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랑디스 왕국
오랜만에 방문한 사과나무 저택은 이전과 달리 활기찼다.
도대체 에이미가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못 보던 창고 건물과 그 주변으로 자잘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그 짐들을 옮기고 있었는데 대충 에이미가 요즘 하고 있다는 일과 연관이 있겠구나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저택의 하인으로 고용된 루핀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 같은 건물을 가리켰다.
“못 보던 건물이네요.”
“에이미 아가씨께서 가주님이 보내 주신 돈으로 지었습니다. 자그마한 사업을 하시려는 것 같아요.”
에이미가 사업이라.
너무나 의외였기에 자세한 내용은 에이미에게 직접 듣기로 했다.
그러나 마침 에이미가 자리를 비워 나는 어쩔 수 없이 응접실에 앉아 루핀이 끓여 주는 차를 대접받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나 전해 들었다.
“요즘 웰튼 자작이 방문한 적은 없습니까?”
“가주님께서 저번에 방문하신 이후에 두 번 정도 왔었습니다. 한 번은 에이미 아가씨께서 없으실 때 방문하셔서 그대로 돌아가고, 그 뒤 일주일 후에 다시 한 번 방문하여 차 한 잔을 대접받고 돌아갔습니다.”
내가 저택에 다시 방문한 지 꽤 시간이 되었으니 생각보다 많이 찾아오지는 않았군. 어쩌면 내 생각보다 황제가 내게 주는 관심이 적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1시간 정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드디어 에이미가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에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서서 갑작스레 방문한 나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왔어.”
“왜 연락도 없이 온 거야. 깜짝 놀랐잖아.”
에이미는 들고 있던 짐들을 대충 정리하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밖에 저건 뭐야?”
“장사 좀 해 보려고.”
“하는 건 좋은데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내 물음에 에이미는 잠시 쭈뼛대다가 말했다.
“나, 우리 영지 다시 되찾고 싶어.”
“우리 영지? 크롬웰 영지 말하는 거야?”
지금은 제국에 귀속되어 황제 직할령이 된 땅이었다.
솔직히 우리가 크롬웰이라는 성을 아직까지 사용하는 것도 웃긴 상황.
아마 저번 논공행상 때 바하트나 싱클레어가 나서지 않았다면 내 작위는 강등당하고 그대로 몰락했을 거다.
‘지금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
저번만이 문제가 아니라 영지가 없는 귀족인 이상 몰락의 길은 예정되어 있었다.
몰락 귀족이 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영지가 있거나 수도의 직위가 있어야 했는데 지금의 나는 학생 신분.
여러모로 작위의 강등을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도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그리고 이왕이면 오빠한테도 도움이 되고 우리 가문에 자긍심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서 돈을 벌려고.”
“크롬웰 영지는 백작령이야. 한두 푼이 아닌 건 알지?”
“그래도 집에서 오빠가 보내 주는 돈만 받아먹으면서 빈둥대는 건 싫어. 뭐라도 하고 싶어.”
거 참, 누구랑은 다르게 생활력이 좋은 아이였다.
어떻게 남매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태어났었을까.
에이미는 말을 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살 살폈는데 내가 뭐라 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일단은 내가 돈을 보내 주고 있으니 결국 내 돈으로 사업을 하는 셈이었으니.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봐. 어차피 네 말대로 우리한테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 쓸 데가 어딨냐. 그러다 잘되면 좋은 거지.”
솔직한 말로는 강화 특성이 생긴 이상 돈도 중요해졌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강화 특성보다 에이미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정말? 화 안 났어?”
“화가 왜 나. 그것보다 장사한 지 꽤 된 거 같은데, 좀 어때?”
“잠시만 기다려 봐.”
에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장부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그걸 내게 건넸다.
“확인해 봐.”
“자신 있나 봐? 이렇게 떳떳하게 내주는 걸 보면?”
내 말에 도리어 웃음으로 화답하는 에이미를 보자 살짝 기대가 되었다.
솔직히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얼마나 자신 있으면 저러는 거지?
에이미가 건네준 장부를 슬쩍 확인해 보자 처음에는 아담한 숫자들로 시작한 장부가 갈수록 액수가 커지며 생각보다 매출을 많이 올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이익이 크지는 않은데 덩치는 착실하게 키우고 있군.’
이런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 에이미가 이 정도의 성과라면 재능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순이익은 포기하더라도 과감하게 덩치를 키우는 판단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고개가 저어졌다.
‘이러다 망하면 폭삭 망할 텐데.’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에이미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자 괜히 나쁜 말을 하기는 싫었다. 게다가 에이미한테는 나라는 치트키도 있었다.
나는 장부에 끼워져 있던 펜을 집어 장부 한구석에 무언가를 메모했다.
“오빠 뭐 해?”
“그냥. 시간 날 때 한 번 봐 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대충 예상한 듯한 글이었다.
마치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조언을 해 주듯 적은 메모기에, 이를 활용하는 건 온전히 에이미의 몫이었다.
‘나도 미래에 일어날 일들만 알지, 이걸로 어떤 매물들이 잘 팔리고 못 팔리게 될지는 모르니까.’
그리고 이왕 에이미에게 정보를 넘긴 김에 다달이 보내는 돈도 늘려야겠다. 나중에라도 잘 되면 지금의 결정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지금 읽어 봐도 돼?”
“어. 마음대로 해.”
꽤 적을 내용이 많았기에 조금 오래 걸렸다.
저번에 미누스 모하임을 만나고 했던 이야기들도 꽤 겹쳤는데, 한 번 했던 이야기라 그런지 이번에는 좀 더 정리해서 옮겨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적은 내용은 에이미가 바로 확인했다.
잠시 여동생의 얼굴이나 보고 떠날 생각으로 온 건데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되네.
“이거 정말이야? 어디서 난 정보야?”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것 같던 에이미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지더니, 이내 심각해졌다. 결국 다 읽어 보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생각한 건데? 믿고 안 믿고는 네가 판단할 문제니까, 잘 생각해 보고 골라서 써먹어.”
“……역시 우리 오빠는 천재였어.”
다시 한 번 내가 적은 메모를 들여다보며 에이미가 중얼거렸다.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적은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원인으로 결과를 유추해 낸 듯이 작성하였기에 꽤 그럴듯하게 보일 거다. 실제로 공작인 미누스조차 내 말을 듣고 감탄했었으니.
‘예를 들자면 이제 곧 일어날 북서쪽 영지들의 신경전. 발단은 최근 벌어진 가뭄으로, 원래였다면 적당한 강수량으로 수로가 이어졌을 곳이지만 올해에는 그러지 못했지. 그 덕분에 수로를 둘러싼 신경전이 심해진다. 이건 단순히 영주들 간의 문제가 아니라 농민들이 직접적으로 맞부딪히면서 나중에는 수로를 둘러싼 영지전까지 벌어지지.’
아직까지는 농민들 간의 작은 말다툼 정도의 수준이지만 몇 달만 있으면 영지전으로 번지게 되는 꽤 큰 사건이다.
이 일을 마치 미리 분석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한 것처럼 정리해 놨으니 읽는 사람으로서는 꽤 그럴듯해 보이겠지. 이후에 내가 말한 대로 되면 더 놀랄 테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중에 이런 사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임을 수십 회차를 해 보았으니 로들렌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은 거의 전부 꿰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에이미에게 적어 준 건 그중에서도 사업에 써먹을 만한 정보들을 추린 거다.
물론 이걸로 어떻게 돈을 만드는지까지는 나도 모르고.
“너무 맹신하지는 말고. 네가 잘 판단해서 써먹어 봐.”
“고마워, 오빠.”
에이미가 상단 사업을 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 에버라스트 상단의 도움을 부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막 자리를 잡아 가는 에이미의 일을 에버라스트 상단이 돕는다면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
‘일단은 복귀하고 한번 방문하기로 했으니, 그때 넌지시 말이나 꺼내 봐야겠다.’
예상치 못하게 에이미의 사업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에이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녀의 열정에 불타오르는 눈빛을 보자 괜히 뿌듯해지는 마음이었다.
* * *
오랜만에 저택에 복귀했으나 금세 나와야 했다.
원래는 며칠 머물다가 갈 생각이었지만 에이미는 내가 메모해 준 걸 분석하느라 바빴고, 결국 할 것도 없는 나는 일찍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빨리 갔다 와서 홀링턴에도 들려야 하니까.’
이왕 에이미를 돕기로 마음먹은 거, 아주 제대로 도와야지.
그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모두 내게 양보한 채 살아왔을 여동생이니 만큼 이제는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돕고 싶었다.
‘이제부터는 좀 긴 여정이겠네.’
바야트라 대수림과 맞붙은 그랑디스 왕국은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대수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였다. 그렇기에 항상 군사들을 육성하는 군사 강국이었는데, 군사 강국치고는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수림과의 접경 지역에 배치가 되어 매일 같이 그곳에서 나오는 마수들과 몬스터들을 막았다.
나도 용병 캐릭터를 플레이 하며 경험치와 명성을 쌓을 겸 자주 방문했던 장소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일단은 그랑디스 왕국까지는 열차를 이용해 갈 수 있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열차를 타고 4일가량을 가자 드디어 그랑디스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국민의 80%가 전투 경험이 있는 군사 강국.
그리고 용병과 방랑 기사들에게는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는 땅이었다.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약속된 보상은 무조건적으로 지불하는 왕국으로도 명성이 높았으니.
“저기도 그대로네.”
말했듯이 게임 속 대부분의 용병 캐릭터로 한 번씩은 방문했던 곳이었기에 처음 와 본 곳이지만 친숙하게 느껴지는 왕국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이 닿는 이곳, 헤이야르 도시는 열차를 타고 오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나는 게임 속에서 이곳에 오면 줄곧 방문했던 여관을 보며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곳까지 열차를 타고 오느라 쌓인 여독을 풀고 다음 날에 대수림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갑자기 들려오는 내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그랑디스 왕국에서 날 아는 사람이 있다고?
“찾았다, 히히.”
말을 건 인물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날 부른 인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었기에.
“계속 아카데미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너무 지루했어. 이제 날 재밌게 해 줘야 돼, 알았지?”
“루나.”
영을 보는 무녀, 3번째 달, 미치광이의 그믐.
그리고 최악, 최강의 강령술사.
루나 펜드래곤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뜬 세 개의 달이 오늘따라 더욱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