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vs 후겐
둘러싼 엘프들은 무장을 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로 후겐과 호이르가 보였다.
“잠깐만! 저건!”
“세이르 님의 시신이다!”
내가 어깨에 메고 있던 세이르를 본 모양인지 흥분한 엘프들이 활을 겨누었다.
“다들 미쳤어? 지금 세계수에 활을 쏠 생각이야?”
“모두 진정해! 인간이 내려온다.”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하는 사이 세계수의 줄기가 천천히 날 바닥에 내려놓았다.
폭식의 새끼들을 처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지만 그사이에 이렇게나 몰려올 줄은 예상도 못 했네.
“세계수가 데려다주다니……. 아무래도 그대가 옳았던 것 같군.”
호이르가 내게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이미 후겐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가.
“세이르의 시신을 양도해 줄 수 있겠는가.”
“그 전에 잠시 확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확인?”
“이 자가 배신자라는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내 말에 안 그래도 흥분한 기색이었던 엘프들이 분개를 터트렸다.
“감히 인간 주제에!”
“세이르 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 욕되게 하려는 것이냐!”
호이르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안색을 굳혔다.
“내가 확인해 보아도 되겠느냐? 물론 그대도 지켜볼 수 있게 조치를 취하마.”
“지금 당장 확인하신다고 약속하면 건네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저도 곤란하군요.”
나로서도 양보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엘프들의 은인.
저런 행동과 반응들이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우선은 모두가 보는 가운데에서 내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다.
‘증거가 없으면…… 뭐, 그래도 상관없지.’
내 제안에 호이르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고인을 욕보인다고 생각해서일까.
세이르가 진심으로 라스틸리아를 멸망시키려 했다는 걸 알았어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까.
“너무 건방지군.”
그때 가만히 있던 후겐이 나섰다.
“세계수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네가 엘프를 죽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엘프가 배신자여도 말입니까?”
“그렇다.”
“그래서 어쩌자고.”
결국 나도 말이 곱게 나가지는 못했다.
저 후겐 새끼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건방진 인간 놈.”
“인신공격하지 말고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꼬투리를 잡는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설마하니 너도 사실은 씬 소속 배신자냐?”
“네 이놈!”
“세계수를 죽이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실패해서 화가 나냐? 막말로 난 지금 라스틸리아를 구한 은인이야. 너희들 지금 실감을 못 하는 모양인데, 내가 신탁을 받고 여기 오지 않았으면 몇 년 내로 세계수가 죽고 라스틸리아도 멸망했을 거라고.”
일부러 세계수가 타락했을 거라는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 자세한 정보를 풀면 오히려 의심을 사기 마련.
그렇다고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라스틸리아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
“그 증거로 세계수가 날 직접 데려다줬다. 그리고…….”
나는 비장의 수단으로 품속에 넣어 두었던 무언가를 꺼냈다.
“저게 뭐지?”
“열매? 열매에서 빛이 나다니…….”
나는 세계수의 열매를 들어 보였다.
주먹보다 작은 열매는 세계수의 크기에 비하면 좁쌀만 했지만 영험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서, 설마 자네 그건……!”
호이르는 이게 뭔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세계수의 열매다.”
“뭣!”
“그럴 수가…….”
“거, 거짓말 하지 마라! 인간 따위가 어떻게 세계수의 열매를 얻었다는 거냐!”
열렬한 호응이구먼.
나는 거기에 더불어 세계수가 건넨 잎사귀도 꺼냈다.
나뭇가지는 거추장스러워서 니켈의 가방에 넣어 놨지만 이 두 개는 혹시 몰라 품에 넣어 두었다.
“세계수가 나를 은인으로 인정하고 건넨 선물이다. 이래도 실감이 안 나? 내가 너희들 구세주란 소리야, 이 배은망덕한 새끼들아.”
주변이 얼었다.
모두들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내 손에 들린 세계수의 잎사귀와 열매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설핏 살기가 느껴졌다.
캉!
순식간에 들이닥친 후겐의 검을 막아 냈다.
“어쭈. 배신자가 맞는 모양이네? 정체를 드러내기로 한 건가?”
“그 물건들은 인간의 손에 있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조용히 돌려준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지랄하지 마세요, 대머리야.”
솔직히 이쯤 되니까 나도 헷갈리네.
정말 후겐도 씬(sin) 소속인가?
굳이 이렇게까지 나온다고?
게임 속에서는 동료까지는 아니었어도 아군이었을 텐데.
그냥 엘프의 아집인가.
“후겐! 멈추거라!”
호이르가 차마 끼어들지는 못하고 외쳤다.
하지만 후겐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죄는 일이 끝난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물건들이 인간의 손에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웃기지 마. 세계수가 나한테 건넨 건데 네가 뭐라고 그딴 판단이야.”
“네가 정말로 우리의 구세주라면 기쁜 마음으로 그것들을 우리에게 양도하겠지.”
“이제 보니까 걍 미친 빡빡이였네.”
나는 일부러 도발을 하면서도 기회를 엿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라면 후겐, 이 새끼는 한 대 후려쳐 줘야 속이 풀리겠다.
언데드 소환은 단 한 번의 기회.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 제대로 사용해야 했다.
한번 들킨 순간 이후로는 더 이상 숨겨 둔 패가 아니게 되니까.
그를 위해서는 일단 검으로만 상대를 해야 했다.
‘궁금하기도 하네.’
과연 지금의 나는 후겐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후겐이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곧바로 오러 비기를 사용했다.
전신을 감싸는 나뭇잎의 갑옷과 함께 그의 쌍검이 화려하게 변했다.
“후우.”
집중.
검술 천재 재능은 단순히 검을 잘 휘두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의 변화부터 정신적인 부분까지 모든 게 천재적으로 변하는 사기적인 능력.
내 모든 오감이 오로지 상대의 검에 집중되었다.
후웅.
콰가가가각―――!
살인적인 속도로 다가온 후겐이 이어서 엄청난 빠르기로 쌍검을 휘둘렀다.
그의 오러 비기는 기본 스펙 자체를 초월시켜 주는 버프형 비기.
차마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카각!
챙!
내 재능은 그조차도 뛰어넘었다.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
단순히 검술 재능뿐만이 아니었다.
영재급 운동과 전투 재능이 보조해 주자 힘겹지만 간신히 후겐의 움직임을 쫓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내게는 초월자의 검법이 있지.
‘결을 따라서!’
검술 재능이 몸을 자연스레 이끌었다.
그와 함께 검 끝에서 오러가 폭발하듯 휘둘러지자…….
콰아아아아악――――!
상대의 결을 따라 찢어발겼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결을 베어 낼 수 있는 검법.
파직!
“흐음.”
후겐을 감싼 나뭇잎 중 어깨 부분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멈칫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너도 대전사였던 거냐.”
후겐이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내 모든 신경은 전투에 집중된 상태.
게다가 한번 시작된 이 검법은 멈추기가 힘들었다.
검법에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내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촤르륵!
카가가가강!
처음에는 제대로 먹혔지만 한 번 통했던 공격이 먹히지는 않았다.
후겐은 침착하게 내 모든 공격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아직 익지 않았군.”
콰앙!
빈틈을 통해 후겐의 발차기가 내 복부에 꽂혔다.
“커헉.”
폐가 쪼그라드는 고통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산소가 부족했다.
“강하군. 인간치고는 열심히 했다.”
멀리 날아간 내게 어느새 다가온 후겐이 중얼거리며 쌍검을 휘둘렀다.
서걱!
푸슉!
감당하기 힘든 속도로 내 살이 포가 떠졌다.
하지만 후겐이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이 정도 고통은…….’
고통 축에도 속하지 못한다.
페널티로 인해 이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2년이나 검을 휘둘러 온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
모든 건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
쩌어억.
후겐의 옆으로 아공간이 열렸다.
그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용의 주둥아리가 튀어나온 상태.
“흐흐.”
조금은 악당과 같은 웃음을 흘렸다.
쏴라, 크리브마허.
콰아아아아아아아――――――――!
미리 준비해 놓았던 브레스가 농밀한 마나를 터트리며 터져 나갔다.
지근거리에 있던 내게까지 피해가 끼쳤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날 건드렸으면 무사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야지.’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다.
콰아아앙!
푸쉬이이익.
크리브마허의 브레스가 튀며 내 몸에도 산성액이 닿았다.
살이 녹아 들어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일단은 일어났다.
“방금 그건 도대체?”
“후겐 장로님!”
엘프들의 외침이 이명이 들리는 귓속으로 틀어박혔다.
상대는 어떻게 됐지?
“크흠.”
후겐이 저 멀리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게 보였다.
안 죽은 건가. 하긴 저 새끼 오러 비기는 몸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
하지만 꼴이 꽤 볼 만했다.
나뭇잎 모양의 오러로 이루어진 갑옷은 어느새 다 사라진 상태였고 쌍검도 하나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근데 이거…… 내가 진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조금 전의 동귀어진은 내게도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나는 졌지만 나한테는 언데드들이 있다.’
크리브마허는 브레스를 쏜 탓에 제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겠지만 나머지로도 충분할 거다.
호이르가 지켜본다는 전제하에.
‘그럴 리 없겠지.’
이제 슬슬 호이르도 나서겠지.
이 정도로 치고받고 싸웠으니.
“씨발.”
근데 뭔가 억울하네.
이 개 같은 놈들이.
나도 분명 엘프들을 위해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덕분에 살았으면 감사를 해야지 은혜는커녕 원수로 갚고 있으니, 원.
“어떻게 하지?”
“저 인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인간은 우리의 은인이야.”
“하지만 후겐 장로님은?”
“이, 일단 싸움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싸움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고 진행이 되어 사고가 따라가지 못한 엘프들이 우물쭈물했다.
그사이 호이르가 나와 후겐의 사이에 섰다.
“둘 다 그만하게. 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그쪽 대머리가 절 죽이려 한 건데 순순히 목을 내주어야 했다는 말입니까? 진즉에 말리시지 그랬습니까?”
내가 비꼬듯 말하자 호이르가 난감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내 불찰이네. 설마 후겐이 진심으로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어.”
“정말입니까? 사실은 당신도 저를 죽여서 열매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까?”
“타피오께 맹세컨대 그런 생각은 일절도 하지 않았네. 자네가 세계수에게 받은 것은 자네의 것이지. 내가 대신해서 사죄하겠네.”
……조금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은 화해를 받아들일까.
더 이상 싸워도 이득이 없었다.
애초에 목적도 달성했고.
‘후겐 새끼, 꼴좋다.’
어떻게든 한 방 먹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제대로 갈겼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누구 마음대로 끝내려고.”
그때 전혀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인간이다!”
“또 인간?”
“어떻게 온 거야?”
갑자기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막시민 크로넬이었다.
그는 혼자 왔는지 후줄근한 모습으로 검만 등허리에 찬 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넌 누구지?”
호이르가 잔뜩 경계하는 기색으로 검을 뽑았다.
“검 집어넣어라. 죽이기 전에.”
그런 호이르를 향해 막시민이 나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막시민. 여긴 어떻게?”
“네가 너무 늦어서 마중 나왔다.”
무뚝뚝하게 말한 그는 이내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
“꽤 싸우더군.”
“다 본 겁니까?”
“그래.”
아니, 그러면 좀 도와주지, 그걸…….
그래도 막시민이 등장하자 이리도 든든할 수가 없었다.
“사죄를 하고 싶다면 제대로 값을 치러라.”
막시민이 이번에는 조용히 서 있는 후겐을 바라보며 말했다.
“막시민 크로넬…….”
“고집불통 엘프. 넌 여전하군. 어떻게 할 거냐.”
“무엇으로 값을 치르면 되지?”
둘이 아는 사이였군.
호이르는 모르는 눈치였는데 후겐하고는 만난 적이 있는 건가.
“흠. 일단 팔 한쪽을 잘라라.”
……뭐라고?
막시민 씨?
“일단 그 뒤에 협상을 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