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본 드래곤
카론은 피를 토하며 엎어진 상태로 일어나지 못했다.
고대 마수의 공격에 내부가 진탕된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아, 안 된다…….”
고대 마수가 남은 언데드들을 전부 쓸어 담고 있었다.
문헌으로는 그저 고대 마수라고만 표현이 되었기에 그저 조금 독특한 짐승일 줄 알았던 게 실수였다.
“안, 돼.”
평생을 바쳐서 만들어 온 언데드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카론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질질 끌어 바닥을 기었다.
“그만해. 돌아와.”
내장이 진탕된 탓에 마나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카론이 눈물을 흘리며 토했다.
마침내 그의 마지막 남은 키메라 언데드가 (끝내) 고대 마수에게 상처를 입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아아…….”
카론은 체념했다.
각혈을 계속할 정도의 부상도, 뼈가 부러져 내장을 찌르는 고통도, 아무 의미 없었다.
그는 삶을 포기했다.
―끼이이아아아.
고대의 마수, 크셰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카론에게 다가가도 그는 미동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대 마수의 봉인을 해제하려 한 게 잘못인가.
아니면 헤이겔이 자신을 압박해서?
아니다, 아드리아스가 나태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원죄에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끼어억.
크셰인이 명치까지 내려오는 아가리를 거대하게 벌리며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카론을 잡아먹으려는 듯한 모습이라 그는 그저 허탈함에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죽을 줄이야.’
순간 주변이 깜깜해졌다.
카론은 크셰인의 아가리가 자신에게 다가온 줄 알았지만 아직 크셰인이 몇 발자국 뒤에 있는 걸 보고, 주변이 어두워진 게 다른 이유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림자?’
거대한 그림자.
카론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흐으으으으.
“허어.”
정체를 확인한 카론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는…….
“카론 디플렌.”
“푸흡. 크으. 아드, 리아스.”
갑자기 곁에 나타난 아드리아스를 카론이 노려보았다.
“죽기 전에 뭐 좀 물어봅시다. 절 거둔 이유가 원죄 때문이었습니까.”
“그 전에 내가 먼저, 물어보마. 저건, 뭐지?”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말도, 안 된다. 너 따위가, 어떻게…….”
거대한 드래곤이 머리에 특이한 왕관을 쓴 채 카론을 내려다보았다.
그 엄청난 박력에 크셰인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 다 죽이면 되는 건가.
“아니. 이 사람은 가만히 둬도 어차피 죽을 거야. 괜히 건드려서 흔적을 남길 수 없지.”
아드리아스의 말에 카론은 죽어 가면서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스승에 대한, 예우가, 겨우 그거냐?”
“스승?”
아드리아스가 자세를 낮추어 카론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비웃었다.
“네까짓 게 스승?”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야박하게, 구나?”
그 말에 아드리아스는 무시하고 몸을 일으켜 카론을 등진 채 크셰인을 바라봤다.
“난 병신이 아니야. 너랑 말장난하자고 여기 온 건 더 아니고.”
검을 뽑아 든 아드리아스가 기대된다는 눈으로 크셰인을 바라보며 자신의 언데드들을 전부 소환했다.
“애초에 원죄를 노리고 나를 건드렸던 주제에 이제 와서 스승 행세를 하는 것도 어이없군.”
“네 이놈, 아드리아, 스.”
그 말을 끝으로 카론은 그대로 엎어졌다.
그에게서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한 아드리아스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그의 명령을 들은 언데드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크셰인에게 달려들었다.
* * *
크셰인의 팔이 길게 늘어났다.
마수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네 개의 팔을 자유자재로 이용한 공격은 꽤 예리했다.
쿠드드득―!
노랑 단풍이 진 나무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내 언데드들은 정예 중의 정예.
쇄액!
콰직!
루도가 괴력을 발휘해 크셰인의 팔을 붙잡고 니켈의 검이 그런 팔을 난도질했다.
―끼이아아아.
예상했던 대로 공격이 잘 먹히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패다 보면 결국에는 쓰러지겠지.
―그립군.
왕관을 쓴 크리브마허가 반쯤 녹아내린 얼굴로 크셰인을 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고대 시대 소속이라 감회를 느끼나 본데.
“크리브.”
―내 이름은 크리브마허 탄. 크리브가 아니다.
“브레스.”
―난 크리브마허…….
“브레스.”
―난 그렇게 쉽게…….
“브레스.”
한숨을 내쉰 크리브마허가 결국 드래곤 하트를 가동했다.
주변의 마나가 일순 크리브마허의 심장으로 모이며 강렬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나는 한때 ‘멸망을 노래하는 용’이라 불릴 정도로…….
“피해라.”
내 명령에 크셰인을 붙잡고 있던 언데드들이 몸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크리브마허의 산성 브레스가 크셰인에게 쏟아졌다.
콰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악!
니켈의 칼질이나 티무르의 주먹에도 멀쩡하게 버텼던 크셰인.
그 단단하고 질긴 크셰인의 육체가 단숨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좀 대단하네.’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드래곤 하트와 탐욕의 왕관 덕분인 것 같았는데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 그 개고생이 보답받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해, 크리브.”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넌 어쩔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잘 쓸 거니까.”
나는 크리브마허에게 뜬 메시지 창 하나를 열어 보았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진화.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 진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 가지 깨달았다.
[본 드래곤(신화)의 진화 가능성 42%]
[진화를 할 경우 6가지의 분기가 존재합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죄악과 관련된 아이템을 언데드와 가까이 두면 진화를 시킬 수 있다.’
아마 크리브마허를 진화시키면 니켈처럼 죄악과 관련된 방향으로 진화가 되겠지.
본 드래곤은 언데드 중에서 최상위 티어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더 진화가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다른 죄악 아이템을 얻으면 나머지 애들도 진화시킬 수 있는 건가.’
솔직히 언데드를 진화시키겠다고 죄악을 모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죄악이 모이는 걸 막아야 하는 게 내 역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그것만이 정답인가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전부 모아 버린다면?’
일단 이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너덜너덜해진 크셰인에게 다가갔다.
“크셰인.”
내가 이름을 부르자 녀석이 반응했다.
고대 시대 때부터 온갖 해악을 저질러 긴 세월 동안 이곳에 갇혀 있던 녀석.
이제는 내 갈락슈르의 먹이가 될 시간이었다.
―끼익.
나무판자가 마찰을 일으키는 듯한 특유의 소리를 낸 크셰인은 다가오는 나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녹아내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크셰인을 향해 오러를 두른 갈락슈르를 최대한 날카롭게 벼렸다.
푸욱!
이미 산성액으로 범벅이 된 크셰인의 피부는 내가 공을 들인 것에 비해 너무나 쉽게 검이 박혔다.
콰직!
두개골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고대의 마수이자 원래였으면 혼자서 잡지 못했을 에피소드의 보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싱겁네.’
게임에서는 그렇게 골치 아프던 적이 이리 쉽게 죽어 버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만큼 지금의 내가 오버 스펙이라는 이야기겠지.
이미 크리브마허 하나만으로도 흑마법사 집회에서 중간 서열쯤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생의 수준은 확실히 아니지.’
물론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나는 규격 외라고 불러도 될 듯싶었다.
―띠링!
[봉인된 검―갈락슈르가 고대 마수의 피를 발견합니다.]
[고대 마수의 피를 흡수합니다.]
갈락슈르가 피를 흡수하자 마치 혈관처럼 붉은 혈조가 생겨났다.
마치 심장이 박동하듯 크셰인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갈락슈르는 이내 혈관의 모양을 따라 금이 가기 시작했다.
콰장!
[봉인된 검―갈락슈르의 1차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낡은 외형이 벗겨지고 백색의 검신이 드러났다.
이전에 벤자민이 대장간에서 얻은 하얀 악몽보다도 새하얗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외형이 변할 줄은 몰랐는데.’
이전에는 그저 낡은 검이었다면 지금은 누가 봐도 평범한 검은 아니게 보일 정도로 급변했다.
[봉인된 검―갈락슈르]
[마나 전도율 145%] [오러 사용 시간에 따라 일시적으로 예리도 상승 (중첩 가능)]
[마수에게 추가 피해] [어둠 속성에 추가 피해]
[1차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봉인되어 있습니다.]
바뀐 외형만큼이나 달라진 성능.
마나 전도율이 올라갈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효과가 붙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두 번째 옵션이 특히 눈에 띄었다.
방금과 같이 크셰인을 상대할 때도 그렇지만 앞으로 만나게 될 적들은 오러 마스터조차 혼자서 잡기 힘든 보스들이 등장할 거다.
그런 괴물들은 당연히 오러를 검에 둘러도 상처를 입히기조차 힘든데 마침 좋은 옵션이 나왔다.
‘한번 실험해 봐야겠는데.’
예리도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나 궁금하네.
갈락슈르의 두 번째 봉인을 푸는 방법은 아쉽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는 첫 봉인을 푸는 방법만 나와 있었기에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나는 언데드들을 다시 역소환했다.
크리브마허는 조금 더 왕관을 쓰게 한 뒤에 진화를 시킬 생각이었는데 니켈 때와는 달리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확실히 높은 티어의 언데드인 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
아마 이 소란이 아카데미 쪽에 들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크리브마허의 브레스가 너무나 파격적인 마나 파동을 일으켰다.
오러 마스터인 수라한 기사학부장은 눈치챘을 수도 있으니 대충 증거만 인멸하고 산을 벗어났다.
크셰인의 시체가 조금 아쉽지만 포기해야지.
그래도 카론이 죽은 알리바이도 있어야 했기에 너무 큰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내 목표는 갈락슈르의 각성이었으니까.’
카론도 없어졌으니 내 정체를 아는 인물은 더 이상 아카데미에 없다.
이제 무사히 졸업을 하는 게 내 다음 목표.
안주할 생각은 없다.
소중한 이들을 모두 지키기 위해서라도 굴러야지.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문득 조카 같던 루나가 떠올랐다.
그녀도 죽을 위험이 굉장히 높은 캐릭터인 만큼 살리기 위해 고민을 해야 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 * *
에반 폰 오를레옹.
아니, 이제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에반이라는 이름밖에 남지 않은 남자는 조용히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뒤를 쫓아 성국에서 사냥개들을 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는 느긋했다.
실력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자신감.
물론 최근에 자신의 실력에 대한 회의감도 느꼈었지만 고작 성국의 개들 따위에게 겁먹을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미 성국에서 나오기 전부터 계획을 세워 둔 에반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신의 의미가 흩어진 지금의 그에게는 유일한 등대와 같은 존재.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 세상을 밝게 비출 진정한 왕.
지금 해야 할 것은 그를 위해 기반을 닦아 놓는 것.
‘그 전에 우선…….’
사사삭.
한참 행복한 고민을 하던 에반은 주변을 감싸는 수많은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시하고 걸어 나가던 그때,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걸어 나왔다.
“에반.”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비루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노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제프리 경, 오랜만에 뵙는군요.”
에반이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무기를 꺼내 들고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
“이번 임무를 통해 깨달음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나올 수밖에 없었죠.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는 모두 구도자이지 않습니까?”
“깨달음을 성국에 베풀면 안 되었던 건가? 자네가 이렇게 나오면 어떤 파장이 있을지 정말 모르고 행동했다는 게야?”
“당신은 모릅니다. 이 깨달음이 어떠한 건지.”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음을 확인하자 결국 검을 뽑았다.
제1 이단 심문관이자 오러 마스터, 제프리 암스테드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에반, 혹시 타국에서 영입 제의가 온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안심하십시오.”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에반을 보며 제프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수하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
“내가 좋지 않은 시기에 왔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라질 듯 건조한 목소리.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하하…….”
믿기지 않아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에반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닭살이 돋는 자신의 팔을 애써 숨겼다.
“누구냐.”
제프리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남자가 관을 어깨에 진 채 서 있었다.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제프리도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늙은이, 오랜만이군.”
제프리는 결국 한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막시민 크로넬. 네가 대체 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