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 특성으로 최강 네크로맨서-109화 (109/415)

109화. 엔데버 요새

최전방 요새 엔데버.

대수림을 바로 앞에 둔, 외딴 섬처럼 우뚝 솟은 철벽의 요새였다.

그랑디스 왕국에서 나고 자란 사내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보고 자랐을 만큼 그 명성은 흉흉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의 수용소.’

‘하루하루가 생사의 갈림길.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곳.’

‘엔데버 백작령? 엔데버가 백작령이라고? 나는 엔데버라는 이름의 지옥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만?’

물론 소문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부풀려진 말이 많았다.

실제로 평소의 엔데버 요새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 부산물 생산지이며 실력에 자신 있는 용병들이 한탕 하러 모여드는 장소였다.

그랑디스 왕국의 주 수입원이자 삶을 떠받드는 자원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곳인 만큼 엔데버 백작령에서 나고 자란 사내들은 대대로 자긍심을 가지며 세간의 소문을 그저 콧방귀로 날려 버리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왔었다.

“죽어!”

푸욱―!

그런 엔데버 요새는 현재 소문이 도리어 축소되었다 느껴질 정도로 참혹한 광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온 사방이 미처 치우지 못한 사체 더미들이었다.

해자는 이미 녹색과 살색의 덩어리로 가득 메워진 상태였고, 성벽은 붉다 못해 검게 느껴질 정도로 진하게 덧칠해진 피가 진득했다.

―으아아아!

전장은 채 식지도 않은 피로 강을 이루었다.

인간의 비명인지 오크의 함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대지를 가득 메웠다.

“필리온!”

“예! 각하!”

“동문에서의 급보다! 지원 병력을 보내라!”

“각하! 더 이상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습니다! 조금 전, 북문으로 보낸 병력이 전부였습니다.”

엔데버 요새의 주인이자 이 땅을 대대로 지배해 온 엔데버 가문의 가주, 도슨 엔데버는 흉터로 인해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찌푸렸다.

“필리온! 그러면 내가 직접 동문으로 가겠다! 그동안 지휘권을 넘기마.”

“아닙니다, 각하.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닥치고 지휘나 해! 실랑이할 시간도 없다!”

아들에게 지휘권을 넘긴 도슨은 거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동문을 향해 성벽 밑을 내달렸다.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는 오크들은 도슨의 거대한 도끼에 대가리가 터져 나갔다.

퍼억! 팍!

“비켜라!”

거대한 사자후와 함께 우락부락한 오크들이 곤죽이 되었다.

그 압도적인 모습에 함께 싸우는 병사들마저 급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느새 동문에 도착한 도슨은 이미 반쯤 점령당한 성벽 위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은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했던 병사들과 용병들의 시신에 향해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은 말할 것도 없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너부러져 있었다.

“흥, 멍청한 녀석들. 조금만 버티라고 말했거늘.”

말과는 다르게 그의 두 눈은 알 수 없는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 갔다.

이내 거대한 덩치의 도슨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동문 쪽 병사들이 이제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합을 내질렀다.

“와아아!”

“각하께서 오셨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도슨은 강자였다.

그 거대한 덩치는 물론이고 수많은 실전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실력과 마나는 적어도 오러 마스터가 아닌 이상 따라갈 상대가 없었다.

그런 도슨의 등장에 동문을 거의 다 점령했던 오크들도 위기를 느꼈다.

꽤 긴 기간 동안 이어진 전쟁이었기에 이제 그들도 도슨의 위험성을 체감하고 있었다.

“재미 좀 봤나? 그럼 이제 우리 차례다.”

도슨의 도끼가 날았다.

거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한 그의 몸놀림은 순식간에 오크 다섯을 짓이겨 놓고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들을 차례차례 걷어 냈다.

―크훔!

그런 도슨의 앞을 비범해 보이는 오크가 막아섰다.

보통의 오크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큰 오크 워리어였다.

콰앙!

오크가 대검을 휘두르자 도슨이 도끼로 맞받아쳤다.

공격을 막아 내는 소리가 마치 마법이 터진 것처럼 거대한 폭음을 일으켰다.

도슨의 노란빛의 오러와 오크 워리어의 붉은 오러가 번갯불을 튀기듯 반발을 일으켰다.

“꺼져라! 네놈 따위를 상대할 시간이 없다!”

덩치로 비교하면 누가 오크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싸움은 도슨의 기교로 순식간에 끝이 났다.

도슨은 양손으로 들고 있던 도끼를 살짝 틀어 오크 워리어의 대검을 빗겨 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엘보우로 상대를 가격하자 오크의 턱이 박살 나며 휘청거렸다.

퍼억!

콰직!

휘청거리는 오크 워리어는 뒤이은 도끼 공격에 머리가 박살이 나며 무릎을 꿇고 절명했다.

“엔데버 각하! 오크 워리어가 동문의 도르래를 열려고 합니다!”

“말만 하지 말고 움직여라, 이 미련한 놈들아!”

치열한 전투는 이후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간신히 동문을 사수해 낸 도슨이 이번 전투로 새로 새겨진 얼굴의 상처를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잭, 쿠퍼, 다니엘, 조셉…….’

너무나 많은 병사가 죽었다.

몇몇 시신들은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누구인지도 몰랐다.

“각하!”

저 멀리서 도슨의 아들, 필리온 엔데버가 얼굴에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달려왔다.

“지휘를 하라고 했더니 꼴이 그게 뭐냐!”

“지휘할 건 없었습니다. 한 손이라도 거들어야죠. 결국 이번에도 막아 냈지 않습니까.”

“적들은?”

“물러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은 이게 끝인 모양입니다.”

“흥,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우리 생각보다 영악한 녀석들이니.”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도슨이 병사 하나를 불렀다.

“시신들은 최대한 신원을 확인하고 불태워라.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에 정리를 해야지.”

“알겠습니다, 각하.”

이제 한숨 돌렸다 싶은 도슨은 문득 더 이상 못 버티지 않을까 싶었다.

지원 병력이 끊긴 게 벌써 3일 전.

그에 반해 적들의 공세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문제는 오크 로드가 아직까지도 직접 나선 적은 없다는 거지.’

힘을 아껴 두고 있는 것인가.

이유는 몰랐지만 적어도 적이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힘에 겨운 엔데버 요새로서는 절망과 같은 소식이었다.

“각하, 도중에 전보가 전해져 왔습니다.”

“전보?”

“바야트라 요새로부터의 전보입니다.”

필리온의 말은 도슨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병사들까지 두 귀를 기울이게 할 소식이었다. 바야트라 요새는 병력을 지원하는 후방 기지. 그런 곳에서 온 소식인 만큼 기대할 만했다.

“말해라.”

“엔데버 요새로 지원이 온다고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안도의 환호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도슨도 오랜만에 기쁨의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필리온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원이 오면 좋은 것일 텐데, 표정이 왜 그러나.”

“그게…… 지원 병력이 단둘입니다.”

“뭐라고?”

순간 도슨과 병사들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며 애써 머리를 굴려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둘이라고?”

“예, 둘이라고 합니다.”

탄식과 함께 병사들이 주저앉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차라리 듣지 못한 게 나았을 정도로 실망스러운 소식이라 병사들의 절망은 깊었다.

“하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은 게, 지원 오는 둘 중 하나가 무려 루나 펜드래곤이라고 합니다.”

“루나 펜드래곤? 루나? 음…… 아! 이브 밀레니엄의 딸이군!”

루나 펜드래곤은 자신도 승리를 점칠 수 없는 강자.

확실히 위안이 되는 소식이었지만, 전쟁이란 머릿수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아쉽기는 했다.

‘차라리 흑마법사가 올 거면 조금은 약하더라도 네크로맨서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전장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직군 중 하나.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굉장히 희소했으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잘 없었다.

루나가 명성이 자자한 흑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병사들도 루나 펜드래곤의 이름을 듣고 조금 위안을 삼았지만, 내려갔던 사기가 올라갈 정도로 기쁜 소식이 되지는 못했다.

“이놈들아!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다고 저 녹색 괴물 녀석들이 물러나나? 빨리 움직여라!”

자신들과 함께 일선에서 싸우는 용장의 말에 병사들은 간신히 제 할 일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도슨도 이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루나 펜드래곤이 소문만큼만 강했으면 좋겠군.’

그들의 뇌리에 2명이라는 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나와 루나는 션의 쉬었다 가라는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곧바로 오크 로드 본대가 주둔해 있다는 엔데버 요새로 향했다.

션이 내준 군수용 마차로 밤늦게 도착한 엔데버 요새의 풍경은 오히려 밤이어서 다행이라는 감상이 나올 정도였다.

‘심각하군.’

요새 밖에는 처리하지 못한 사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시신의 처리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 이 상황이 그만큼이나 급박함을 드러내는 징표라고 봐도 되겠지.

‘시신을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내몰렸다.’

벌써부터 썩어 가는 몇몇 시신들을 뒤로하며 요새의 뒷문으로 조용히 도개교가 내려가고 입장할 수 있었다.

“환영합니다, 부사령관 필리온 엔데버라고 합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한 사내가 다가와 간결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시선은 루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루나의 명성은 여기서도 통하는 모습이었다.

“루나야! 그냥 루나!”

“베리 샌더스.”

나와 루나도 각자 통성명을 하며 필리온의 안내에 따라 영주 성으로 들어갔다.

마침 늦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고 말하며 우리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는데 일단 전황을 물어볼 겸 그의 제의를 수락했다.

“도슨 엔데버다. 자리는 아무 데나 앉아라.”

식당에 들어서자 몇몇 인물들과 함께 식사 중인 변경백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통성명을 하며 아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의 시선은 오직 루나를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이 루나의 외모에 감탄하는 건지, 유명인을 보게 된 것에 감탄하는 건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게임 속에서도 만나 보지 못했던 인물이네.’

대수림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바야트라 요새에서 갈 수 있는 편한 길이 있었기에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애초에 내 기억상으로 엔데버라는 이름의 요새는 없었다.

“우선 지원을 와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전공을 세우면 세운 만큼 내가 전하께 보고를 올려 알맞은 보상을 얻도록 협력하겠다.”

인사치레와 같은 말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마차로 들어오는 길에 봤더니 상황이 좋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전황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하지. 매우 힘든 상황이다. 사실 자네들이 지원을 온다고 했을 때는 욕이 튀어나올 뻔했어. 우리는 지금 머릿수가 딸리는 형국이거든. 게다가 문제는 상대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거야. 오크 로드는커녕 족장급의 오크도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중이지.”

게임 속에서는 과연 어떻게 해결했을지 궁금하다.

내가 엔데버 요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이 무렵에 요새가 오크들에 의해 사라졌을 수도 있겠군.

‘그랑디스 왕국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왕국이라 자세히 아는 게 없네.’

물론 큼직한 사건들은 알고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몰랐다.

오크 로드의 존재 자체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당연한 이야기인가.

탁탁탁탁.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나눌 때, 밖이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식당 안에 있던 참모들과 지휘관들도 낌새를 느꼈는지 식당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똑똑.

“각하, 급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어느 한 병사가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차 하며 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를 차릴 필요 없으니 보고부터 해라.”

“각하! 지금 요새 밖으로 오크가 다가왔습니다.”

“뭐라? 근데 왜 비상종이 울리지 않았지?”

“그것이, 다가온 오크가 고작 10마리 정도입니다.”

“10마리?”

의문이 담긴 음성이 울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병사의 말은 식당 안을 혼란으로 뒤덮었다.

“오크 로드와 족장급 오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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