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자매의 과거 그리고 전쟁의 서막 >
아이비를 따라간 곳은 그녀의 조교실이었다.
개인 단령장과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함께 있는 공간으로 교수의 집무실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적당히 앉아.”
아이비는 아무 자리나 가리키며 선반을 뒤적거렸다.
“노아는 저대로 놔두고 와도 됐던 겁니까?”
“어. 어차피 내가 신경 썼으면 더 싫어했을 거야.”
“친자매입니까?”
“그래.”
그녀는 이내 맹물을 내오며 내 앞에 올려뒀다.
맹물을 내줄 거면서 왜 선반을 뒤진 거지.
“왜 따로 살고 있죠?”
“알면 다쳐.”
즉답이네.
그런데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나.
흑마법과 연관된 무언가에 걸린 동생을 타지에 두고 혼자 이곳에서 조교수를 하고 있다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아드리아스. 눈치 챘냐?”
“예.”
노아에 대해 묻는 거겠지.
솔직하게 말했다.
굳이 빙빙 돌리기도 싫고.
“자세히 이야기는 못해. 그닥 좋은 기억도 아니라.”
“아픈 겁니까?”
“그걸 아프다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부작용이 심하다고 해야 하지.”
“부작용······.”
저주는 아닌 듯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래도 평범한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녀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아이비는 손을 저었다.
“뭘 그렇게 꼬라봐. 부담스러워.”
“절 굳이 따로 불렀다는 건 얘기해주려고 부른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막상 불러놓으니까 망설여지네.”
그녀는 맹물을 원샷하며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랑 노아는 부모로부터 흑마법사에게 팔렸었다. 그리고 노아는 생체실험을 당했었지.”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과거를 듣게 됐다.
게임에서는 그렇게 노력해도 못 들었던 과거인데.
아무래도 노아가 트리거였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는지 몰랐군요.”
“뭐가 죄송해. 내가 들어달라고 부른 건데. 아무튼 어찌어찌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때의 트라우마가 아직 좀 남아있지. 노아는 생체실험으로 몸이 좀 이상해졌고.”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생각보다 끔찍했을 경험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흑마법사를 향한 증오심이 그리 넘치는 거겠지.
“생명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닌데 뭐라고 할까. 솔직히 나도 그렇고 노아 본인도 지 몸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이야. 가끔 본인이 가진 능력 이상의 힘이 발휘될 때가 있는데 그러고 나면 한동안 부작용으로 앓아 누웠었지.”
“생체실험으로 그런 거였군요.”
“추측이야. 나도 잘 몰라.”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이내 진지하게 날 바라봤다.
“내가 굳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이유는 괜히 네가 다른 곳에 말하지 않았으면 해서야. 이미 이상한 걸 눈치 챘잖아? 나는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달갑지가 않거든.”
“저도 일단 마법사입니다만.”
“마법이나 쓰면서 말해. 맨날 검이나 휘두르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없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노아의 몸은 마법사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느낌이었다.
흑마법사가 생체실험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니 이보다 흥미를 가질만한 연구 재료도 없겠지.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네 목숨도 없는 거다.”
“그럴 일 없습니다. 그것보다 아이비.”
“조교님이라고 불러.”
“아이비 조교님. 제가 한 번 노아를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이 새끼 방금 내가 한 말 허투루 들었냐? 허락하겠어?”
“진지하게 하는 말입니다만 방금 제가 대련을 멈춘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내 말에 잠시 인상을 찡그린 아이비가 물었다.
“뭔데?”
“노아의 그 기운. 조금 전에 조교님께서는 생명의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엄연히 위험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기운을 계속해서 사용하다가는 아마······.”
“너, 구라 까는 거냐, 아니면 진짜냐?”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마법사니까 거짓말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이비의 눈가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 양반은 툭하면 손부터 쓰려고 한다니까.
“싫으면 됐습니다. 저도 도의상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니까 살리려한 거지 굳이 가족분이 싫다고 하면 제가 손 쓸 의무는 없으니까요.”
“······정말이냐? 정말로 노아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거냐?”
“그럼 조교님께서는 저 힘이 정상적인 걸로 봤습니까? 비정상적인 힘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조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아이비는 입술을 깨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노아가 결정하는 일이지.”
“그 결정이 죽음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뚜렷하게 눈에 보이질 않으니 실감이 나지 않아. 일단 내가 노아한테 물어보고 대답을 해도 될까?”
“예. 만약 그녀가 좋다고 하면 저보다는 바하트 마탑주님께 부탁하는 것도 좋을 법합니다. 뭐, 그 양반을 믿을지는 둘째 치고요.”
“그래.”
한숨을 내쉰 아이비가 손을 까딱거렸다.
“생각 좀 하게 나가줄래?”
“예. 이만 가보겠습니다.”
쿵.
조교실을 나오자 어느새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애들한테는 오면서 미리 연락을 해뒀지만 괜히 미안해지네.
‘노아 클레어. 나랑 마주치지 못했으면 그대로 죽었으려나.’
게임에서 아이비를 계속 공략하지 못했던 이유도 어쩌면 노아가 이미 죽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살아있고 육체에 깃든 원인까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상황.
이왕이면 아이비를 위해서라도 낫게 해주고 싶었다.
최연소 오러 마스터가 되는 아이비라면 꽤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었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아이비가 허락을 내릴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직접 발 벗고 나서는 수밖에.
**
느릿하게 지나가는 호화로운 마차가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땅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제국 북부 한델스텐 지역의 모병관인 바길 자작이 갑자기 전해진 소식에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지금도 대놓고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황궁에는 이 소식을 전했는가?”
-네! 파스토 남작이 직접 보고를 올리고 있습니다!
“일단 알겠네. 황궁의 다음 지침까지 두고 봐야겠지만 모병을 서두르지.”
-감사합니다!
연락을 끊은 바길 자작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루먹은 녀석들이 단단히 미쳤구나.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급하게 날아온 소식은 북부의 요새인 통곡의 협곡 바로 앞으로 진지를 구축하며 집결중이라는 야만인들의 소식이었다.
바길 자작은 황제의 명에 따라 북부에 위치한 영지들을 돌아다니며 모병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모병이지 사실상 접대를 받고 뇌물을 챙기며 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마음속의 야만인들은 그저 무식하기만 한 잡졸들이라 이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접대를 받을 시간이 부족해진다는 것에서 나온 짜증만이 가득했다.
“잭슨! 밖에 있나!”
“부르셨습니까, 주군.”
“지금 통곡의 협곡 앞으로 야만인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군.”
“야만인들이 진지를 말씀이십니까? 별일이 다 있군요.”
“우리가 먼저 공격하려는 것을 눈치 챈 것인가? 희한한 일이긴 하지. 그보다는 더 이상 노닥거릴 틈이 없어졌다. 이제 진짜로 일을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지나쳐 온 영지들에 전언을 넣어놓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잭슨이 사라지자 술병을 딴 자작은 병째로 입에 들이 부으며 투덜댔다.
“모처럼 얻은 직책인데 뽕도 뽑지 못하는군. 아직 수금할 곳이 남았는데 이래서야, 원.”
으아아!
쿵쿵쿵!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마침 마차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고 자작이 창문을 열자 다급한 표정의 수하가 나타났다.
“가, 각하!”
“갑자기 무슨 소란이지?”
“바, 바로 앞에 야만족들이!”
“무슨 헛소리야, 여긴 한델스텐이라고! 또 어떤 거지 부랑자들을 만나서 호들갑을 떠는 게야!”
“그, 그게 아니라 진짜······.”
퍼억!
보고를 하던 수하의 머리가 갑자기 터져 나갔다.
뇌수와 피가 바길 자작의 안면에 묻고 이내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한델스텐은 분명 야만족들이 사는 북부에 접경한 지역이었지만 험준한 북부 산맥이 존재하고 있어 절대 넘어 올 수 없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내륙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통곡의 협곡을 지나쳐야 한다고 알고 있던 바길 자작의 상식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의 현장에 처참히 부서졌다.
“화려한 마차군.”
그리 많지도 않았던 호위와 병사들이었던 만큼 전투는 금방 끝났다.
유독 덩치가 크고 문신이 많은 사내가 이내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귀족인가?”
“이, 이 몸은 대 로들렌 제국의 휴스턴 바길 자작이다! 네놈들이 감히 이 몸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귀족이 맞군.”
씨익 미소 지은 거구의 사내는 이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내려찍었다.
퍼억!
“끄아아아악!”
손목이 잘린 바길 자작이 비명을 지르자 사내는 조용히 한 마디를 더했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나머지 한쪽도 자르겠다. 얌전히만 있으면 죽이지는 않으마.”
“끄윽.”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바길 자작은 두려운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소개가 늦었군. 대 만카라 부족의 족장이자 이번 침공군의 특공대장을 맡은 수이투다. 잘 부탁하지.”
수이투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내 바길 자작을 기절시켰다.
**
주말이 끝나고 드디어 토너먼트 본선이 열리는 날이 왔다.
내 다음 상대는 같은 마법학부 졸업반 학생이었다.
마법학부 학생이 본선에 올라왔다는 것만으로 꽤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진 의미인지라 엑스트라 캐릭터여도 꽤 감탄을 했다.
“첫 번째 시합인가. 좋네.”
제일 먼저 끝내고 볼일을 보러 갈 수 있겠구만.
도착한 경기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귀빈석은 꽤 비어있는 것이 보였다.
‘전쟁 때문인가.’
지금쯤 진행이 되고 있겠군.
아마 제국 측은 방심하고 있는 상황이겠지.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곧 제 59회 춘계 토너먼트 본선 32강이 진행되겠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경기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관중석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내 얼굴이 찌릿할 정도였다.
“아드리아스다!”
“아드리아스 선배!”
평소에는 멀찍이서 수군대며 말도 못 거는 녀석들이 분위기를 아주 제대로 탔다.
나는 그저 차분히 반대쪽을 바라보며 미리 기선제압을 시도했다.
미안하지만 빨리 끝내고 퇴장항 생각이라.
내 예상대로 상대는 내가 지그시 쳐다보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게 바로 명성이 지닌 힘.
“······이번에는 청코너! 드디어 제대로 된 시합을 보여줄 것인가? 무려 5연속 기권승으로 본선에 진출한 로들렌의 괴물! 아드리아스 크롬웰!”
근데 저 괴물이라는 이명은 언제 붙은 거지.
많고 많은 멋진 별명 중에 하필이면 괴물이라니, 거 참 마음에 들지 않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고 나와 상대는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관중석에서도 어느새 소란을 멈추고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홍, 준비되셨습니까?”
“넵!”
“청, 준비되셨습니까?”
“예.”
“그럼······경기 시작!”
나는 검을 뽑는 척하다가 곧바로 라이트 마법을 전개했다.
미리 내 눈을 보호하고 최대 출력으로······.
탁!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빛이 폭발했다.
관중석은 안티 매직 배리어가 펼쳐져있기에 영향이 없었지만 상대는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는지 순식간에 당황했다.
“어억!”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일단 공격 마법을 전개하는 상대에게 순식간에 다가갔다.
“미안하다.”
그리고 중급 마법인 쇼크웨이브를 손에 담아 그대로 상대를 가격했다.
지지지직!
그걸로 끝.
상대는 기절하며 쓰러졌다.
“뭐, 뭐야?”
“끝?”
너무나 압도적으로 끝난 경기에 관중석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나왔다.
심판도 뒤늦게 휘슬을 울리며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홍코너, 아드리아스 크롬웰 승!”
“이게 뭐야! 검도 안 뽑았잖아?”
“너무 금방 끝났어!”
“마법이라고?”
“이게 검과 마법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로들렌의 괴물인가.”
불만 어린 목소리와 환호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 189화. 자매의 과거 그리고 전쟁의 서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