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조우 >
마력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언데드 리저드맨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마력이 술사에게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이 언데드들은 명령만 내려놓은 채 술사 본인은 무덤에 있는 것 같은데······.
‘하룬겔의 무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마침 메르쿠르나 막시민도 그쪽에 있을 테니 직접 가보기로 했다.
“이겼다!”
“맛없는 놈들을 이겼어! 식사 시간이다!”
터져 나온 마력과 별개로 순수하게 기뻐하는 환인족들 중 괴물의 봉인이 어쩌고 했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맛있는 인간! 고맙다! 덕분에 식사 시간이다!”
“방금 괴물의 봉인이 풀렸다고 했지? 그게 무슨 소리지?”
“아! 괴물!”
그새 잊은 거냐.
대뜸 소리친 환인족은 뽈뽈거리며 주변을 향해 외쳤다.
“무덤이 위험하다! 메르쿠르가 위험하다!”
“메르쿠르가 위험하다?!”
리저드맨의 뼈를 전리품처럼 수거하던 환인족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뽈뽈거리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맛있는 인간! 너도 따라와라!”
안 그래도 따라갈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미르를 보았다.
“아이미르 씨는 복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소식을 라스틸리아에 알릴게요.”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핀에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는 떠나기 전에 말했다.
“조심하세요. 만약 정말로 하룬겔의 봉인이 풀린 것이면 세계수의 위협과 동급의 위기입니다.”
“예.”
역시 엘프들도 하룬겔의 존재를 알고 있었구나.
대수림의 자경단을 자처하는 이들이 모르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이내 아이미르가 날아오르고 나는 곧바로 환인족들을 따라 달렸다.
환인족들의 짜리몽땅한 몸 덕분에 달리는 속도가 느려 답답했지만 이미 무덤에 가있을 이들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걱정은 없었다.
아무리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불변의 하룬겔이라지만 전성기 때의 힘을 낼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만약 낼 수 있다 해도 막시민이 이기지 않을까 싶었다.
“저기다! 저기로 쭉 가면 된다!”
내 옆을 나란히 달리던 환인이 말했다.
생각보다 거리가 꽤 되었는데 처음의 마력 파장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없어서 조금 의아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자연적인 동굴로 보이는 장소였다.
‘용아병······.’
그리고 그 입구 근처에는 용아병의 잔해가 있었다.
게임 속에서도 보기 드문 언데드였기에 잠시 자리를 잡고 잔해를 살폈다.
흔적을 보니 거대한 철퇴 같은 무기에 당한 느낌이었는데 메르쿠르나 막시민은 검을 다루기에 네크로맨서의 소행인 듯싶었다.
‘누군가가 먼저 들어가고 3명이 뒤따라 들어갔다.’
처음 들어간 건 아마 용아병을 부순 네크로맨서이고 나머지는 메르쿠르와 일행들인 모양이었다.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가 봐야지.
혹시 모를 콩고물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맛있는 인간! 우리는 여기까지다!”
“뭐?”
“우리는 안에 들어가면 안 된다! 괴물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된다!”
굳이 입구까지 와서는 들어갈 수 없다니.
그럼 왜 같이 온 거야?
물론 같이 들어가면 성가시기만 하니 오히려 혼자 들어가는 게 좋기는 하지.
“알았어. 나는 들어가도 되나?”
“원래는 메르쿠르가 결정해야 하지만 메르쿠르는 안에 있을 거다! 들어가서 물어봐라!”
조금 나사가 빠진 느낌의 대화를 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기서 실랑이를 하고 있을 틈은 없지.
나는 여전히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을 가늠해보며 천천히 발을 들였다.
-띠링!
[던전 ‘하룬겔의 거처’에 입장하셨습니다.]
곧바로 뜨는 메시지와 함께 순식간에 공간이 변형되었다.
‘일단은 막시민이나 다른 일행들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네크로맨서를 찾는 게 좋겠지? 네크로맨서가 누군지도 궁금하네.’
이미 한 번 겪어보았기에 나름 적응이 된 던전의 입장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있자 주변이 연구실과 같은 풍경으로 변했다.
생각보다 세련된 풍경에 이게 몇 백 년 전에 존재했던 인물이 만든 던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근데······.”
여기가 입구가 맞나?
왠지 입구가 아니라 곧바로 깊숙이 소환된 느낌인데.
무엇보다도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 바로 앞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우선은 일행들부터 찾을 생각이었던 내게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리 오너라.
그리고 미처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웅혼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리로 오너라.
“사탕 줄 테니까 따라오라는 아저씨도 아니고 그런다고 내가 가겠냐?”
-······이리 오거라.
고집이 센 양반이군.
아무래도 강한 마력과는 별개로 하룬겔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본인이 안 오고 나보고 와달라고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애초에 몇 백 년 전의 인물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일단은 대화를 해볼까.
“하룬겔이냐?”
-그렇다. 이 몸은 하룬겔 데 바스타지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후계를 찾고 있다. 내 뒤를 이을 흑마법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후계자?”
후계자를 찾으려고 이런 대수림에 던전을 만들었다고?
애초에 그는 에드먼드 대제에게 배신을 당하고 급하게 도망친 걸로 알고 있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지만 수많은 게임 플레이로 알아낸 숨겨진 비사 중 하나.
그래도 정확한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기에 묵묵히 있자 하룬겔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대의 기운을 보니 나와 같은 네크로맨서. 나에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 힘을 계승하게 해주마.
“여기에 나 말고도 다른 네크로맨서가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아는 사이인가? 네 말이 맞다. 지금 그도 내 곁에 있지.
“걔한테 힘을 주면 되잖아?”
-수백 년을 이곳에서 지내며 흑마법사가 방문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인 것도 모자라 두 명이나 올 줄은 짐작도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둘 중에 누가 더 내 후계에 어울리는지 시험하고자 한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가 있어보였다.
그리고 먼저 방문한 네크로맨서도 바보가 아니라면 무턱대고 미끼를 물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내게로 오라.
끈적한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강력한 마력의 유혹은 잔챙이 같은 흑마법사들에게는 확실히 더할 나위 없는 미끼였다.
그러나 내게는 딱히 유혹이 될 이유가 없었기에 무시한 채 연구실과 같은 던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생긴 건 연구실과 같았지만 정작 중요한 연구 도구들이나 재료들은 전혀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연구 성과들과 재료, 정보, 그리고 내 마력과 기술, 오리지널 마법······심지어 언데드까지.
불변의 하룬겔의 오리지널 마법이라······.
궁금하기는 했다.
네크로맨서와 같이 한 카테고리에 묶인 이상 오리지널 마법은 전부 거기서 거기였다.
분명 마력의 발산이나 배열, 술식은 달랐지만 구성이나 발상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모순’이라는 같은 기원으로, 그 중에서도 불사라는 모순을 다 같이 좇는 이상 오리지널 마법이 비슷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단순히 오리지널 마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워록이라 불리며 칭송받는데,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변주를 만들어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룬겔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
그의 행적이나 업적은 대부분 말소되어 그의 오리지널 마법에 대한 묘사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이명이 불변이라는 것과 네크로맨서였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
“오리지널 마법. 당신도 모순을 기원으로 뒀었나?”
-그렇다.
“하긴 그러니까 불변의 하룬겔이겠네. 불변은 모순이니까.”
-무얼 기대한 거지? 애초에 흑마법사가, 네크로맨서가 모순에 기원을 두지 않으면 무엇에 기원을 둔단 말인가?
“그래도 꽤 유명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역시나 였지만.”
-흐음.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만약 네크로맨서가 다른 기원에 적을 두면 대단한 오리지널 마법이라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기원이라는 것이 괜히 ‘기원’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네 마법의 뿌리가 어디서 나왔냐를 따진 것이지. 민들레의 씨앗을 심었는데 장미가 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마법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에 굳이 만들자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 만들 수는 있겠지만 반쪽짜리 마법이 될 거다.
그래도 나름 대성했던 마법사답게 그럴 듯한 말을 한다.
처음에는 조금 모자란 인상이었는데 괜히 유명한 마법사는 아니었군.
“일단 들어나 보자. 네 오리지널 마법이 뭔데?”
-그건 네가 내 진전을 이은 뒤에 스스로 터득해라. 너는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인가? 무려 이 몸, 불변의 하룬겔이 남긴 마법과 성과들이다. 어째서 그리 초연할 수 있지?
“대가 없는 보상은 없어. 네가 뭘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
-말했지만 이미 내 곁에는 너보다 앞서 들어온 자가 기다리고 있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 진전은 자연스럽게 이 자가 잇게 되어 있어. 나도 둘 중에 선택을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지 크게 아깝지는 않아.
먼저 들어왔다는 네크로맨서가 누군지는 몰라도 홀라당 모양이군.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나? 급하게 하룬겔에게 가야할 만한 이유라던가······.
그래도 무려 하룬겔이다.
불변이라 불리며 나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집회 10인의 창시자 중 하나.
그런 인물이 그저 후계를 구한다고 자신의 모든 걸 순순히 내놓을까?
‘마법사놈들은 믿을 것들이 못 돼.’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기심의 극치를 달린다.
그것이 향상심의 근원이기도 했으니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지.
애초에 내가 마법사니까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밖에 없다.
-자, 선택해라. 나에게도 시간이 얼마 없다.
“왜 시간이 없어? 몇 백 년을 잘만 기다려놓고.”
-지금 내 던전에 알 수 없는 인물이 세 명이나 더 들어와 있다. 지금은 미로에 가둬놨지만 곧 모든 걸 부수고 나올 것 같군. 그들의 실력을 보니 나도 빨리 후계를 정하고 모든 걸 줘야한다.
그렇게 된 거군.
어디 갔나 했더니 따로 분리해놓은 건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이 내 곁에 있는 자를 선택하겠다.
“마음대로 해라.”
먼저 들어간 네크로맨서가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룬겔을 찾아올 정도의 네크로맨서라면 2, 3명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모른, 모른의 제자 중 하나인 아스란 그리고 유일하게 파벌에 속하지 않은 중립 네크로맨서, 파이시.’
이 셋을 제외하고는 딱히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 중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건 파이시였다.
아무래도 파벌에 속하지 않다 보니 자유롭고 굳이 이런 험지를 올 방구석 네크로맨서는 그녀를 제외하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상관없다. 결국 너도 내 먹이가 될 테니.
“아무리 내가 거절했다지만 너무 바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거 아니야?”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 대신 이전까지 느껴지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한 순간에 흡수한 듯 마력은 던전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건 전조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흐흐흐.”
기묘한 웃음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모른의 것도, 그렇다고 여자인 파이시의 것도 아니었다.
‘아스란인가? 아니면 내가 짐작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겠군.’
후웅-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고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독 크게 들리는 걸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인물은······.
“너도 여기 들어왔던 거냐! 아드리아스 크롬웰!”
“아스란 블루.”
“정말 나는 운이 좋군. 하룬겔의 힘을 얻고 너를 만나게 되다니!”
아스란의 주변에서 검은 아공간들이 입을 열었다.
“죽어라, 아드리아스 크롬웰!”
< 181화. 조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