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카오스 미믹
디에네의 마법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확인해 보자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는 말 때문인지 제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우우웅―.
카오스 미믹이 있는 바닥에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원래였으면 바로 발현시켰을 마법이 디에네의 지팡이 끝에서 재배열되고, 재창조되었다.
꾸드득.
그러나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상자에 그려진 문양들에서 빛이 나더니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골치 아프네.”
찌푸린 얼굴로 디에네가 마나를 다시 분배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지휘봉처럼 춤을 췄다.
여명의 포효에 담긴 웅혼한 기운이 파동을 만들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 장엄한 풍경에 모두들 입을 벌리고 바라만 보았다.
“토너먼트 때보다 더 세진 거 아니야?”
“아니, 벌써 일 년이나 지났는데 당연히 강해지긴 했겠지. 근데 도대체 저건 말이 안 나오게 하네. 같은 학생 맞아?”
압도적인 마나의 연주.
디에네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마나들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냈다.
그러자 이전처럼 바닥에만 마법진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 카오스 미믹을 둘러싼 허공에 3차원 형태의 거대한 마법진이 수십 개가 얽히고설키며 생성되었다.
“통째로 옮길 생각인가 봐.”
“공간 마법 지린다.”
콰지지직!
다시 한 번 카오스 미믹에서 빛이 나더니 강렬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열려 있는 뚜껑에서 검은 연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하며 거대한 팔이 튀어나왔다.
“저게 괴물?”
디에네가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와중에도 놀란 음성을 냈다.
거대한 팔은 검은 불꽃에 휩싸인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손끝은 예리하게 벼린 칼날과 같이 날카로웠는데 닿으면 그대로 갈려 나갈 듯했다.
“저거야! 저 손이 메킬렌하고 트리자를 상자 안으로 끌고 갔어!”
“그전에 루먼도 데리고 갔지.”
카오스 미믹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들으며 디에네는 더욱 마나를 불어넣었다.
한계에 가까운 마나 운용으로 복부에 난 상처가 벌어졌는지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법을 취소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행동이었기에 그대로 강행했다.
콰드드득!
검은 손이 마법진을 붙잡았다.
그러자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마법진이 일그러지며 마나가 새어 나왔다.
“으음…….”
부서진 부분을 억지로 수선하며 다급히 마법을 발현시키려 했지만 검은 손의 강력한 힘 앞에서 무력하게 마나 배열이 흩어져 갔다.
* * *
역시 디에네도 무리인가.
하긴 카오스 미믹은 나도 뚜렷한 공략 방법을 못 찾은 몬스터니까.
사실 카오스 미믹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게임 속에서 집회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 시나리오 후반부쯤에 히든 피스 개념으로 존재하는 카오스 미믹은 모른의 수제자인 아스란 블루가 소유한 물건이었다.
‘웃긴 건 아스란이나 모른도 카오스 미믹의 정체를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지.’
봉인된 상태로 존재하는 카오스 미믹은 봉인이 풀리지 않는 한 그저 평범한 상자로 지낸다.
그러나 봉인이 풀리면 저렇게 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아스란은 그저 기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나도 상태 창을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면 저 상자의 이름이 카오스 미믹인 걸 몰랐겠지. 당시에는 카오스 미믹을 아는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지금 내가 아이템 창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게임 속에서는 마주한 몬스터의 이름과 간략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이름이 카오스 미믹.
설명은 고대의 존재가 오래된 상자 안에 숨어 있다가 끝이었지.
“디에네. 이거 마시고 조금 쉬세요.”
나는 어느새 피가 번지기 시작하는 디에네의 복부를 보며 포션을 건넸다.
이틀 만에 아물었다 싶었는데 여기서 터져 버리네.
디에네는 고분고분 내 말을 들었다.
식은땀이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는 게 진심을 다해 마법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이제 어떡하지.”
“디에네도 실패했어. 그냥 교수님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학생들의 비관적인 말이 들려왔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이진 않았다.
카오스 미믹에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안타깝지만…….’
카오스 미믹은 그냥 미믹과 달랐다.
평범한 미믹이 보물을 노리는 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의태를 했다면 카오스 미믹은 자신이 직접 보물들을 모으기 위해 상자에서 지냈다.
‘한마디로 보물 사냥꾼이란 소리.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직접 보물을 구하는 녀석이다 보니 곧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지금은 아마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여파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제 녀석을 어떻게 공략하냐의 문제가 남았는데…….
이곳이 밖이었으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거다.
아무리 보물이 좋다지만 카오스 미믹의 전투력은 초인들을 상회하는 수준.
근데 모네의 미로에 갇힌 지금은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공략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무식하게 힘으로 찍어 눌렀던 게임 속 경험과는 달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게임에서 몇 번 잡아 본 적이 있다는 사실.
그렇기에 정보가 조금은 있었다.
“아드리아스. 어떻게 할 거야?”
포션을 다 마신 디에네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물음에 우선은 내가 아는 정보를 풀어놓기로 했다.
“저 함정, 어디선가 읽어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왜 그걸 지금 말해.”
“긴가민가했습니다. 근데 잘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카오스 미믹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자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제부터 말하게 될 정보를 들으면 혼란이 찾아오겠지만 내가 편하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
“저건 원래 모네의 미로에 있는 함정이 아닙니다. 그러니 몬스터라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아까 도깨비의 문이 우리 말고 또 다른 존재가 미로에 들어와 있다고 했잖아요? 아마 저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게 그 이형의 존재였구나.”
디에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오스 미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내가 모르나 했더니 원래 여기 있던 물건이 아니구나.”
“이제부터는 제가 아는 정보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저건 보물 사냥꾼이라 불리는 몬스터로 말 그대로 보물을 찾아 헤매는 괴물입니다. 당연히 움직이죠.”
“그 말은……?”
“저희가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이야기예요. 이제 곧 움직일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학생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디에네의 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괴물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평범한 학생들은 저항도 못 할 테니까.
“아, 아드리아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다른 정보는 더 없어?”
누군가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했듯이 저 괴물은 보물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물건에 집착이 심해. 그리고 그런 물건들은 전부 저 상자 안에 들어 있겠지.”
내 손끝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카오스 미믹의 상자였다.
뚜껑이 열린 상자는 아직까지 미동이 없었는데 시커먼 내부가 알 수 없는 공포감을 조성했다.
“방금 봤던 것처럼 그 몬스터는 저 상자 안에서 서식하고 있지. 저 상자는 본체가 아니라 그냥 거처와 보관함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돼. 만약 저 괴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저 상자를 인질로 잡으면 그림이 좀 그려지지 않을까.”
“아드리아스. 그 전에 괴물을 어떻게 밖으로 불러내는지가 중요할 것 같은데? 조금 전에도 봤던 것처럼 손만 튀어나와서 내 마법을 부쉈어. 저 상자 밖으로 나오기는 할까?”
“그건 이제 디에네가 해 주셔야 할 일입니다.”
“내가?”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가리켰다.
“그것도 보물이라면 보물이지 않습니까.”
“아! 유인하자는 거지?”
“그렇죠.”
“알았어. 한번 해 보자.”
“위험할 겁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나를 향해 디에네는 기품 있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안 할 거야? 할 수밖에 없잖아.”
“……조심하셔야 합니다.”
디에네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나가는 거지만 디에네의 목숨이 최우선 순위.
여차하면 모든 걸 사용해서라도 그녀를 살려야 했다.
“근데 언제 움직이는 거야?”
이곳에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카오스 미믹은 마법이 사용됐을 때를 제외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글쎄요. 1시간 후에 움직일지 하루가 지난 후에 움직일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교수님들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도 있죠.”
“일단은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거네.”
과연 교수들이 들어온다고 뭔가가 달라질까.
다시 말하지만 카오스 미믹은 초인들을 상회하는 전투 능력을 지녔다.
게임에서 겪어 봤으니 확실한 정보지.
그때는 키우던 캐릭터와 파티 멤버들도 전원 오러 마스터 아니면 워록급 초인들이었기에 카오스 미믹을 무식하게 때려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공략법이 필요했다.
‘모든 건 저 상자에 달려 있다.’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상자.
그 문양들이 고대의 마법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오랜만에 마법진에 관한 지식을 풀어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 * *
출구에 도착한 지 이틀이 더 흘렀다.
그동안 꾸준히 다른 학생들도 합류해 어느새 60여 명에 가까운 큰 규모의 인원이 만들어졌다.
“이제 곧 있으면 교수님들도 출발하시겠지?”
“성적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냥 재평가를 보게 되나?”
처음 규모가 불어났을 때는 카오스 미믹을 무시한 몇 명 학생들의 독단으로 약간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무려 디에네가 말렸음에도 무시한 그들은 모두 카오스 미믹의 상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
그 후로는 그저 조용했다.
이후 카오스 미믹에게 다가가는 학생은 없었고 카오스 미믹도 얌전하다 보니 점차 긴장이 풀린 학생들은 이제 생존의 문제보다는 평가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살 만하니까 성적 걱정이 되나 보네.’
나도 처음과 같은 긴장감은 없어진 지 오래였으니 그들에게 뭐라 할 수는 없겠지.
이미 새로 합류한 학생들에게도 저 상자의 정체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뒀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아드리아스.”
어느새 유리히도 합류한 덕분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디에네가 다가왔다.
“예. 디에네.”
“교수님들이 오시면 이제 탈출도 가능할 텐데 잠 좀 자 둬.”
요 며칠 동안 나는 꼬박 밤을 새웠다.
잠을 참는 일은 그리 어려울 건 없었고 당장 카오스 미믹이 움직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잘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주변에서는 그런 내가 걱정스러웠나 보다.
“맞아. 교수님들이 오면 깨워 줄 테니까 좀 자 둬. 보는 우리가 안쓰럽다.”
누군가가 디에네의 말을 들었는지 나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저 상자가 움직이는 것도 말해 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쉬어.”
“난 괜찮아.”
정말로 괜찮았다.
그리고 자칫 한 번의 방심으로 일이 잘못된다면 그게 더 괴로운 일이겠지.
“전 괜찮습니다. 고작 하루 정도 더 견딘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 나가기 전까지는 기다리겠습니다.”
“고집불통이네. 그래, 그게 오히려 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유리히에게 돌아갔다.
유리히도 원래는 내 곁에서 디에네와 수다를 떨었는데 나를 배려한 디에네가 거리를 벌린 거다. 굳이 그런 배려는 필요 없었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카오스 미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렵네.’
참고로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자에 그려진 문양들은 마나로 안력을 키우면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마법진에 대해서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역시나 생소한 고대의 마법진이라 머리가 아팠다.
게임에서 경험해 본 게 없었다면 그나마 이런 시도조차 할 수 없었겠지.
그때 상자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포착되었다.
우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려는 카오스 미믹의 반응에 소리쳤다.
“디에네! 상자가 움직입니다!”
이어서 준비를 하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카오스 미믹의 주위로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