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레테의 신전
잠깐의 대치 상황 끝에 에반이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이라고 느낄 만큼 생생한 기억 때문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검부터 뽑았다.
“베리 샌더스, 그 반응을 보면 당신도 되살아난 게 확실한 모양이군요.”
에반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 여유롭게 말하며 다가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와 루나가 힘을 합쳐도 에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오러 비기는 충격적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선 에반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죽여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 이상 아까처럼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시선은 이내 루나에게 향했는데 루나는 그런 에반을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컸네요, 루나 펜드래곤. 몇 년 만이죠?”
“친한 척하지 마.”
“죄송합니다. 저 혼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군요.”
그는 나와 루나를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된 기색이 없었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행동 하나하나에 짙게 묻어 있었다.
“일단 질문 좀 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여기가 평범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이곳이 어딘지 두 분께서는 알고 찾아오신 거겠죠?”
“몰라!”
내가 대답하기 전에 루나가 먼저 외쳤다.
“우린 보물 찾으러 온 거야! 이런 곳인 줄 몰랐어.”
“보물? 이런 기괴한 동네에 보물이라……. 하긴, 있을 수도 있겠군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을 테니 당신들이 찾으러 온 보물이 이 현상에 대한 원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찾으러 온 것.
아니, 정확히는 내가 찾으러 온 거지.
‘화룡 크리브마허의 시체.’
이 현상은 절대 드래곤의 시체로 인해 벌어질 일은 아니니 에반의 추측은 틀렸다고 볼 수 있겠다.
‘근데…… 크리브마허는 어디서 죽은 거지?’
이 도시에서 죽은 건가?
분명 이 던전에 입장할 때는 크리브마허가 죽은 장소라는 메시지가 들려왔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전혀 모르겠다.
확실한 건 크리브마허가 이 현상과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심증 정도.
그렇게 내가 대답 없이 서 있기만 하자 에반이 먼저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루나는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온몸으로 경계의 기색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여러분도 이곳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나가는 방법은 아십니까?”
“몰라.”
“그렇다면 서로 협력하는 건 어떨까요? 이 공간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벗어나기 힘든 곳에서 저희끼리 싸워 봤자 좋을 건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루나가 먼저 말하기 전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상호 불가침?”
“친구!”
루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지만 지금은 그녀의 감정을 헤아릴 때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하죠.”
에반은 말이 잘 통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는 루나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루나 펜드래곤, 당신이 이브의 영혼을 강림시킬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아무 준비 없이는 이브조차 저를 이길 수 없지요. 어차피 죽으면 되살아난다는 건 방금 겪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죽어도 죽지 못하죠. 그러니 영원히 고통을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에반은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마무리 지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이 나왔던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계속 회귀를 반복하며 무한 고문도 가능할 터였다.
‘끔찍하네.’
에반이 사라지자 긴장된 몸을 이완시켰다.
하지만 너무 빠른 안도였나 보다.
“친구.”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루나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하지만 그 모습이 무섭다기보다는 어린 조카가 심통이 난 듯해서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예, 루나.”
“왜 그런 거야! 에반은 나쁜 놈이야! 친구도 쟤한테 죽었었다면서!”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예, 한 번 죽어 보니 에반의 실력을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물러섰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정리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루나는 몇 번 웅얼거리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친구니까 봐주는 거야!”
결국 봐주기로 한 건가.
그 모습이 웃겼지만 웃을 상황은 아니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해가 지기 전에 뭐라도 정보를 얻어야 하는 상황.
‘화룡 원정대, 크리브마허.’
우선은 용병 길드를 들러야 했다.
* * *
루나를 달래며 자리를 뜨고 용병 길드를 찾아보았지만 뜻밖의 정보만을 얻게 되었다.
“용병 길드가 없다.”
고대 시대라고는 하지만 생활양식이 별다를 게 없어서 당연히 용병 길드가 존재할 줄 알았던 내 실수였다.
결국 다른 곳에서 정보를 알아보려 돌아다니던 중 정보가 모일 만한 상가 거리에 들어서게 됐다.
“우와, 이 동물은 뭐예요?”
“이름은 룰프야! 노랑 꼬리 돌원숭이!”
상가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들어찬 그곳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다가와 루나와 돌원숭이에게 관심을 가졌다.
루나는 조금 우쭐해진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며 콧대를 높였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겼지만 나는 조용히 속으로만 웃어넘겼다.
“누나! 누나는 어디서 오신 거예요?”
“나? 나는 저 멀리서 왔어! 엔데버라고 알아?”
“엔데버? 몰라요.”
이 시대에는 엔데버가 없었나 보군.
그렇게 룰프를 데리고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과 루나는 뜻밖의 이야기로 말문이 트였다.
“루나 누나는 신전에 안 가도 돼요?”
“신전?”
“사제들은 지금 전부 신전에서 기도드리고 있어요! 우리 아빠도 화룡 원정대에 참가했는데 매일 기도드린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사제님들만 신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신전.
나와 루나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없는 건물이다.
성국도 결국 이름만 성국이지 신전이라는 건물은 따로 없는 제정일치의 사회였기에 생소한 장소.
‘그러고 보니 신전의 고위 사제가 이번 화룡 원정을 의뢰했다고 했다.’
신전에 가면 이 반복되는 도시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곧바로 루나에게 말했다.
“신전에 가 볼까요?”
“신전이 뭐야?”
“아마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소일 겁니다. 사제들도 거기에 모여 있겠죠. 제가 아까 듣기로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레테의 신전 고위 사제가 화룡 원정대를 의뢰했다고 합니다.”
“화룡 원정대? 아까 그 공연?”
생각해 보니 루나에게는 설명하지 않았었다.
나는 곧바로 내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아까 전 과일 가게 주인인 톰슨에게 들었던 정보를 말해 주었다.
“드래곤! 우와!”
이야기를 들은 루나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는 곁에 있던 아이들에게 물었다.
“신전은 어디 있어?”
“저쪽으로 쭉 가면 있어요! 근데 이 아저씨는 못 들어갈걸요? 사제들만 갈 수 있다고 했어요.”
아저씨?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신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어차피 회귀를 하면 다 잊을 것이 뻔하니 무단 침입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아쉬운 건 시간.’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신전이 얼마나 멀리에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출발해 도착한다고 치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는 어려워 보였다.
밤이 되면 검은 연기로 변해 버리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도 없었고, 또 밤을 버틴다고 해도 다음 날이 되면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시간이 없었기에 빨리 가 봐야 했다.
“꼬마야, 이름이 뭐야?”
“핸더슨이요.”
“난 루나야! 그냥 루나. 다음에 또 보자!”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루나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루나는 룰프를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불렀는데 기분이 꽤 좋아 보이는 게 아이들과의 대화로 에반과의 만남은 금세 잊은 모양이었다.
“친구야.”
그러다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선 루나가 뒤를 돌아 아이들이 있던 방향을 보며 나를 불렀다.
“예.”
“해가 지면 저 애들도 검은 연기로 변할까?”
“……그렇겠지요.”
루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 안타까웠지만 애초에 이곳은 진짜가 아닌 그저 던전.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시대의 잔재였다.
“저게 신전?”
주변에 길을 물으며 드디어 도착한 신전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거무튀튀한 건물이었다.
“어디서 오셨을까요?”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검은 로브의 남자가 우리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드러난 그의 외모에 루나가 감탄을 토했다.
“우와.”
창백한 피부에 백색 머리카락과 눈썹, 그리고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이 영롱했다.
그 특이한 외모는 루나와 비슷할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닉스의 사제 분이십니까?”
과일 가게 주인인 톰슨과 비슷한 질문을 하자 내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당신은?”
“호위입니다. 화룡 원정대 소식을 듣고 사제님을 지키기 위해 배정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은 회귀로부터 비롯되었다.
어차피 회귀를 하면 다 잊게 될 텐데 막 질러도 상관없겠지.
입구를 지키던 자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루나에게 손짓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지금은 외부인들을 받을 수 없어 사제님께서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루나와 나는 잠시 눈빛을 교환했고 이내 루나가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으며 신전으로 향했다.
‘걱정할 필요 없겠지.’
그녀는 나보다 강하다.
엔데버 요새에서는 전장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내가 더 강해 보였지만, 결국 일 대 일로 싸우면 나는 그녀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그만큼 초인의 벽은 두껍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나는 점차 노을이 사라져 가는 하늘을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안에 유의미한 정보를 알아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네.
스르릉.
슬슬 준비하자는 의미로 검을 뽑아 들자 신전 입구에 있던 사제가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지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검을 뽑은 채 기다릴 뿐.
‘그래도 신전 주변이라 사람이 많이 없어 다행이다.’
이내 해가 완전히 졌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제가 검은 형체로 변해 갔다.
후웅.
저번과 같이 검풍을 날려 보았지만 의미가 없었다.
마치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듯이 보였는데 의외인 점은 오러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에반은 어떻게 물러나게 한 거지?’
어쨌든 검은 연기가 나를 덮치기 전에 신전 안으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콰앙!
문을 단숨에 부수고 들어간 내부에는 검은 연기에 둘러싸인 루나가 보였다.
“루나!”
당한 건가?
안에서는 해가 지는 게 보이지 않아 불시에 당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애초에 상대하는 법을 모르는 이상…….
‘사람?’
언뜻 안쪽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검은 연기가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에반인가?
하지만 에반과 같은 순백의 갑옷이 아니었는데?
―고오오오.
루나를 감쌌던 연기들이 내게도 몰려들었다.
루나는 마치 잠에 빠진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일단은 물러나려 했다.
―고오.
“너도 있었지?”
출구는 이미 막혀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무작정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날렸다.
그러나 검은 연기들은 아무런 타격도 없이 내게 직진하기만 했다.
“씨발.”
그렇게 검은 연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