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일기토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현재 엔데버 요새는 전투태세에 돌입한 상태.
고로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정적이 감도는 이유는 지금의 긴장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거겠지.
“으으, 짜릿짜릿행!”
그런 분위기를 단숨에 깨부수듯 루나가 우스꽝스럽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누구도 웃지 못했다.
‘나한테는 짜릿한 수준이 아니라 따끔따끔하군.’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성벽 아래에 보이는 저 녀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다.
‘오크 로드.’
오크가 오러 마스터라니.
코미디가 따로 없군.
그러나 비웃기에는 너무도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나를 돌려 안력을 높이니 온갖 문신을 한 거구의 육체가 보였다. 거구인 것에 비해 몸의 근육은 비대하지 않고 전투에만 알맞게 꽉 들어찬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왜 온 거지?”
“설마 저 숫자로 공격을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아니지, 녀석은 오러 마스터야. 지 혼자서도 때려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온 걸 수도 있지.”
“그렇다 해도 다행이네. 우리도 이제 루나 펜드래곤이 있으니 쉽게 밀리지는 않겠어.”
함께 나온 참모들이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글쎄다. 저 기운을 보면 루나도 좀 빡세지 않을까.
힐끗 루나를 쳐다보자 그녀는 그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오크 로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
그때 예상치 못한 소리가 오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오크가 사람 말을 한다고?
“세상에…….”
“오러 마스터인 것도 모자라 말까지 하다니!”
나만 놀란 게 아닌지 주변이 수군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어진 오크 로드의 말은 요새 안의 사람들을 고민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동안은 우리 전사들에게 전장을 충분히 경험시키기 위한 공격이었다. 전투는 곧 오크의 명예. 죽은 오크들의 영혼도 지금쯤 영원한 전투의 땅에 들어갔겠지. 그러니 이제 유예는 끝났다.
오크 로드는 거대한 철퇴를 들어 성벽 위에 선 우리를 가리켰다.
―진정한 선전포고에 앞서 인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는 바이다.
이젠 하다 하다 제안까지 하네.
일단 무슨 제안을 하는지 들어 볼 모양인지, 요새의 사령관인 도슨은 가만히 선 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바야트라의 아들들과 명예로운 결투를 할 자가 있는가! 만약 여기 있는 내 아홉 수하들을 결투를 통해 꺾으면 전사로 인정해 주지. 또한 그쪽의 승자가 더 많다면 침공 전, 하루의 유예를 주마.
오크 로드의 말은 오만했다.
하지만 하루의 유예라는 말이 꽤 달콤한 제안이었는지 참모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대놓고 전력전을 펼친다고 선포했습니다. 어떻게든 하루의 유예를 벌어 다른 요새에 지원 병력을 요청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족장급 오크들이야. 우리 중에서 족장급 오크를 일 대 일로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각하뿐이시라고!”
처음에는 첨예하게 대립할 뻔했던 의견이었지만 결국 상대할 전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도슨이 나섰다.
“솔직히 말하지. 족장급 오크와 싸운다면 하나쯤은 꺾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여덟 마리의 오크는 어쩔 건가.”
그러면서 은근히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루나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모들도 그의 시선을 느껴 루나를 바라봤지만 루나는 여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질없군. 만약 루나 펜드래곤이 나선다고 해도 나머지 일곱 마리는 대체 누가…….”
이왕이면 쉽게 가고 싶다.
우선은 물어보는 게 먼저겠군.
“오크 로드, 이름이 뭐지.”
나는 성벽 난간을 밟고 서서 오크 로드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뒤쪽에 있었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자가 대체 무슨……!”
“다, 당장 그만두고 내려오시오!”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가만히 오크 로드를 바라보고 서 있자, 상대는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인간, 너의 이름부터 대라.
“베리 샌더스.”
―꽤 용감하구나. 뒤쪽에 있는 겁쟁이들과는 달라.
“이름이 뭐냐고. 그냥 오크 로드라고 부를까?”
―내 이름은 알-구르드. 알-파이온의 일곱째 아들이자 알-카이아의 219대 후손이지.
오크들의 저 관습은 똑같군.
물론 그걸 사람의 언어로 오크에게 직접 듣는 건 처음이지만.
“그래, 알구르드. 그쪽이 먼저 제안한 거에 살 좀 붙일까 하는데.”
―말해라, 베리 샌더스.
“대장전으로 결투를 치르는 건 어때?”
내 제안을 들은 알-구르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녀석은 이 요새를 돌파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고, 단지 그놈의 명예나 미신적인 믿음 때문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제안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이겠지.
“샌더스 경, 도대체 어쩌자고 일을 크게 만드는 거요! 우리 측은 결투에 나갈 인재가 없단 말이오.”
도슨의 아들, 필리온이 내게 다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하루의 유예, 필요하지 않으세요?”
“그야 당연한 소리지만 말했듯이 전제 조건부터가 맞출 수 없으니 하는 소리 아닙니까. 우리는 족장급 오크를 상대할 인재가 없소!”
그때 자신의 수하들과 자기들의 언어로 대화를 마친 알-구르드가 말을 걸어왔다.
―좋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결투. 일 대 일의 명예로운 결투만 보장된다면 상관없다.
“좋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뒤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이고!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지,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을 사격해야 합니다. 차라리 적이 방심했을 지금 기습해야…….”
한참 상황을 지켜보던 도슨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건방지군. 네 녀석이 뭐라고 이렇게 나대는지 모르겠다.”
“그런 것치고는 말리지 않더군요.”
“흥, 단지 루나 펜드래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놔둔 것뿐이다.”
그때 루나가 끼어들었다.
“친구, 네가 할 거야?”
“예, 제가 말을 꺼냈으니 제가 끝을 내야죠.”
“저번에도 친구만 재미있는 거 다 해놓고! 또 구경만 해야 돼?”
“루나한테는 제가 오크 로드를 양보하겠습니다.”
“음…… 알았어. 그럼 오크 로드는 내가 잡을 거야. 금방 잡아서 싱싱한 영혼으로 각인시켜 줄게.”
“감사합니다.”
우리의 대화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저들로서는 믿기지 않겠지.
듣도 보도 못한 내가 족장급의 오크들을 혼자 상대하겠다고 하니.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자네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예, 큰 걱정은 마십시오. 만에 하나 제가 진다고 하더라도 루나가 나설 테니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성벽 위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헉!”
누군가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가볍게 착지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경험은 이미 크라테스 산맥에서 이골이 났다.
사체로 메워진 해자를 건너 오크들에게 다가서자 점차 강렬해지는 기운이 몸을 묶었다.
‘명예, 명예, 노래를 불러 놓고 같잖은 짓을 하는군.’
알-구르드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 저릿저릿한 기운은 오로지 내게만 집중이 되는 것 같았는데, 얕잡아 보이기 싫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걸어갔다.
실제로 인상만 찌푸려질 정도이지, 내 몸을 구속할 정도는 아니었다.
‘족장급 오크? 평범한 기사라면 병뚜껑 따이듯이 목이 날아갔겠지.’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이미 겪어 본 그들의 실력.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지금의 내게 딱 맞는 상대다. 좋은 경험치가 되겠어.’
내가 굳이 나선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술의 숙련도 및 마나의 성장.
실전을 겪을수록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스킬 레벨과 마나 양을 위해서라도 족장급 오크와의 결투는 양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기선 제압이었다.
결국 내 목표는 대수림 진입을 위한 오크 군대의 절멸.
그를 위해서라도 적들의 기세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꺾기에는 일기토에서 적장들의 목을 베는 것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다.
‘전쟁은 결국 기세 싸움.’
사기 차이는 숫자의 차이도 뛰어넘는다.
이미 수많은 전쟁사가 이를 증명했지.
실제로 바야트라 요새에서 겪어 보기도 했고.
나는 검을 들어 오크들을 가리켰다.
“시작하자. 누가 먼저 할래.”
* * *
엔데버 요새 성벽 위는 지휘관급 인물들뿐만 아니라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자신을 베리 샌더스라고 소개한 정체불명의 검사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도 한 수가 있으니 저렇게 나선 것이겠죠?”
참모진 중 하나가 필리온을 향해 은근히 말했다.
하지만 그간의 전쟁 경험으로 오크 족장을 상대해 본 필리온은 참모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족장급 오크의 전투력은 쉽게 볼 수준이 아니다.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오크 워리어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만이 족장이 될 수 있으니까.’
오크 워리어만 하더라도 평범한 기사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엄청난 신체 조건과 더불어 오러까지 사용하는 워리어는 태생적으로 기사를 압도했다.
한 가지 인간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검법.
병장기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는 인간이 앞서 나갔기에 조금은 비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족장 앞에서는 무의미하지.’
수많은 오크 워리어 중에서도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것이 족장.
그 위력은 말을 하지 않아도 훤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베리 샌더스를 막지 않은 이유는 루나 펜드래곤을 믿기 때문이었다.
만약 저 검사가 지더라도 대장전으로 치러지는 결투인 만큼 루나가 나서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기에.
‘그리고 아버지도 계시지. 아버지라면 한 마리 정도는 이기실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결투는 갑작스레 시작이 되었다.
콰앙!
족장의 괴력은 무시무시했다.
가히 병장기를 휘두른다고 보기 힘든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아…….”
그 엄청난 위력 앞에서 베리 샌더스는 부평초처럼 흔들렸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미 글렀다는 마음으로 좌절 어린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역시 큰소리치는 자치고는 멀쩡한 녀석이 없지. 하지만 이미 시작된 결투다. 아직 우리에게는 루나 펜드래곤이 있으니 절망할 필요는…….’
그때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도슨이 중얼거렸다.
“이겼군.”
“예? 그게 무슨…….”
“안 보이나? 저 웃고 있는 모습이.”
도슨의 말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전부 안력을 높였다.
그리고 그들은 곧 볼 수 있었다.
비록 복면에 가려져서 하관은 보이지 않았지만 반달을 그리고 있는 베리 샌더스의 눈가를.
푸슉!
―크흐?
정신없이 당하기만 하는 것 같던 베리 샌더스의 낡아 보이는 검이 순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크 족장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옅은 피 안개가 터지며 족장의 몸 곳곳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족장은 자신이 언제 당한 건지도 알아채지 못하고 각혈했다.
―카학!
오크 족장은 얕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문이 담긴 눈빛을 애써 상대에게 보냈으나, 돌아오는 건 검은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날이었다.
서걱!
수급이 베이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리고 성벽 위로 올라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그 과정을 지켜만 보았다.
“저, 저게 대체 무슨……?”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갑자기 이긴 거야! 상대가 오크 족장이 아닌 건가?”
“말도 안 돼. 오크 족장을 저렇게 가볍게 이긴다고?”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뒤로 하고 베리 샌더스, 아니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사납게 웃는 얼굴로 오크들을 향해 검을 까딱거렸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