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거미그물
수많은 학생들이 주말을 맞이해 알븐 스트리트로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를 멀리 나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풀기 위해 자주 애용되는 알븐 스트리트는 모나스 아카데미 학생들도 이용하는 곳이었기에 학부와 아카데미에 관계없이 모두가 마주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랜만에 오는 거 같네.”
루이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달려 왔던 탓에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던 그는 정말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알븐 스트리트로 나온 참이었다.
“휴식도 성장의 일환이야. 조금은 쉬어 줘야지.”
“세레나, 네가 그 말을 한다고?”
“왜? 내가 말하면 안 돼?”
“입학하고 한 번도 쉬지 않은 건 오히려 너야. 오늘 알븐 스트리트에 같이 오자고 한 것도 그렇고 방금 그 말도 그렇고, 좀 변한 거 같은데? 최근에 무슨 일 있었어?”
루이스의 물음에 세레나는 그저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어느 카페를 가리키더니 달려갔다.
“저기 가 보자! 예전에 봐 뒀는데 꼭 가 보고 싶었어!”
루이스는 먼저 달려가는 세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하지만 내심 그녀의 상태가 좋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없었는데…….’
그녀를 걱정했던 루이스였기에 갑작스러운 이 변화를 우선은 좋게 보았다.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그도 몰랐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물어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음, 맛있다.”
아이스크림 디저트를 시킨 세레나가 한입 가득 디저트를 입에 넣고 즐거워했다.
루이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주문한 조각 케이크와 홍차를 함께 곁들여 먹었다.
“궁금하지?”
“어?”
“갑자기 놀러 가자고 해서 놀라지 않았어?”
“놀랐어. 주말에도 수련만 했었으니까.”
루이스의 대답을 들은 세레나가 어색하게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비안 선배님이 찾아왔었어.”
“비비안 선배님이?”
“어. 저번에 네가 먼저 들어가고 나 혼자 남아서 운동했던 날 있잖아? 네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비안 선배님이 오셨어.”
비비안이 왔었다는 말에 루이스의 몸이 기울어졌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졌다.
그 후로 세레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비비안과 연무장에 가자 아이비가 기다리고 있었던 일.
자신에게 시범을 보여 주겠다며 비비안과 아이비가 대련을 한 일.
예상치 못했던 아이비의 실력과 둘의 수준 높은 대련.
이후에 일어난 지도 대련들까지.
이야기를 전부 들은 루이스가 감탄했다.
“그러니까 그게 다 아드리아스 선배님이 짜 놓은 일이라는 거지?”
“응. 예상도 못 했었어.”
본인만 신경 쓰기에도 정신이 없을 텐데 우연한 인연으로 알게 된 후배들을 끝까지 신경 써 주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대단한 사람이다.’
아드리아스는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루는 만큼 들여야 할 노력도 두 배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인물들까지 챙긴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래.”
“그렇지. 우리도 원래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지 쫓기듯 달려오느라 쉬지 못했을 뿐.
생각해 보면 이렇게 숨 가쁘게 달릴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로들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부터였지.’
모나스에서는 위가 없었다.
루이스와 세레나, 그리고 크리스의 독주일 뿐 앞을 가로막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로들렌에 입학하고 난 이후 쟁쟁한 선배들의 등장으로 조급해졌던 모양이었다.
“아이비 조교님이랑 비비안 선배님이 말했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쉬라고.”
“그래. 앞으로 토요일은 쉬자. 이왕이면 크리스도 같이 부르자.”
“걔가 말을 들을지 모르겠네.”
세레나가 웃었다.
그 모습에서 오랜만에 여유가 한껏 느껴져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 루이스는 잠시 시선을 돌려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카페 테라스석에 앉아 있던 덕분에 알븐 스트리트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소년이 시야에 잡혔다.
‘날 보고 있네?’
누구지? 날 아는 건가?
루이스는 좀 더 자세히 소년을 살펴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그 소년은 등에 기다란 무언가를 회색 천으로 둘러매고 있었고, 허리춤에 4개나 되는 검을 차고 있었다.
‘저걸 다 다루는 건가? 특이한 아이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소년이 먼저 입을 열자 분위기가 변했다.
“루이스 아트만, 맞나요?”
소년의 물음에 세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루이스가 긍정했다.
“그래. 내가 루이스 아트만이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뭐?”
소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루이스와 세레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소년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아드리아스 님이 제게 전날 미리 연락했습니다. 제 이름은 벤자민 아니키우스.”
소년, 벤자민이 루이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루이스 아트만 님에게 대련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 *
나는 지금 멍하니 누워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은 집회의 연회를 벌였던 건물에 위치한 손님 방.
깨어난 지는 꽤 되었지만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를 천천히 복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줄 알았었지.’
너무 심취했던 걸까.
전투가 끝난 직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텅 빈 상태가 되었었다.
아무래도 무아검의 영향인 것 같았는데 고작해야 검법이 이 정도로 내게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재능 ‘검술(수재)’을 획득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재능도 얻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 특성인 깨달음 덕분인 것 같은데 놀라운 건 곧바로 진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재능: 검술(수재)의 진화 가능성 100%]
그것도 이미 100%가 차 있었다.
아무래도 그동안의 겪었던 경험과 헤이겔과의 전투로 인해 한 번에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분명 예상치 못한 성장이었지만 기분은 덤덤했다.
나는 이미 저 너머에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재능은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벽이 만져졌지.’
벽.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벽에 잠시 동안 닿을 수 있었던 나는 애써 그때의 감각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쿵쿵.
덜컥.
노크 소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거친 소음과 함께 누군가가 방문을 열었다.
“어?”
들어온 인물은 깨어 있는 나를 보며 놀란 소리를 내더니 내게 다가왔다.
나도 전혀 의외의 인물을 만난 탓에 잠시 몸이 굳었다.
‘왜 이 녀석이 여기에……?’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에 보이지 않았기에 당연히 없을 줄 알았는데…….
‘잠시만.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몇 시간 정도만 누워 있던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인물로 인해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그녀는 하인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보르기옌 영주의 하녀처럼 행세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잠시 굳은 몸을 이완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가, 며칠이나 누워 있던 건지 알 수 있습니까?”
그녀가 왜 하녀 행세를 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어울려 주었다.
솔직히 아는 척하기도 싫었고.
이미 헤이겔에게 관심을 잔뜩 받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미친놈의 관심을 끌기는 싫었다.
“말 편히 해 주세요, 손님. 손님께서는 3일 동안 주무셨답니다.”
“미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해 버렸다.
하지만 욕지거리가 안 나올 수 없었다.
‘3일?’
수요일에 이곳에 왔으니 지금이 토요일이라는 건가?
의도치 않게 강의들을 무단결석해 버렸다.
졸업에는 성실도에 따른 점수도 부여되기 때문에 졸업을 해야만 하는 나로서는 조금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요?”
“예.”
“아이, 참.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된다니까요?”
너야말로 콘셉트에 충실해라.
하인인 척하면서 왜 그렇게 나대는 거야.
어쨌든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곳에서 열렸던 연회는 모두 끝났나?”
“그럼요.”
이것도 타격이 큰데.
결국에는 분노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헤이겔이 날뛰어 가지고.
‘되는 일이 없네.’
물론 검술 재능도 얻고, 초인의 벽에 대한 단서를 보았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훨씬 이득이긴 했다.
하지만 목적했던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스트레스였다.
‘돌아가야겠다.’
의도치 않은 일들이 조금 있었지만 어쩔 수 없겠지.
일단은 아카데미에 돌아가야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전히 하녀의 행세를 하는 마녀가 나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스스로 일어났다.
그녀와 몸이 닿는 것은 여러모로 꺼림칙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래.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일단은 빨리 이 마녀부터 떨궈 놔야지.
애초에 왜 여기 있는 거야?
게임을 안 해 봤으면 얘가 마녀인지도 못 알아봤을 거다.
그저 조금 특이한 하녀라고 생각했겠지.
“조금 더 휴식을 취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말은 잘해 놓을게요.”
“아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 봐야 해.”
뭘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소꿉놀이에 어울려 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게임 속 대표적인 광녀 캐릭터였다.
아직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 차가 나는 내가 엮여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흐응.”
묘한 콧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그녀를 애써 외면하고 방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문고리에 이상한 게 묻어 있는 걸 확인하자 차마 만질 수가 없었다.
‘거미줄.’
저 미친놈이.
내가 문 앞에서 망설이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서 있으세요? 급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게 뭐냐니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말은 그렇게 해도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 골치가 아파 왔다.
왜 나는 이런 미친놈들한테만 관심을 받는 거냐.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공간에 있을 언데드들을 생각했다.
헤이겔 때와는 다르게 지금 이곳에는 그녀와 나밖에 없었다.
“에이카 임프, 지금 당신이 그러고 있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에이카 임프.
이브 밀레니엄과 함께 가장 강력한 마녀로 명성을 높인 워록.
고대의 마법을 계승한 원시 마법의 사용자.
그리고 집회의 한 파벌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흑마법사.
분명 회의 당시에만 해도 없었던 그녀가 왜 하필 집회가 끝나고 나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하하!”
내가 본인의 정체를 알아봐서일까.
갑자기 웃기 시작한 그녀는 광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루나에게 갔던 미치광이라는 칭호는 사실 이 여자에게 훨씬 어울리는 듯했다.
“제가 에이카 임프라고요?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손님!”
“이미 다 웃어 놓고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집회는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애초에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았으면서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신기하네요. 절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에이카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생긴 것만 보면 내 또래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100살이 넘은 괴물.
그런 괴물이 나를 어떻게 가지고 놀까 바라본다면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문손잡이에 저런 장난을 해 놓으면 누구든 알아차리지요.”
“글쎄요? 그렇다 하기에는 이미 보자마자 눈치챘던 것 같은데…….”
그녀는 그리 말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녀가 건네는 걸 조심스레 확인하고 받아 들었다.
“헤이겔이 준 거예요. 편지랑 반지.”
편지는 그렇다 치고 반지?
잠시만, 반지?
“반지?”
“헤이겔이 당신을 꽤 좋게 봤나 봐요.”
에이카의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건넨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확실히 ‘집회 반지’였다.
‘이건, 집회 소속이어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다.’
집회 내에서도 10개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네임드급 흑마법사를 죽이면 아주 가끔 희귀하게 드롭되고는 했던 반지.
그런 반지를 나한테 줬다고?
‘다짜고짜 선빵 치려고 할 때는 언제고…….’
물론 다른 노림수가 있어서 그랬다는 건 짐작하고 있지만 헤이겔의 속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던 중에 에이카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부탁했던 일은 해치웠으니까 제 용건이 남았네요.”
에이카가 내게 미소를 지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제 파벌에 합류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