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고대 마수와 봉인
콰드드득!
검에 걸린 크셰인의 사념체가 뜯겨 나갔다.
―끼이아아아악!
참고로 이 검은 형체의 달걀귀신 같은 놈들이 크셰인의 사념체였다.
크셰인의 사념체는 어두운 환경에서만 나타났기에 일부러 창문을 가려 놓았는데 역시 곧바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범한 공격은 통하지 않지.’
전날 금빛 단풍의 숲에서 미리 준비해 온 특별한 재료를 내 손과 검에 접착해 놓은 상태였다.
“이건 뭐야!”
나에게 도움을 받은 유리히가 소리쳤다.
근데 유리히도 조사 인원에 포함될 줄은 몰랐는데.
‘원래였으면 바하트나 베리얼이 맡았어야 할 몫이 분산된 건가?’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건 마법적인 현상이 아니기에 바하트와 베리얼이라고 해도 딱히 손을 쓸 수 없는 일이라.
애초에 금빛 단풍의 숲에 있는 그 존재를 모르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아드리아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래서 내가 먼저 온 거였는데 설마 따라올 줄은 몰랐다.
“저도 잘 모릅니다. 보시는 것처럼 이상한 놈들이 튀어나왔고, 누가 봐도 몬스터 같아 때려잡았죠.”
“그럼 이게 학생들을 죽인 원흉인가?”
디에네가 뒤늦게 사념체가 죽은 바닥을 훑었지만 애초에 사념체인만큼 내 공격에 타격을 입고 흩어진 후였다.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그들은 이내 일단은 나가기로 했다.
“아드리아스, 네가 잘난 건 나도 알겠는데 일단 나와. 아직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너무 급했어.”
“그래.”
굳이 여기서 티격태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미 먼저 도착해서 셋이나 되는 사념체를 쓰러트린 후라 상관없기도 했고.
‘남은 사념체는 고작해야 얼마 안 되겠지. 어쩌면 다 잡았을 수도 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순간.
콰장창―!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일행들은 당황한 눈치로 서로를 둘러보았고, 기숙사 앞에 서 있던 경비들도 놀란 기색으로 주변을 훑었다.
‘설마?’
벌써 두 번째 페이즈라고?
첫 페이즈는 물푸레 기숙사, 그리고 점차 범위가 넓어지며 끝내는 마법학부 부지 전체에서 소동이 일어나는데…….
‘너무 빠르다.’
나는 곧바로 디에네에게 물어봤다.
“조사 같이하기로 한 교수들은 어디 있죠?”
“오후 강의 끝나고 저녁에 보기로 했어. 내가 지금 연락해 볼게.”
연락 따위는 상관없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카론의 위치.
이 정도 진행 속도라면 아마 지금도 금빛 단풍의 숲에 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왜 이리 급하지? 카일러의 흔적도 내가 다 없애서 급할 이유가 없을 텐데.’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
카론이 급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저거 봐!”
유리히가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의 유리창은 전부 깨져 있었는데 신기한 건 내부에 있는 물건들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또 누가 실험을 하다 실수했나?”
저것도 이상 현상 중 하나다.
지금은 아마 마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데오스에게 조금 더 뽕을 뽑아 먹으려던 내 계획이 틀어졌다.
‘카론이 무리해서 활동하는 이상, 계획을 바꿔야겠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에피소드 클리어를 앞당겨야겠다.
지금의 내 힘이라면 굳이 파티를 꾸릴 필요도 없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터.
“디에네, 전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 무슨 약속? 갑자기?”
“저녁에 뵙겠습니다.”
나는 의문이 가득 담긴 디에네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금빛 단풍의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노란빛의 잎사귀를 매단 나무들 사이로 카론 디플렌이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작은 배낭을 든 채 주변을 잘 살펴보더니 어느 나무의 앞에 섰다.
후드득.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뿌린 후,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그린 카론은 이내 다시 몸을 일으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배낭의 무게를 재 보며 전율을 느낀 카론은 며칠 전에 왔던 연락을 떠올렸다.
‘카론 디플렌, 요즘 아카데미 생활은 어떤가?’
갑작스레 온 연락.
상대는 카론과 그동안 접점이 별로 없었던 헤이겔이었다.
‘요즘 자네의 제자가 꽤 잘나가는 모양이던데?’
‘……그런 것 같더군요.’
‘그에 반해 자네는 요즘 들어 별 소식도 없고, 성과도 없군.’
무슨 말을 하기 위해 갑자기 연락을 주었을까 생각했던 카론은 듣고 싶지 않던 아드리아스의 이야기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책망하듯 말하는 헤이겔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최근에 자네의 제자에게 집회에 들어오는 게 어떻냐는 제의를 했어. 알고 있나?’
‘집회……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도 이제 좀 고였지 않나. 그래서 물갈이를 좀 하려고 말이야.’
불길한 단어 선택에 카론이 침을 삼켰다.
‘물갈이라 하시면…….’
‘요즘 자네 성과도 미미한데 이만 제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건 어떤가?’
대놓고 내뱉는 헤이겔의 배려 없는 말에 카론의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아드리아스를 건드리기 어려워졌는데, 이제는 하다못해 녀석에게 자리까지 빼앗길 수도 있다니.
헤이겔의 말이 진심인지는 몰랐으나 최근 들어 마음이 조급해진 카론에게는 엄청난 위기감을 주었다.
‘성과를…… 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흠. 그럼 올해까지 기다려 보겠네. 그동안 제자 단속도 좀 하고.’
‘알겠습니다.’
헤이겔과의 연락을 반추한 카론은 애써 냉정해지려 애썼다.
최근 들어 뱀파이어부터 시작해서 아드리아스까지 말썽이더니 결국에는 헤이겔마저 간섭해 들어왔다.
원래였으면 모른의 제자인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헤이겔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최근 자신의 성과는 보잘것없고, 아드리아스가 잘나가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스승인 모른마저 아드리아스를 보호하려는 기색을 보이니 속이 답답하던 와중에 이곳을 떠올렸다.
‘고대 마수의 봉인지.’
사실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문헌이었다.
그것도 저자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흑마법 문헌.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한번 조사를 나섰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당첨.”
음습해지는 기운이 점점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봉인을 푸는 의식.
문헌에는 고맙게도 봉인 해제의 방법도 얼추 적혀 있었다.
‘덕분에 편해졌다.’
고대 마수의 봉인을 해제하여 언데드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성공한다면 우선 이 지긋지긋한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헤이겔의 간섭도 무시할 거다.
겸사겸사 건방진 아드리아스 놈도 처죽이고.
“이제 세 곳만 더하면 되는가.”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하고 가 봐야겠다.
봉인 해제를 위해 소모한 마나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며칠에 걸쳐서 풀고 있던 중이었다.
우드득!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무들이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봉인이 풀릴수록 기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확실히 봉인이 풀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물푸레 기숙사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도 이와 연관이 돼 있을 거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흑마법사였으니까.
그렇게 오늘 할당된 마지막 마법진을 새기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 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누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 기척도, 흔적도 없었다.
그는 조심히 주변을 살피고 그가 원래 마법진을 그리려던 장소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마법진을 그려 놓은 상태였다.
“이게 대체…….”
자신이 헷갈린 건가?
이미 했던 곳에 다시 왔나?
아니었다.
자신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알 리는 없다. 그렇다면 봉인이 풀리며 이상 현상이 벌어진 건가?’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카론 디플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카론은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인물을 바라봤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의외의 일들.
상대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네가 왜 여기 있지.”
봉인 해제가 일으킨 환각인가?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아스는 너무나 생생하여 이상 현상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결국 마나 디텍트까지 사용해 보자 상대가 진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나 디텍트를 느낀 모양인지 아드리아스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전 진짜입니다.”
“다시 묻겠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왜라니요. 제자가 스승을 돕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카론은 섬뜩함을 느꼈다.
설마 방금 그려져 있던 봉인 해제 마법진은 아드리아스가…….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알고…….”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어쨌든 전 제 할 일을 마쳤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야겠군요.”
아드리아스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하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부디 열심히 발버둥 쳐 보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냉철함을 잃은 카론이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을 때…….
소름 돋는 감각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우우.
그것은 짐승의 소리와 비슷했다.
주위의 나무들이 순식간에 시들며 생기를 잃고 말라비틀어져 갔다.
설마 싶었으나 카론은 짐작할 수 있었다.
고대 마수의 봉인이 완전히 풀렸다는 것을.
“아아…….”
이내 뒤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무언가의 기척을 느낀 카론이 절망에 찬 탄성을 흘렸다.
크게 착각했다.
저건 언데드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언데드로 만들려면 상대를 죽여야 했지만…….
“괴물.”
자신이 처음 스승을 봤을 때보다 더한 공포가 육체를 잠식해 나갔다.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눈이 멀어 고대의 마수를 너무 얕봤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마수는 전혀 그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우우.
이족 보행, 거대한 네 개의 팔이 삐쩍 말라 보기 흉했다.
거대한 얼굴이 명치까지 늘어져 있었고 사람과 같은 이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것의 몸집은 3m가 넘어 보였다.
카론은 다급하게 자신의 언데드들을 소환하며 외쳤다.
“이…… 아드리아스!”
* * *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똑같았다.
카론은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고대 마수를 혼자서 잡을 수 있을 거라 가정하고 이런 계획을 세웠지만 고대 마수, 크셰인은 녹록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게임에서도 루시아를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블이 파티를 이뤄서 간신히 깨지. 그뿐 아니라 아이비 클레어까지 가세해야 조금은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챕터 보스.’
콰드드득―!
콰가가가가각―!
치열하게 싸우는 카론과 그의 언데드들이 보였다.
원래였으면 카론은 소환에만 성공하고 막상 크셰인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 전에 플레이어에게 덜미를 잡혀 이번 챕터의 중간 보스 역할을 하고 도주.
하지만 카일러의 경우와는 다르게 대체로 도주에 실패하고 죽는다.
‘나도 원래였으면 이번 챕터에서 죽었겠지.’
저 봉인 해제 마법진을 내가 알고 있는 이유는 별거 없다.
내가 카론의 연구실에 혼자 남을 기회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이 크셰인의 문헌을 찾아 저 마법진을 베낀 거였으니.
원래 게임 속에서도 봉인 해제 마법진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고 직접 그리는 건 내 몫이었다.
그러다 카론보다 먼저 들켜 죽게 되고, 그다음에 카론이 걸리는 구조였다.
“아드리아스!”
카론의 절규가 들려왔다.
나는 말라비틀어진 나무 하나를 타고 올라가 카론의 마지막 발악을 구경했다.
그리 원하던 고대 마수도 만나게 해 줬는데 왜 화를 내는 건지.
퍼엉!
“크억!”
언데드들이 거의 다 쓰러지고 크셰인의 한쪽 팔이 일순 거대해지더니 그대로 카론을 치고 지나갔다.
역시 카론도 혼자서는 크셰인한테 비빌 수 없네.
어쨌든 덕분에 카론도 처리하고 일석이조구먼.
슬슬 내 차례가 올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굳이 봉인 해제를 막지 않은 이유.
그 이유는 바로 갈락슈르에 있었다.
‘갈락슈르의 첫 번째 봉인은 고대 마수의 피로 풀린다.’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를 위해 그 지랄을 해 가면서 본 드래곤을 구해 왔지.
내 옆에서 검은 아공간이 열리며 검붉은 비늘이 스쳐 보였다.
“크리브마허.”
밥값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