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어둠의 접근
황궁의 한편에는 재상을 위한 건물이 따로 건축되어 있었다.
따로 왔다 갔다 하기보다는 황제가 필요할 때 편히 부르도록 황궁의 중심과 연결되게 설계된 그 건물에는 자잘한 부서는 물론 재상인 헥토르 카자프가 업무를 보는 집무실도 존재했다.
한참 정보부서에서 막시민과 관련된 정보들을 수습하고 있던 헥토르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있던 중이었다.
“폐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수하의 말에 헥토르가 옆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카데미 측에서 새로운 소식은 아직 없나?”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헥토르는 잠시 황제를 기다렸다.
이내 황제가 도착하고 정보부의 인원들과 헥토르는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명령에 모두 고개를 들었다.
헥토르에게 다가간 황제의 곁에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근위 기사단장, 자비에 레오날드가 있었다.
“그래, 막시민이 아카데미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아드리아스 크롬웰과의 대화를 원했다지? 무슨 대화를 원하는지는 모르나?”
“아직 왜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원하는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헥토르의 대답에 황제가 주변을 물렸다.
“잠시 재상과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물러나도록.”
“예, 폐하.”
자비에와 헥토르를 제외하고 모두 물러나자 드디어 황제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막시민, 그 녀석이 원죄의 존재를 눈치챈 건가?”
“그건 아닐 거라 사료됩니다. 일단은 막시민이 어디서 아드리아스와 연결이 되었는지부터 알아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까짓 녀석이 뭐라고 천하의 막시민이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군.”
잠시 고민에 빠진 황제는 이내 즉흥적으로 말했다.
“차라리 이참에 막시민을 죽이는 건 어떻소?”
황제가 옆에 선 자비에를 가리키며 묻자 헥토르가 미간을 좁혔다.
자비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저 인형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제가 감히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가 막심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제국의 힘에 비하면 막시민은 반딧불과 같지만 막시민의 능력이 도망치는 데 워낙 특화가 되어서…….”
“헥토르.”
황제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헥토르는 알 수 없는 한기에 닭살이 돋은 채 간신히 대답했다.
“예, 폐하.”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도대체 되는 게 뭐지. 짐이 진정 제국의 주인이 맞는 건가?”
“무, 물론 폐하께서는 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의 주인이 맞습니다.”
“그런 짐이 지금 고작 개인을 처벌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아닙니다! 제국의 저력에 감히 개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럼, 막시민을 죽이겠다. 어떤가?”
“전국으로 연락을 돌리겠습니다.”
헥토르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점차 오만해져 가는 황제를 그동안 할 수 있는 대로 억제해 왔음에도 드디어 한계에 다다랐음을 헥토르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비에 경, 그대를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헥토르는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자비에를 보았고 그래도 영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자비에 레오날드도 대륙 10인에 속하는 초인 중 하나.
전국에 흩어진 오러 마스터와 워록들이 모이면 희생 없이 막시민도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그들의 대화를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분명 황제의 어명으로 모두 물러나라고 했음에도 문을 두드렸다는 것은…….
“들어와라.”
황제가 말하자 새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 말 없이 마법 통신기만 양손으로 내밀었다.
“헤이겔이 이 시기에 연락이라……. 마침 재상도 함께 있으니 얘기하기 편하겠군.”
통신기를 받아 든 황제가 곧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헤이겔 경, 오랜만에 연락이군. 그래, 무슨 일이오?”
―분노를 찾았습니다.
잠시 정적이 내려앉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지워 낼 수 없었다.
“수고했소.”
―일단 소재는 파악했으나 가져오는 건 조금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물건이 아니라 대족장의 아이입니다.
“허!”
헥토르가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황제도 내심 놀랐는지 그런 헥토르를 나무라지 않았다.
“살아 있는 아이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일단 알겠소. 차차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통신을 끊은 황제는 이내 말을 바꿨다.
“막시민 따위는 그냥 놔둬야겠군.”
“그렇습니다. 지금은 분노가 더 중요하지요.”
“일단 헤이겔 경이 오는 것을 기다리겠다. 막시민에 대한 보고는 계속 올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자비에를 데리고 그대로 사라지자 헥토르는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창기에는 내게도 이득이 돌아왔지만 요새는 그런 모습조차 없어졌다. 슬슬 다른 끈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까.’
황궁에서 겪었던 온갖 암투의 경험으로 하여금 기준점이 불분명한 황제가 점점 위험해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개국공신 가문이자 선조 때부터 황제를 따라왔었으나 살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옴을 감지했다.
‘어렵군, 어려워.’
* * *
이자벨이 깨어나고 막시민은 곧바로 떠났다.
떠나기 전에 간단한 약속을 했는데 그녀가 다시 잠이 들면 연락을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제국에서 만나는 건 아무래도 신경 쓰이니 따로 연락을 주면 내가 제국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머지 부탁들도 급할 건 없으니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수라한이 죽었으면 상황이 복잡해졌을 텐데 어떻게든 살려서 다행이다.’
막시민이 이자벨과 모습을 감추고 뒤늦게 찾아온 바하트와 베리얼, 그리고 데오스는 빈사 상태의 수라한을 보고 급히 그를 치료소로 옮겼다.
다행히 내 응급치료가 잘 먹힌 모양인지 잘못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치료가 가능했는데 만약 그가 죽었으면 아무리 수라한이 먼저 덤볐다고는 해도 문제가 됐을 거다.
똑똑.
“전하, 아드리아스 크롬웰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방문 앞이었다.
지금 내가 도착한 곳은 수도에 위치한 알븐 공작가의 저택.
막시민과 관련된 일로 바하트가 나를 부른 상황이었다.
“그래, 들어와. 아드리아스만 들어와도 돼.”
안쪽에서 들려오는 바하트의 목소리에 나를 이곳까지 안내한 집사가 내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하트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카를로스 알븐.’
항구 도시 뮤리엘에서 보고 대충 반년만인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왔습니다. 카를로스 형님도 오랜만에 뵙네요.”
“흥! 왔습니다?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군.”
“오랜만입니다, 크롬웰 각하.”
바하트가 투덜대는 걸 무시하고 카를로스에게 묵례를 했다.
“전하, 저는 이만 그럼 가 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아드리아스를 기다린 주제에. 네놈은 점점 속이 시커메지는군.”
“하하.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맞장구 좀 쳐 주시지.”
날 기다렸다고?
그나저나 내가 있는데도 자기 아들한테 막말하는 건 참 바하트답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부자간의 사이가 좋아 보여 보기에는 좋다.
“절 기다리셨다고요?”
“은근슬쩍 묻어가려 했는데 아버지 때문에 헝클어졌군요. 맞습니다. 막시민 크로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급히 달려왔지요.”
그런 거였군.
생각해 보면 카를로스는 마법 명문가의 장남 출신이면서도 방랑 기사가 되었다는 거부터가 특이하긴 하지.
디에네도 기사 애호가인 걸 보면 가문에 뭔가가 씌었나 보다.
“이제 자리에 앉아서 얘기 좀 해 봐라. 아카데미에서 대충 들었지만 자세한 건 듣지 못했으니.”
“뭘 듣고 싶은 겁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무리한 부탁을 해 오시네.
그래도 어느 정도 잘 각색해서 말할 자신은 있었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카를로스 형님까지 계시니 특별히 말해 줘야겠군요.”
“역시 크롬웰 각하십니다.”
“아드리아스, 요새 점점 건방져지는 것 같구나.”
바하트가 내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안 뒤로는 괴팍한 성격도 신경 쓰지 않고 농담을 자주 던지고 있었다. 나름 가까워졌다는 걸 표현하고 있는 건데 다행히 바하트도 말만 저렇게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나는 신에 대한 내용은 숨기고, 내용을 조금 각색하여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내게는 포션을 잘 만든다는 이미지도 있었고 최근에 숨겨져 있었던 루시아의 병을 치료했다는 소문도 알음알음 퍼져 나가,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막시민이 가지고 다니는 관에 사람이 있더라고요. 병에 걸려서 봐 줄 수 있냐고 해서 조금 봐 줬습니다.”
“허? 나도 막시민이 이자벨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안다. 근데 그녀의 병을 네가 치료했다는 이야기냐?”
“완전한 치료는 아닙니다. 잠시 잠에서 깨우기만 했을 뿐이지요.”
그때 카를로스가 물었다.
“이자벨이라면 테라핀 사변 때의……?”
“그래. 뱀파이어다.”
테라핀 사변이 벌어진 이유를 따지면 이자벨의 지분이 가장 높을 거다.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테라핀 사변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냥 뱀파이어였으면 오히려 그렇게 일이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는 무려 직계 뱀파이어였다.
가주의 자리는 현재까지도 공석이었는데 가주의 가능성이 있는 뱀파이어인 만큼 인질로서의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막시민의 여인이라는 것이 문제였지.
그때에도 막시민은 나름 유명했지만, 최강의 검사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던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막시민은 엄청난 기대주였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나서는 별 볼 일 없는 방랑을 자처했지. 무려 황제의 작위 수여도 거절한 채 말이야. 그러던 중 어쩌다 제국 내에서 이자벨이라는 뱀파이어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막시민이 제국을 향해 검을 뽑았다. 테라핀 사변의 시작이자 최강의 검사라는 칭호의 시발점이지.”
생각해 보니 바하트는 막시민의 후배였던 걸로 알고 있다.
대륙 10인 중 두 명이 동시대에 아카데미를 다녔다니 조금 신기하네.
그래서 더욱 막시민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 수도 있겠다.
‘바하트랑 막시민이 싸운다면…….’
상상이 잘 안 되네.
실제로 게임 속에서도 마주칠 일이 드물었던 그들이다.
바하트는 제국 소속이고 막시민은 제국에는 웬만하면 들어오지 않는 방랑자였으니.
개인적으로는 막시민이 이길 것 같았다.
바로 앞에서 그의 실력을 본 이상 당연한 생각이겠지.
“이자벨을 깨웠다는 치료 약이 뭔지 물어보면 대답하지 않겠지?”
“솔직히 말하면 저도 치료약이 뭔지 잘 모릅니다. 애초에 방금 막 만난 여인을 치료했다는 것부터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우연히 깨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
내 말이 그럴듯했는지 바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하트도 막시민이 40년이란 세월 동안 이자벨을 치료하기 위해 방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처음 보는 내가 곧바로 치료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일 거다.
그 뒤로 카를로스가 궁금해하는 수라한과 막시민의 전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롬웰 각하,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누구 마음대로?”
바하트가 딴지를 걸었지만 카를로스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카를로스의 제안은 고마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 혼자 바쁘구먼.”
누구 마음대로 같이 밥을 먹냐며 뭐라 했던 주제에 아쉬운 듯 투덜대는 바하트가 웃겼다.
나도 이왕이면 신세 지고 싶었지만 수도에 올라온 김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던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카를로스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왔다.
그때 마침 저택을 향해 걸어오는 디에네가 보였다.
“뭐야? 벌써 이야기 끝났어?”
아무래도 디에네 또한 막시민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서둘러 왔던 모양인데.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시린 교수님한테 잠깐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늦어 버렸네.”
“내가 이야기해 줄게. 다 들었으니까.”
카를로스가 웃는 낯으로 말하자 그녀가 그제야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오빠. 평소에는 보기도 힘든데 아드리아스가 왔다니까 바로 찾아오네.”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카를로스를 뒤로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크롬웰 각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디에네에게도 아카데미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며 빠져나왔다.
카를로스는 지금 뭘 하느라 싸돌아다니는지 궁금하네.
지금까지 카를로스가 살아남았던 세계는 경험해 보지 못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그동안 무심했는데, 생각해 보면 무려 알븐 공작가의 장남이란 말이지?’
내가 가깝게 지낸 탓에 위상이 높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무려 제국의 공작가였다.
그것도 대륙 제일의 마탑 중 하나로 불리는 로들렌 마탑의 권한까지 움켜쥔 가문이었으니 그 힘은 웬만한 중소 왕국에 버금갈 정도.
솔직히 카를로스로 인해 무슨 변수가 생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카를로스의 생각을 하며 용건이 있는 에버라스트 상단의 지부로 가던 도중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평범해 보이는 외모에 평범한 복장.
그러나 그 평범함이 오히려 내게는 위화감을 불러왔다.
전생의 경험으로 저런 인물이 특히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누구십니까?”
그래도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제국의 수도.
게다가 이제 나름 내 신변 하나를 지킬 정도의 무력은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전달자입니다. 여기…….”
그는 빠르게 내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넨 뒤 사라졌다.
나는 얼결에 그가 주는 것을 받은 든 채 거절할 기회도 놓쳤다.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닌데?’
순식간에 기척이 사라져 버린 인물을 보며 골치가 아파졌다.
또 무슨 일에 엮인 거야?
그가 건넨 물건을 확인해 보자 작은 쪽지였다.
희미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져 마나 재능으로 훑어보자,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불이 붙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숨겨야 하는 내용.’
일단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나는 조심스레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드러나는 발신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