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막을 수 없는 자
거대한 알현실로 오랜만에 사람들이 모였다.
그 면면들은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로 유명한 제국의 기둥들이었다.
“한창 바빠 죽겠는데 별 거지 같은 놈이 초를 치네.”
언제나 그렇듯 포문은 미누스 모하임이 열었다.
그는 반지들이 가득 끼워진 두꺼운 손으로 연신 금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본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영감님도 날벼락이겠네. 포트리온에서 방금 막 복귀했다면서요?”
“흠…….”
바하트의 반응이나 살펴보려 한번 말을 걸어 본 미누스는 예상보다 더 심각한 바하트의 표정에 짜증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뭡니까. 천하의 대마법사께서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이 속없는 것아.”
바하트는 단 한마디만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미누스도 여기서 도발을 더 해 보았자 얻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목표를 바꿨다.
“우리 재상께서는 이번 사태에 대해 뭐 할 말이 없나?”
“폐하께서 곧 오실 거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헥토르 카자프도 그 말을 끝으로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반응에 답답함을 느낀 미누스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미누스, 그러고 보니 요즘 가문 사업이나 이런저런 일들이 잘 풀린다던데?”
“맞습니다. 아주 순항 중이죠. 그래서 지금 여기 불린 게 열 받는 거고요.”
“갑자기 그리 잘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
“영감님, 남의 사업 기밀을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하! 우리가 남인가? 어차피 겹치는 일도 없는데 속 시원히 말해 봐라.”
“생긴 건 사자인데 말은 꼭 여우처럼 하시는군요, 흐흐.”
“황제 폐하 입장하십니다!”
둘의 대화는 곧바로 끊겼다.
곧이어 무표정한 황제가 한 손에 검을 든 채 걸어 들어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공작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황제는 그런 인사를 무시한 채 상석에 바로 앉았다.
“앉으시오.”
습관처럼 자신의 손에 든 검을 반쯤 뽑았다 집어넣으며 황제가 말하자 그제야 공작들은 자리에 앉았다.
“소식은 전부 들었겠지.”
“예, 폐하.”
헥토르가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습관과 같은 행동을 멈추고 오만한 눈으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그 건방진 놈을 어떻게 해야 좋겠소? 감히 제국에서 찍은 수배범이 버젓이 제국을 활보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짐이 묻겠소. 그 간악한 녀석을 처벌하여 제국의 위상을 높일 신하가 여기 단 한 명도 없소?”
황제의 말을 들은 공작들은 내심 그가 미친 건 아닌가 싶었다.
이미 한번 크게 덴 전적이 있음에도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미쳤을 리는 없고,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을 지라는 소린가.’
황제는 명분이 필요해 보였다.
제국이 무시받지 못할 명분.
아니, 제국이 아닌 황제 본인의 명성을 걱정하는 것이겠지.
바하트는 일단 막시민의 목적부터 고민했다.
우선은 그가 왜 제국에, 그것도 이리 대놓고 들어왔는지를 알아야 했기에.
“아무도 없단 말이오? 왜 말이 없소? 여기 모인 이들이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이들 아니었소? 어째 기둥이라는 자들이 겨우 막시민 크로넬 하나에게 겁을 먹은 것이오?”
황제가 비웃듯 말했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미누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헥토르는 고개를 조아렸으며, 싱클레어는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폐하, 테라핀 사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하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머지 공작들은 내심 바하트가 먼저 나서 주어 안도를 느꼈다.
바하트의 말에 황제가 나른하지만 강렬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알븐 공, 어찌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하시는가? 그대도 대륙 10인 중 한 명일 텐데 그리도 겁이 나나?”
“예. 겁납니다.”
“하하!”
너무나 직설적으로 내뱉는 바하트를 향해 황제가 기가 찬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헥토르가 급히 나섰다.
“알븐 공, 언행이 너무 불손합니다. 어찌 폐하께 그리 못할 말을 구별하지 않고 내뱉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카자프가에서 막시민 크로넬을 막을 것이오? 그렇다면 내 깔끔히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달게 받지.”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그저 알븐 공의 불손한 언행을…….”
“폐하.”
바하트는 헥토르의 말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무시받은 헥토르의 낯빛이 불콰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 바하트 알븐은 대륙 10인이라는 가당치 않은 호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로들렌 마탑의 힘을 전부 끌어오고, 알븐가의 힘까지 가져와도 막시민 크로넬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은 못 드립니다. 물론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하지만 테라핀 사변 때처럼 결국 수많은 인명 피해만 발생하고 놓칠 것이라는 게 제 소견입니다.”
“다른 가주들과 힘을 합쳐도 말이오?”
“상대는 오러 마스터가 되기도 전에 오러 마스터를 이긴 괴물입니다. 테라핀 사변 당시의 구성이 무려 3명의 오러 마스터와 1명의 워록, 그리고 수천 명의 기사들과 병사들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오러 마스터 하나의 실종과 수백에 달하는 죽음뿐이었지요. 그랬던 자가 이제는 오러 마스터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는 클로슈 공과 알븐 공, 그리고 전국 각지에 흩어진 오러 마스터들과 워록들이 있소. 게다가 짐의 곁에는 자비에 경도 있지.”
“고작 막시민 크로넬 하나 때문에 그 모두를 불러들이는 건 득보다 실이 클 거라 판단되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우선은 막시민 크로넬이 왜 제국에 들어왔는지 이유를 듣는 게 먼저라 생각됩니다.”
미누스가 바하트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황제가 비웃었다.
“클로슈 공, 그대도 같은 생각이오?”
“신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싱클레어가 사납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클로슈 공이오. 하지만 나머지 기둥들이 겁을 먹고 꼬리를 말았으니 짐이 강제할 수는 없겠지. 일단 알겠소. 막시민, 그놈에게 제 발로 당당히 들어온 연유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도록 하지.”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황제로 인해 미누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뿐, 회의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황제가 알현실에서 퇴장하자 드디어 미누스가 참았던 속내를 풀었다.
“폐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네. 겁을 먹고 꼬리를 만다고 말하는 걸 보면.”
“미누스, 말조심해라.”
“카자프 영감, 당신도 우리처럼 꼬리 말아 놓고 아닌 척하지 마쇼. 클로슈 영감만 당당할 수 있는 건데 왜 그쪽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요?”
“요즘 잘 풀린다고 기고만장하구나. 어디 네 뜻대로 되는지 보자꾸나. 난 이만 일이 있어 나가 보겠소.”
헥토르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그렇게 되자 남은 인원들도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바하트.”
“왜.”
“내가 듣기로 녀석이 온 게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만나기 위해서라는데 사실인가?”
“뭐요?”
싱클레어의 말에 미누스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바하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바하트.”
싱클레어가 다시 재촉하듯 묻자 바하트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네. 지금은 심경이 조금 복잡하군. 내 따로 알아내게 되면 연락을 보내줌세.”
“알았다.”
바하트마저 떠나자 미누스가 다급히 물었다.
“막시민이 아드리아스를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정확하지는 않아. 그래서 나도 바하트한테 물어본 거고.”
“흐음…….”
“그러고 보니 자네도 아드리아스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혹시 그와 관계된 일인가?”
“저도 모릅니다. 애초에 막시민이 아드리아스를 보러 왔다고는 생각도 못 해서…….”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가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모하임 공작가는 지금이 전성기라 불릴 정도의 세를 구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드리아스의 정보를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그를 어떻게든 같은 편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미누스는 푹 빠진 상태였다.
‘최근에 가문의 일로 바빠서 그의 신변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다. 지금이라도 아드리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해야 한다.’
막시민이 정말로 아드리아스를 찾아온 거라면…….
만약 좋지 않은 일로 찾아왔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미누스의 안색이 굳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지켜야 한다.’
* * *
‘아이스 클러치.’
허공에서 피어난 얼음덩어리가 터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베리얼이 박수쳤다.
“훌륭합니다. 방학 동안 많이 성장하셨군요.”
포트리온에서 복귀한 그는 첫날부터 곧장 나를 보러 왔는데 다행히 그의 기준에는 합격이었던 모양인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아스 학생은 포트리온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니바스 축제도 가 본 적이 없겠군요.”
당연한 소리를.
애초에 니바스 축제에 초대되려면 최소 워록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
워록의 숫자가 많지는 않다고 해도 전 대륙으로 따지면 그 숫자가 꽤 된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다 다를지라도 워록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그렇죠.”
“니바스 축제에 초대되는 마법사는 조수를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그동안 조수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아드리아스 학생이 떠오르더군요.”
“저를 데리고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우리 같은 워록들이야 그저 놀러 가는 것이지만 당신과 같은 초보 마법사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나도 꽤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베리얼의 눈에는 아직 초보인가 보다.
하긴 최연소 워록이면 눈이 높을 만도 하지.
생각해 보니 디에네도 바하트를 따라 니바스 축제에 참가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른 사이드 에피소드인데 베리얼의 말대로 얻을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아 나쁘지 않은 에피소드지.
“그리고 궁금했던 게 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꽤 재밌는 일이 벌어졌던 것 같더라고요.”
“물푸레 기숙사 사건.”
“그것도 그거고…… 카론 디플렌 말입니다.”
카론은 아카데미를 지키기 위해 순직한 걸로 공표가 되었다.
학생들은 전말을 모르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카론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아마 아카데미 관계자들은 카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혀냈을 거다.
‘하지만 역풍이 부는 걸 막기 위해 숨겼겠지. 나쁘지 않아.’
숨겨진다는 건 더 이상 자세하게 파고들지 않고 곧 묻힌다는 것과 같았다.
내가 원하던 방향이라 나름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내가 걸릴 일은 없을 테니.
그런데 베리얼의 입에서 카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괜히 쫄리게 만드네.
“제가 알기로 아드리아스 학생과도 꽤 친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끔 심부름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돈이 없어서요.”
“하긴 아드리아스 학생이 특허로 돈을 벌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교류가 뜸해지더군요.”
뒤를 캔 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과거 행적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베리얼을 보자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아쉽겠습니다. 그런 분이 안타까운 일로 돌아가셔서.”
“제가 힘들 때 꽤 도움을 주셨던 분인데 정말 유감이었습니다. 비록 최근에는 연락이 뜸했지만 도움을 받았던 건 사실이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베리얼이 나를 캐는 저의가 궁금하네. 날 의심하는 건가?
그때 베리얼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손님이 왔군요.”
그러자 그의 말대로 공간이 비틀리며 순식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탑주님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황궁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아드리아스와 할 이야기가 있다.”
바하트 알븐은 급한 표정과 몸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저런 모습은 또 신선하네.
베리얼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기묘한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할 얘기가 남았었는데 급한 건 아니니 양보하겠습니다.”
“고맙다.”
바하트는 곧바로 내게 손짓했다.
“아드리아스.”
내가 그의 손짓을 따라 다가가자 그는 내 어깨를 잡고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이전에 느꼈던 것처럼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며 저번에 보았던 바하트의 집무실로 도착했다.
바하트는 곧바로 의자에 앉아 내게 자리를 건넸다.
“마탑주님, 무슨 일입니까.”
“아드리아스.”
그답지 않게 뜸을 들이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뭔 얘기를 하려고 그래?
“방학 동안에 나갔다 왔다고 들었다.”
“예.”
설마 내 행적이 들킨 건가?
조금 불안해지는 가운데 바하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막시민 크로넬과 연관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나?”
“막시민 크로넬?”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와?
그러나 그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띠리리리리.
바하트의 마법 통신기가 울렸다.
꺼림칙한 눈으로 통신기를 본 바하트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기다려라.”
“예.”
그리고 그가 통신기를 받자…….
―마탑주님!
“무슨 일인가?”
―마, 막시민 크로넬이 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뭐야!”
막시민이…… 아카데미에?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