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전조
‘확실히 느껴져.’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마치 새로운 감각이 열린 듯 느껴지는 그 기운에 나도 모르게 계속 의식하게 되자…….
[가호 ‘신살의 씨앗’이 신의 기운을 발견합니다.]
[‘죽음에서 추락한 자’의 기운이 발견됐습니다.]
[억제가 가능합니다.]
선명하게 뜨는 메시지 창에 두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됐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게 무색해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가호를 발동했다.
[가호 ‘신살의 씨앗’이 발동합니다.]
[신의 기운을 일시적으로 억제합니다.]
[일시적으로 ‘죽음에서 추락하는 자’의 효과 저하]
[일시적으로 ‘죽음에서 추락하는 자’로부터의 내성 상승]
[가호 ‘신살의 씨앗’이 하나의 흔적을 모았습니다.]
[4개의 흔적을 더 모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흔적을 모아?’
이건 또 뭐야.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기능이 또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이자벨을 깨울 수 있게 된 거에 환호해야지.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진행에 오히려 내가 어이없을 정도였다.
막시민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허탈할까.
‘40년 동안 개고생을 했을 텐데…….’
막시민은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막시민.”
“역시 너도 방법이 없나.”
뚜껑을 열고 곧바로 내가 말을 걸자 착각을 한 모양이다.
이미 가호가 발동됐으니 깨어나는 건 시간문제.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뜯어낼 수 있는 건 다 뜯어내야지.
“그게 아닙니다. 만약 이분이 깨어난다면 저에게 뭘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내 질문이 조금 무례하게 들렸는지 웬만해서는 표정 변화가 없는 막시민이 인상을 구겼다.
“깨어날 수는 있는 건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막상 말해 놓고 딱히 해 줄 게 없는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강하다는 것 외에는 따로 가진 게 없는 그로서는 고민이 되겠지.
“이자벨의 신변과 관련 없는 일에 한해서 무조건적으로 한 번의 도움을 주지.”
“이분의 이름이 이자벨이시군요.”
일부러 이름을 모르는 척했다.
그것보다 도움이라…….
1회성인 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렇다면 협상을 더 해 봐야지.
“겨우 한 번뿐입니까?”
“아드리아스, 지금 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
“뭐라고 느끼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세 번의 도움을 주십시오.”
“세 번? 그래. 그까짓 도움, 얼마든지 주겠다. 하지만 이자벨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깨어날 겁니다. 이미 능력을 사용했거든요.”
“……뭐?”
그가 잠시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되물었다.
그리고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더니 이자벨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분명 가호를 사용했는데 왜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이자벨?”
하지만 막시민은 나와 달리 무언가를 느꼈는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자벨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깨어나는군요.”
내가 해 놓고도 놀라서 중얼거려 버렸다.
그동안 수많은 게임 플레이로도 이자벨을 깨웠던 적이 없었는데.
‘처음부터 따지고 보면…… 원죄 덕분인가? 게임 속에서는 한 번도 얻은 적이 없었지.’
운명처럼 엮여 들었다.
처음 경험해 보는 히든 던전에 방문한 것도, 하필이면 원죄가 내게 있던 것도.
원죄가 없었으면 과연 레테가 내게 가호를 내렸을까?
‘지금 내가 막시민과 이자벨하고 엮인 것도…….’
어쩌면 무언가와 연결된 전조일 수도 있다.
한참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막시민은 내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무릎을 꿇고 이자벨의 볼을 매만졌다.
“이자벨, 내 말이, 들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짙은 루비와 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순수함과 요염함이 섞인 모순된 분위기가 한 여인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막, 시민?”
오랫동안 잠든 탓일까.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물이라도 줘야 하나 싶어 막시민을 돌아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자벨…….”
막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는 막시민 맞아?’
사막과 같이 감정이 메마른 인물이 내가 알던 막시민이었다.
그런 막시민이 눈물을 보이다니…….
“제가 또, 잠들어 버렸나 보네요.”
“그래.”
“오래 잤나요?”
이자벨의 물음에 막시민은 감정에 복받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래 걸리지 않았어.”
“막시민, 얼굴을 만져 봐도 될까요.”
이자벨이 손을 뻗어 오자 막시민이 고개를 숙였다.
둘의 분위기에 나는 괜히 뻘쭘해져서 살짝 뒤로 물러났다.
내 이득을 위해서 한 일이긴 하지만 막시민이 저런 반응까지 보이니까 그래도 뭔가 뿌듯하네.
그들이 해후를 나누는 동안 나는 수라한의 상태를 살피러 갔다.
‘이건 좀 심한데.’
내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에 나는 품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포션을 꺼내 억지로 먹였다.
아까 막시민이 발로 찰 때 큰 소리가 난 것과는 달리 날아가지 않았기에 소리만 큰 건가 싶었는데…….
‘속이 엉망이다. 진짜로 죽이려 했어.’
하여간 오러 마스터나 워록치고 멀쩡한 인성을 못 봤다.
그나마 정상에 속하는 게 수라한인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당신이 저를 깨우신 건가요?”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분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시민의 부축을 받고 허리를 일으킨 이자벨이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만요.”
나는 마저 수라한의 응급치료를 마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자벨은 40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지금 보니 막시민의 피를 빤 모양이었다.
“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막시민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죠.”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이럴 때 점수를 따 놔야지.
“겸손하시네요.”
그때 막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원하는 게 있어서 도와준 것뿐이니까요.”
“40년이다.”
막시민이 다시 허리를 펴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려 40년 동안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래서 사실 이번에도 같을 줄 알았다.”
40년이면 진짜 길긴 했네.
지금부터 40년 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내가 요란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막시민, 기쁜 와중에 죄송하지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이자벨 님을 깨운 능력은 영구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은 말해 줘야겠지.
분명 메시지로도 일시적이라고 떴었으니.
물론 그 일시적이라는 게 얼마만큼인지는 모르겠다.
1시간이 될 수도, 하루가 될 수도, 일 년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그렇군.”
의외로 막시민은 덤덤했다.
이자벨도 내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둘 다 멘털이 강한 모양이네.
“저도 언제까지 제 능력이 지속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사용할 수는 있을 겁니다.”
가호는 딱히 조건이나 쿨타임이 없어 보였다.
이자벨이 다시 잠들면 또 깨우면 될 일이었다.
‘신의 흔적 네 개를 더 모으면 변화한다고 했다.’
추측할 수 있는 바로는 신살의 씨앗인 만큼 흔적이 모이면 싹이 트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영구적으로 이자벨의 잠을 없앨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자벨이 잠에 빠지면 다시 너를 찾아오지.”
“막시민, 지금 도움 하나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약속했던 그건가. 말해 봐라.”
“제 능력은 신의 기운을 억제하는 능력입니다. 아까 말한 신이 준 능력이지요.”
“하아……. 그 능력을 내가 얻었어야 하는데 아쉽군.”
애초에 원죄가 없었으면 얻지도 못했을 거다.
너무 아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래서 부탁이 뭐지?”
“저도 방금 알았지만 제 능력은 신의 기운을 경험할 때마다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신의 기운들도 찾아 줄 수 있을까요?”
막시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부탁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네 능력이 성장하면 이자벨의 잠도 영구적으로 치료가 가능하겠지?”
“확답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을까요?”
“그걸로 충분하다. 부탁은 없던 걸로 하지. 다른 부탁을 해라.”
부탁이라면 한 가지 있기는 하지.
막시민은 누가 뭐래도 최강의 검사.
그런 사람에게 부탁할 건…….
“능력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능력을 사용하러 오실 때마다 제게 검을 가르쳐 주었으면 합니다.”
“검을?”
그는 내 허리춤에 찬 검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들어주지. 나머지 부탁도 지금 할 건가?”
나머지 부탁은 사실 이자벨에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뱀파이어. 그중에서도 직계에 속하는 뱀파이어다.
어째서 신의 저주 같은 걸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직계인 것은 게임에서부터 알아낸 사실이었다.
‘죄악 중 하나인 색욕이 뱀파이어 퀸에게 있다.’
이걸 얻어 내는 게 내 목표.
사실 너무 위험한 일이라 게임과는 달리 목숨이 하나밖에 되지 않는 지금은 포기했던 물건인데 이렇게 이자벨과 엮이게 되면 말이 달랐다.
사이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뱀파이어들의 유일한 가문인 루시펠 가문의 가주를 정하는 왕좌 쟁탈전이 나중에 일어난다.
게임은 세이브 로드가 있으니 매번 끼어들어서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었던 에피소드.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뱀파이어들끼리의 에피소드는 아니어서 흑마법 집회는 물론 여러 조직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자벨은 직계 중에서도 굉장히 고위 서열로 알고 있는데 이번 도움을 기회 삼아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뭔가 윤곽이 잡힐 것 같았다.
“부탁은 잠시 미뤄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계속해서 봐야 할 사이니.”
계획이 세워지고 이자벨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면 부탁해 봐야겠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돌연 이자벨이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이 냄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조금 가까이 와 보실래요?”
갑자기 왜 저러지?
그래도 그녀가 내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순순히 다가갔다.
“아!”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가 감탄했다.
“왜 그러십니까?”
“안젤라. 안젤라의 냄새가 나요.”
안젤라? 안젤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뱀파이어의 존재에 나도 놀랐다.
내 첫 진화 대상이자 내 피를 빨아 간 존재.
그나저나 이자벨이 안젤라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가.’
막시민이 흥미롭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안젤라를 만나신 적이 있나요? 이거, 단순히 냄새만 밴 게 아니라…….”
뭔데 그렇게 말꼬리를 흘리십니까.
“그 아이가 당신을 찜해 뒀군요.”
“찜?”
이건 또 뭔 소리야?
* * *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산에서 하얀 털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쫓는 것으로 보이는 집채만 한 하얀 멧돼지는 이미 온몸에 화살이 꽂힌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다카!”
누군가가 외치자 곧바로 어디선가 얼음으로 된 창이 날아왔다.
푸욱!
끼이이익!
급소에 창을 맞은 멧돼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오늘은 포식하겠어!”
누군가가 기쁜 듯 소리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거대한 멧돼지를 임시로 도축하여 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오늘의 사냥감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큰 규모의 마을은 이 혹독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적응할 수 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가장 앞에서 멧돼지를 쫓았던 근육질의 족장은, 우선 가장 귀한 부위를 마을의 유일한 마법사인 제다카에게 넘겼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대륙인들을 뛰어넘었다고는 해도 마법사 없이는 생활이 반쯤 불가능할 정도로 불편했기에 그를 우대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
족장의 아들이 달려 나오며 자신의 아버지를 반겼다.
이제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그 아이도 혹한의 환경에서 자랐음을 증명하듯 몸이 다부졌다.
한 가지 특이한 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얼굴에 기하학적인 문신이 새겨져 있다는 것.
“오늘은 미샤프를 잡았다! 보이느냐!”
“저도 내년에는 같이 사냥에 나가고 싶어요!”
“하하하! 내년은 무리다! 아직 넌 더 커야 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환경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단단히 살아가는 이들.
그들은 대륙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북부 민족들이었다.
식량이 부족할 때가 되면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제국 입장에서는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이들로 대륙인들은 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 과소평가가 된 모습.
“저게 대족장인가. 예상 밖의 괴물이군.”
누군가가 멀리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기묘한 심장의 고동을 느낀 그는 드디어 자신이 찾던 걸 발견했다.
“분노를 찾았다.”
헤이겔이 족장의 아이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