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합류
열차를 타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느린 것 같은 열차의 속도를 느끼며 도대체 날 찾아왔다는 손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집은 웰튼 영지의 사과나무 저택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난 누구한테도 알려 준 적이 없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따로 알아냈다는 건가.
무슨 의도로, 도대체 왜?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조금 더 장문의 글이 써져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저 집에 돌아오라는 말만 있었으니.
마침내 열차가 도착했다.
사실 열차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금방 도착할 수도 없었겠지.
나는 곧바로 마차를 잡고 사과나무 저택을 향해 갔다.
“조금 급해서 그런데 속도 좀 높여 주실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이윽고 마차의 속도가 올라가고 나는 금세 사과저택이 있는 웰튼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낮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단은 저택으로 직행했다.
쿵쿵.
“누구십니까?”
문이 열리고 못 보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인의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새로 고용된 사람인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아! 크롬웰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드륜 호센이라고 합니다.”
그는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들어가며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곧바로 물어보았다.
“에이미는 집에 있습니까?”
“예, 지금 계십니다. 모셔 올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는 모양인데.
“…….”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잠깐.”
“예?”
“드륜 호센?”
“예, 부르셨습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되묻는 그를 보며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어디선가 겪어 본 듯한…….
“살렘?”
“……이야, 이제는 잘 안 속네.”
드륜, 아니 살렘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바꿨다.
설마 살렘이 우리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나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말한 성서는 찾으신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천천히 좀 말해라. 숨넘어가겠다.”
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오더니 에이미가 난간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 오빠! 금방 왔네?”
저 속없는 것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모르겠지.
“그분이 내가 말한 손님이야. 하겐달 님. 오빠를 알고 있다던데?”
“하겐달?”
요즘 상단의 일로 에버라스트 상단과 같이 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연이 이어진 건가.
이런 우연을 보면 세상이 참 좁다고 느껴지네.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곧바로 온 걸 보면 여동생을 아끼는 모양이야?”
“그랬으면 자주 돌아왔겠죠.”
약점이 잡히기 싫어 일부러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나저나 그의 상태를 대충 살펴보자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난잡하지 않아.’
예전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붙은 폭탄과 같은 느낌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폭탄이지만 스위치가 제대로 달린 느낌이었다.
“성서는 찾으신 모양이군요.”
“너도 이제 수준이 올라갔다 이거냐? 그래, 찾았지. 덕분에 시간도 꽤 걸렸고.”
살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 아래로 내려온 에이미를 눈짓하며 말했다.
“고마운 마음에 네 동생을 조금 도와줬다. 솔직히 이 정도로 내게 도움이 될 걸 선물해 줄 줄은 예상도 못 했었거든. 네가 내기에서 지더라도 봐줄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그거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살렘이 에이미의 눈치를 살피더니 엄지를 치켜들며 밖으로 나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 할까?”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에이미도 그런 우리를 조용히 보내주는 게 배려가 느껴졌다.
“집을 알아내서 오신 겁니까, 아니면 에이미를 먼저 만나서 온 겁니까?”
“일단은 가서 얘기하자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묻는 내 질문에 그가 웃으며 답했다.
마침내 외성에 있는 작은 주점에 들어간 우리는 테이블을 하나 잡고 각자 메뉴를 시켰다.
아직 훤한 대낮이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래. 무슨 질문이었지? 집에 온 거?”
“예.”
“맨 처음에는 홀링턴에서 만났다. 너랑 이어진 곳이 거기니까 너에 대한 소식을 홀링턴 자작이 알고 있는지 확인하러 갔지. 그러다 우연히 네 동생을 만났다.”
예상했던 게 맞았네.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다음 질문을 곧바로 던졌다.
“제가 말한 건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럼. 굳이 다른 녀석들 손에 들어가 봤자 좋을 것도 없고. 내가 가지고 있어야지. 왜? 너도 보고 싶냐?”
조금 흥미가 동하기는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금 가지고 있는 걸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애초에 성서가 가지고 있는 기원의 개념을 알고 있으니 급하지도 않았고.
“그래? 궁금할 텐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할 만한 것도 아니고요.”
“음?”
내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살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을 훑었다.
분명 카운터를 맡고 있는 직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주점이었지만 살렘은 거칠게 마나 파동을 사용했다.
투웅―!
뭔가를 감지한 모양인지 살렘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이거. 뒤가 구리구먼.”
잠시 그렇게 무언가에 집중하듯 가만히 있던 살렘은 이내 손가락에 침을 묻혀 테이블에 무언가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하겐달?”
일단은 밖이라 가명으로 그를 불렀는데 그는 내 부름에도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됐다.”
이내 그려 낸 무언가에 마나를 주입한 살렘이 말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이제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주변을 마법진으로 차단했군요.”
“오? 공부 좀 했나 보네?”
역시 대륙 최강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살렘답다.
그저 침으로 끼적인 마법진, 그것도 저런 소형 마법진으로 환각과 환청 마법진을 우리 테이블 주변으로 걸어 버렸다.
“그나저나 감시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도 참 골치 아프겠네. 동생이 불안하지 않아?”
“일부러 놔두는 겁니다. 괜히 경계를 하면 제가 눈치챘다는 걸 알고 더 심하게 견제가 들어오겠죠.”
“그래서. 상대가 누군데?”
잠시 고민했다.
살렘에게 말해 줘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걸 보면 상대가 누군지 알고는 있나 보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나도 귀찮아지니까.”
“하하…….”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
내가 잠시 어색하게 웃고 있자 살렘이 말했다.
“막시민을 만났다면서.”
최근에 제국 상류층에서 유행하는 이야기는 역시 막시민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살렘이 못 들었을 리가 없지.
그래도 마이웨이인 줄 알았던 살렘이 관심을 가질 정도면 확실히 막시민의 힘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일면식도 없는데 대뜸 찾아왔다고 하니 머리를 좀 싸맸죠.”
“이자벨을 치료했다고 들었다. 난 오히려 그게 더 놀라웠어. 나도 치료해 보려고 한 적이 있거든.”
“만난 적이 있습니까?”
“녀석이 찾아왔었다. 치료할 방법이 좀 없냐면서 칼부터 들이미는데 나도 식겁했어.”
낄낄거리며 말을 하는 걸 보면 그 상황이 재밌었나 보다.
정말로 막시민이 칼을 들이댔으면 살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텐데.
“농담이다. 네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좀 놀려 봤어. 듣던 거랑 다르게 꽤 유순한 성격이더라고.”
왜 낄낄대나 했더니 나를 놀리는 거였어?
나는 진짜인 줄 알았다.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막시민의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법한 얘기라.”
“어쨌든 나도 이자벨을 깨울 수는 없었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깨운 거냐?”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알아서 일어나던데요.”
“말을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는 주문한 맥주를 들이켰다.
이내 입 주변에 거품을 잔뜩 묻힌 살렘이 이어서 말했다.
“앞서 말했듯 네 동생이 하는 일은 내가 좀 도와줬다. 근데 저것도 네가 시켜서 하는 거냐?”
“아니요. 에이미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남매가 양쪽 다 당차구먼. 보기 좋은 일이야. 아, 그리고 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
“말씀하세요.”
“집회가 열렸다면서? 너도 이번에 참가했다고 소식통으로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집회 내부에 살렘의 연락망이 있나 보다.
살렘에게 딱히 숨길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집회에 가입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하긴 네가 거절할 만한 처지가 아니긴 하지.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내가 아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면 뭐라도 얻어 냈지 싶은데?”
“딱히 얻어 낸 건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거절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갔을 뿐이죠.”
“너, 내가 모른 영감이랑 얼마나 친한지 모르지?”
“예?”
대충 얼버무리려 했는데 갑자기 나온 모른의 이름에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몰랐습니다. 근데 갑자기 대부님의 이름은 왜……?”
“이 새끼, 이거 끝까지 시치미 떼는 거 봐라. 내가 어디서 집회 정보를 얻는지 알아? 물론 모른 영감 말고도 정보를 얻을 구석은 많지만 이번에는 영감한테서 먼저 연락이 왔다고. 그것도 어제 말이야.”
“그렇군요.”
“그렇군요? 됐다, 인마. 좀 도와주려고 했다만 끝까지 모르는 척하네.”
“도와주다니요?”
“영감이 나한테 부탁했어. 앞으로 1년, 네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만 신경 좀 써 달라고.”
대부님이 그런 부탁을 했다고?
아니, 그럴 거면 나한테 미리 언질 좀 해 주지.
보르기옌에서 헤어지기 전에 대충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를 했던 적이 있다.
어차피 나는 지금 아카데미에 묶여 있는 몸.
그리고 모른도 졸업 후에 얻게 될 탑의 도전 기회가 얼마나 큰 기회인지 알기 때문에 무사히 졸업하기를 권했다.
‘어차피 이제 곧 졸업반이니 1년만 있으면 졸업. 그리고 그 1년은 파벌을 정비하기 알맞은 시간이 되겠구나.’
마침 잘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 기반을 마련해 놓는다고 했다.
물론 루나가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모른과 루나, 무려 워록급 흑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으니 내가 올 때까지 충분히 준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도움이라면, 어떤 도움 말씀이십니까?”
“뭐야, 구미가 좀 땡기나 봐?”
“당연하죠. 천하의 살렘 님께서 도와주신다는데 구미가 당기죠.”
“이럴 때만 솔직한 새끼. 알았어, 어차피 너한테는 받은 게 너무 많으니까 네가 싫다고 해도 오지랖 부릴 생각이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살렘은 남아 있던 맥주를 전부 비워 냈다.
그리고 탁자를 부술 듯 잔을 내려놓은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너 백작이지?”
“예? 예.”
“네 밑으로 들어가 주마.”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대답을 못 했다.
그러자 살렘이 재차 말했다.
“네가 졸업할 때까지. 그때까지 네 밑의 가신으로 있어 주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