우는 게 더 좋습니다. 정치는 머리가 아프군요.”
대너드가 인상을 구기며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대너드를 향해 미소를 지은 미누스가 깍지를 끼고 책상에 턱을 괬다.
“원래 이 바닥이 이런 거야.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면서 상대를 잡아먹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군림하거나. 그 반대로는 잡아먹히거나 군림당하는 거겠지.”
함께 있던 이들은 미누스의 말에 자연스럽게 모하임의 역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약재를 채집하고 포션을 제조하던 마법사 가문이었던 모하임 가문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성장했는지를.
그것은 상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온갖 일에 손을 벌리고 발버둥친 핏빛 역사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일을 당당하게 생각했다.
잡아먹지 못하면 잡아먹히리!
“어찌됐든 우리와 달리 크롬웰이 성장하는 건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거야. 어차피 영지 하나 없는 비루한 가문인 만큼 큰 보상이 주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걸 노린 거군요.”
“그래. 너도 방금 내가 물어봤을 때 어차피 크롬웰은 아드리아스 하나만 있는 가문이라고 했잖아? 다들 똑같은 생각일 거야. 그러니 전공을 세워서 영지 하나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대너드는 묘한 소름이 일었다.
마치 모든 게 딱 짜 맞춰진 퍼즐을 보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완벽한 방법.
어쩌면 모하임이 아드리아스의 손에 놀아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생겼다.
‘어차피 아무 세력도 없는 크롬웰이라 조금은 놀아나줘도 상관없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혹시 이런 방심도 다 예상하고 계획을 세운 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지금까지 있던 걸 나열하고 보면 결국 물자를 준비하고 판매하는 수완은 모하임의 힘이었다.
물자를 준비할 수 있는 자금부터 인맥까지 모든 게 모하임 가문이 지닌 힘.
물론 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아드리아스의 덕분인 듯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크롬웰 가문은 전공까지 공짜로 채갈 수 있게 된 흐름.
그리고 그런 흐름을 아무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
“만약 노린 거라면 괴물 같군요.”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하자고. 하하!”
미누스는 그저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대너드는 웃지 못했다.
만약 미누스의 원래 계획대로 크롬웰을 이렇게 키워놓고 흡수하지 못한다면 남 좋은 일만 본인들의 피를 흘려서 시켜준 꼴이었다.
그리고 왠지 아드리아스라면 상황을 그렇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정치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는 대너드였지만 그 예민한 감각을 숨길 수 없었다.
미누스의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그는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들었다.
< 197화. 계획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