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집회의 역사 그리고 마장(魔匠)
“파벌,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것 때문에 나를 기다린 건가.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기다리기까지 하면서 파벌에 영입하려고 하는 거지?
“그래요. 저도 당신이 네크로맨서라는 건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파벌은 별개의 문제잖아요? 설마 모른의 파벌에 벌써 들어가신 건 아니겠지요?”
“파벌은 제게 아직 이른 이야기 같습니다.”
“아니요. 이르지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 당신에게는 반지가 있잖아요?”
“반지?”
나는 헤이겔이 주었다는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사실 게임에서도 아무 효과가 없던 아이템이었기에 그냥 치장품이나 기념품 정도의 의미로 여겨 왔었다. 근데 사실은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반지에 대해 모르나 보네요. 제가 설명해 드릴까요?”
에이카가 마치 아이를 보듯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외모와는 다른 깊은 연륜이 느껴져 기괴했다.
내가 대답 없이 그저 반지를 움켜쥔 채 있자 에이카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 반지는 집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 함께 만든 반지예요. 그 당시에 집회를 창시한 흑마법사들은 모두 열 명. 그와 함께 열 개의 반지가 만들어졌죠.”
그건 몰랐다.
집회를 만든 흑마법사들이 10명이었구나.
지금은 100명도 넘게 소속되어 있을 테니 확실히 커지기는 했다.
“처음에는 그저 집회 소속임을 드러내는 소속감을 위한 반지였지만, 훗날 집회의 규모가 커지고 초대 멤버들이 하나둘 죽거나 은퇴를 하면서 의미가 바뀌었죠. 어느새 그 반지들은 집회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에이카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여 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수많은 반지들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집회 반지였다.
“이후 여러 사건 사고와 흥망성쇠를 겪은 집회는 이 반지에 심어진 의미를 강화하게 돼요. 공식적으로 규칙을 정한 거죠.”
“규칙?”
“네, 규칙이요. 집회는 기본적으로 수평적인 지위 구조를 지향했지만 이는 집단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곧장 수직적인 구조로 만들 수 없음을 인정한 선대 집회는 이내 이 반지들을 모두 모으는 자가 집회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을 약속했죠.”
“그 말은 열 개의 반지를 모두 모으면 집회의 주인이 된다는 소리입니까?”
“맞아요. 그 말 그대로예요.”
집회와 관련해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파벌이 있는 이유도 혹시 이 반지와 연관이 된 건 아닐까?
개인의 힘으로 반지를 지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파벌을 만든다면 반지를 지키거나 빼앗기가 수월하겠지.
‘전혀 뜻밖의 정보였지만 도움이 됐어.’
집회를 집어삼킬 생각을 하던 내게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된 것 같아 나쁘지 않은 정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상징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반지 때문에 파벌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반지를 헤이겔이 내게 그냥 줬다고?’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뭘 노리고 내게 반지를 준 거지?
그냥 주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반지를 굳이 나한테 줬다는 건 그로 인한 노림수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에이카, 그럼 당신은 반지 때문에 제게 파벌에 합류하라고 권유한 거군요.”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아드리아스 크롬웰보다는 반지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죠.”
빌어먹을 정도로 솔직해서 오히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뺏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당신의 반지를요? 전 아직 헤이겔과 싸우고 싶지 않답니다.”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는 에이카를 보니 나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상대가 방심할수록 이용하기는 편하니까.
그건 그렇고 헤이겔은 중립임에도 에이카가 건드릴 생각을 못 하는 건가.
헤이겔과 직접 부딪혀 본 소감을 생각하면 그가 그렇게 강한 건가 의문이었지만 아무래도 날 많이 봐준 것 같았다.
“아직이라는 말씀은…….”
“전 욕심이 많아요. 언젠가는 모든 반지를 모을 생각이죠.”
당연한 말이었다.
애초에 반지를 노릴 게 아니라면 파벌의 수장도 되지 않았겠지.
그보다는 지금의 내 상황이 애매했다.
에이카의 파벌에 합류하는 것은 일단 보류.
그냥 반지만 넘겨주고 아무 이득도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파벌에 합류하지 않으면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쉽지만 상관없어요. 근데 당신이 하나 아셔야 할 건 지금 반지를 가진 자들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분이 그쪽이란 걸 아셔야 해요. 어차피 다른 이들도 모두 당신을 노릴 텐데 그 전에 제 호의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걸요?”
“에이카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막 집회에 가입한 상태라 파벌에 소속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네요.”
내 완곡한 거절에 에이카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당신의 선택이니까. 후회도 그쪽의 몫이겠죠.”
거절한 것치고는 반응이 부드러웠다.
내가 아는 에이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반응이 정상적이라 오히려 그게 조금 걱정이 될 정도.
그러나 나는 곧 왜 에이카가 분노 조절을 이렇게 잘하는지 알 수 있었다.
쿵!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거미줄이 둘러 쳐진 방문이 거세게 열렸다.
“친구!”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정겨운 호칭.
루나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달려왔다.
“허허, 일어났구나. 몸은 좀 괜찮느냐?”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모른 드왈스키.
이래서 에이카가 함부로 날뛰지 못했군.
“루나, 모른. 아직 남아 계셨군요.”
타이밍 좋게 들어왔네.
루나는 오자마자 내 몸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내 상태를 확인했고 모른은 에이카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허허. 에이카, 그래서 원하는 것은 얻었느냐?”
“으, 기분 나빠.”
에이카는 인상을 찌푸리며 모른을 무시하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반지 간수 잘하시고.”
그 말을 끝으로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이카가 떠나자 그제야 모른은 내 상태를 살폈다.
“고생했다. 저 노친네를 상대하는 건 나도 번거로운 일이거늘.”
“아닙니다. 그것보다 아직까지 여기 계실 줄은 몰랐네요. 일이 남아 있던 겁니까?”
“일은 무슨. 네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지.”
그는 내 옆에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루나를 가리켰다.
“마침 말동무도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았단다.”
“친구, 괜찮아?”
루나의 걱정에 웃어 주었다.
“예. 괜찮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두 분의 시간을 뺏었네요.”
“너무 그렇게 부담 갖지 말거라. 우리가 좋아서 기다린 것이니. 그보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설마 헤이겔 녀석과 그렇게까지 부딪힐 줄은 몰랐어.”
나도 얼떨결에 각성을 한 터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저 뜨문뜨문 떠오르는 기억들을 이어 붙였을 뿐.
사실 다시 알-구르드를 강령시킨다고 해도 이번처럼 깨달음을 얻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헤이겔과 같은 강자가 상대해 준 덕분에 성장했다고 봐도 좋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영혼 각인을 한 번 더 받을 수 있지.’
이번 일로 굉장한 이득을 본 나는 두 번째 영혼 각인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러 마스터의 영혼으로 검을 다루는 능력이 올라갔으니 두 번째 영혼으로는 워록인가?
물론 워록의 영혼을 뚝딱하고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헤이겔의 의도는 반쯤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네 능력을 시험해 볼 겸 알고 싶었던 거겠지. 그와 동시에 다른 녀석들에게도 대충 자신의 안목을 보여 주고 싶었을 테고. 너를 초대한 건 다름 아닌 헤이겔, 그 녀석이니.”
“혹시 그 후의 회의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루 연장이 되었지. 다음 날 끝났단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나 궁금했는데 아쉽군요.”
은근슬쩍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가 듣고 싶어 밑밥을 깔았다.
그러자 모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입질이 왔다.
“내가 알아!”
루나가 발표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처럼 한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알려 줄게. 다 외우고 있어!”
“그러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가끔 푼수처럼 보여도 루나는 워록급의 마법사.
똑똑하기로는 어디 가서 꿇리지 않지.
그녀는 곧 내가 듣지 못했던 회의의 안건들과 각 파벌에서 나왔던 의견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도 나태를 봤으니까 죄악이 뭔지 알지?”
“예.”
“북부 야만족의 땅에서 분노를 찾았대. 근데 물건이 아니라 어린아이인가 봐. 그것도 대족장의 아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최후도 알고 있지.
솔직히 말해서 아이를 살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과연 가능할지는 장담을 못 하겠다.
‘집회만 노렸으면 몰라도 이제는 황제도 죄악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동안은 집회가 분노를 챙긴 줄 알았기에 제국과 야만족의 전쟁이 발발하자 괜히 불똥이 튀었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황제가 살아 있고 분노가 대족장의 아이인 것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그건 참 놀랍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우리 흔적이 드러나는 건 안 되니까 용병을 고용하기로 했어. 어차피 위치도 알고 누군지도 알았으니까 분노를 손에 넣는 건 금방이야.”
루나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흑마법사는 흑마법사였다.
어린아이가 분노라는 건 그냥 신기할 뿐이지 그 아이에 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신경 쓰느냐?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인 것은 충분히 동정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내가 동정하는 것도 웃기지.
전생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꽤 많이 죽여 왔다.
모두 명령과 임무를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지.
어쩌면 내가 그 누구보다 흑마법사에 어울리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언제쯤일까요? 분노를 데려오면 집회가 다시 열리겠죠?”
“응. 일단 전부 헤이겔한테 위임하기로 했어. 헤이겔이 다 준비하고 찾아낸 거니까. 헤이겔이 분노를 가져오면 다시 집회 소집을 할 거래.”
그렇다면 이제 됐다.
나도 이제 집회 소속의 흑마법사이니 분노가 이쪽으로 넘어왔을 때 자연스럽게 끼어들거나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다.
생각해 보면 이후에 일어날 모든 흑마법 관련 에피소드에도 내가 참견할 수 있게 됐다.
‘플레이어블들한테 엮이는 흑마법 사건들을 조절하거나 없앨 수도 있겠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 했나.
나는 호랑이를 잡는 게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드는 거지만 그게 그거지.
집회에서의 내 영향력이 커지고 파벌과 세력만 형성하면 거의 30%가량의 에피소드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될 거다.
‘헤이겔한테 고맙네.’
집회에 들어온 것도, 우연찮게 반지를 얻은 것도 모두 헤이겔 덕분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내게 도움만 되는 일뿐이었다.
“아가야, 지금부터 바쁜가?”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모른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주말이라 여유롭습니다.”
“그럼 늙은이랑 같이 어디 좀 가지 않을 텐가?”
모른의 제의에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시죠.”
어디를 가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게 해가 되는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동안 받아먹기만 해서 다시 기대가 되었다.
“허허, 좋네. 루나야. 너도 같이 가려무나.”
“응. 좋아!”
루나까지 따라가면 안심이지.
“그럼 지금 바로 가자꾸나.”
“혹시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가야, 혹시 ‘마장(魔匠) 트라울러’라고 들어 봤느냐?”
“트라울러……. 혹시 마검을 제작했다는 그 사람 말입니까?”
“그래. 마검을 제작한 걸로 유명한 녀석이지.”
와, 이건 진짜…….
트라울러는 게임 세계관에서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유일하게 마검을 제작한 대장장이였다.
본디 네임드급 무구들이나 장비들은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만드는 경우가 없었다.
다른 종족들에서는 종종 혼자서 그런 뛰어난 아이템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모두 수명의 차이였다.
고작해야 100년 남짓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 개인의 기술력으로는 네임드급 아이템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지금부터 ‘마장’을 보러 가지.”
모른이 흘흘거리며 앞장섰다.
설마 모른이 트라울러와 안면을 튼 사이였을 줄은 몰랐다.
트라울러는 나도 게임에서 우연히 만나 본 적이 두 번밖에 없을 정도로 두문불출하고 항상 떠돌아다니는 방랑벽이 있었다.
현실 시간으로 2년 동안 하루 종일 게임만 한 내가 우연히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마장 트라울러.’
새로운 기연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