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돌파
날이 밝아 오자 모드라스의 탑 앞은 여느 때처럼 강의가 없는 이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야, 앞자리 좀 양보해 주면 안 되냐? 캐롤라인이 오전 강의라 내가 영상 찍어 주기로 해서.”
“나도 찍어 주기로 했거든. 내가 찍어서 너한테도 보내 줄게.”
“그럼 좋고.”
오전 강의가 없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다. 디에네의 경우에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높은 층을 오르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사람이 몰리지는 않았지만, 무려 같은 학년에서 연속으로 20층 도전자가 생기자 이슈가 안 될 수 없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전하.”
“어, 그래요. 좋은 아침.”
조금은 나른한 분위기의 미누스 모하임이 가벼운 복장으로 등장했다.
아드리아스가 10층을 깬 이틀 전부터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던 참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가 거슬리는지 머리를 계속 넘기던 미누스의 곁으로 대너드가 다가왔다.
“전하, 오늘 유노르 후작이 당도한다고 합니다.”
“유노르 후작이? 수련에 미친 양반이 웬일이래.”
말은 그리했지만 미누스의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재미난 일을 목전에 둔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대너드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유노르 후작만이 아닙니다. 3공주 미카엘라와 4황자 오델 그리고 아그니스 마탑주도 온다고 합니다.”
“이야, 무슨 떡고물을 바라길래 그렇게 부랴부랴 몰려온대.”
공작가에 소속된 디에네와는 달랐다.
현재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백작이라는 작위를 지녔지만 유명무실한 수준의 지위.
그렇기에 누구든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는 인재였다.
인재 영입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괜찮은 상황과 조건을 지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유노르 후작은 그저 흥미를 위해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세상사에 관심 없는 양반이니까.”
문제는 나머지 인물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고 장담하지도 못했다.
아마 여기서 20층까지 정복하게 된다면 디에네와는 다른 파장이 제국 내에 휘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나도 슬슬 결정해야 하나.’
미누스는 턱을 괴고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아드리아스가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며 슬슬 20층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스의 행동력과 움직임은 잠깐만 왔다가 다시 돌아가려 했던 미누스조차 아카데미에 머무르게 할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쉼 없이 탑을 등반하는 그의 거침없는 행동은 그저 구경 삼아 보러 온 미누스의 마음을 흔들 정도였다.
‘황제한테 밉보일 것 같지만 처음부터 그런 걸 신경 썼던 것도 아니고. 한번 꼬드겨 볼까?’
마침 자신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조금, 아니 많이 활발한 아이였지만 아드리아스와의 나이 차도 거의 나지 않았다.
공주나 왕자가 그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피를 맺은 혈연만큼 진한 것은 없을 터.
“대너드.”
“부르셨습니까.”
“그레타 좀 불러와.”
미누스의 말에 대너드가 멈칫했다.
그녀를 불렀다는 것에서 미누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대너드가 고개를 숙였다.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어. 되도록 빨리 왔으면 좋겠네. 좋은 건 같이 봐야지. 나 혼자 저걸 보기에는 아깝잖아.”
능구렁이처럼 돌려 말하는 자신의 주인을 보며 대너드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대너드가 미누스의 옆에 뒷짐을 지고 섰다.
“바로 온다고 하십니다.”
“고생했어, 대너드. 아마 한 번에 온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자신과 닮은 성격의 여동생은 굉장한 말괄량이였다.
툭하면 영지 내에서 사고를 일으키고는 했는데, 워낙 기가 세서 미누스조차 제대로 관리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잘됐네, 안 그래도 어쩌나 싶었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개인적으로 저도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기대되네. 이제 아드리아스도 곧 탈락할 것 같으니까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그나저나 대너드 너도 저거 했었지? 20층까지 갔었다면서?”
“부족한 실력 때문에 20층이 한계였죠.”
대너드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외부인들이 도착했다.
그들 면면이 화려하기 짝이 없어서 관람을 하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노르 후작 각하다!”
“미카엘라 공주님하고 오델 황자님도 오셨어.”
“아그니스 마탑주! 그을린 불꽃, 렉시 마홈즈!”
로들렌 마탑이 제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마탑이면 아그니스 마탑은 대륙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기업과도 같은 마탑이었다. 각지에 분점 형태로 아그니스 학파의 마탑을 세운 그들은 오로지 실력만으로 승부를 냈으며 총 마탑주의 자리도 실력 우선이었다.
렉시 마홈즈는 그런 아그니스 마탑의 총 마탑주로 그을린 불꽃이라는 이명과 함께 탑주가 되기 전부터 명성을 떨쳤던 대마법사였다.
이미 네 사람은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인사를 나누었는지 자연스레 다가왔다.
미누스는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했다.
“유노르 후작, 오랜만입니다.”
대놓고 후작부터 먼저 챙기는 그 모습에 공주와 황자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처사였기에 내색하지는 못했다.
제이든 유노르는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초인이었다.
“저보다는 황자님과 공주님에게 먼저 인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유노르 후작이 황제의 자식들을 챙겨 주었다.
아직 약관의 나이밖에 되지 않은 그들은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낸 뒤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이런, 제가 실수했군요. 제가 예의를 어렸을 적에 어딘가에 갖다 팔아먹어서 실수가 잦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카엘라 공주, 오델 황자.”
“아닙니다. 그러실 수 있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하임 공작님.”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갔다!”
“20층! 과연?”
“뭘 과연이야, 깰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20층에 올라갔다는 소리에 인사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모두들 착석했다. 뒤늦게 찾아온 데오스 교장과 두 학부장이 다시 인사를 나누고 아드리아스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뭘 하려는 거지?”
“그러게. 10층 깼을 때처럼 꼼수를 부리려나?”
20층의 보스는 다리가 8개나 달린 말이었는데 그 크기도 마치 거인들이 타고 다닐 것처럼 거대했다. 아드리아스는 20층의 보스에게 들키지 않고 마치 신전과도 같은 기둥이 세워진 방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준비했다.
그리고 10분쯤 지나자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움을 표했다.
“저게 말이 돼?”
“도대체 뭘 한 거야?”
아드리아스는 보스의 발을 묶어 두고 일방적으로 두드려 패고 있었다.
기동력이 가장 강력한 무기인 보스라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메리트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보스의 공격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아스는 마치 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스의 기술들을 예측해 내고 미리 대비한 후에 막아 내었다.
그 모습이 꼭 패턴을 모두 외우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그저 아드리아스가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적절한 대응이었다.
방에 있는 함정과 보스의 특징, 그리고 기믹을 이용해서 보스를 두드려 팬 아드리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20층을 클리어 했다.
얼마나 가볍게 클리어 했는지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게 클리어가 된 건가 제대로 파악도 못 해 환호성을 지를 타이밍을 놓친 상황이었다.
“깬 건가?”
“뭐지?”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아드리아스는 거침없이 층을 올랐다.
잠시의 휴식조차 없었다.
21층.
그 숫자가 보이고 나서야 사람들이 서서히 경악에 물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게…….”
“20층을 깼어……?”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멈추지 않았다.
* * *
“우워어어.”
쿵!
마지막 남은 미노타우르스를 쓰러트리고 검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로처럼 꼬인 길을 되돌아갔다.
‘조금 무리했나.’
아무리 포션발이 있다고는 해도 매 순간이 삐끗하면 그대로 퇴장일 정도로 난이도가 높아져서 온몸의 근육이 긴장된 상태였었다.
피로가 누적된 게 체감이 될 정도.
그래도 하루 만에 20층에서 25층까지 등반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내일이면 26층.
아카데미 최고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
나는 가면서 미리 발견했던 숨겨진 장치를 향해 돌아왔다.
장치가 있는 곳은 화면 공유의 사각지대에 있었기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막시무스는 이 장치를 발견하지 못했겠지. 발견했더라도 어차피 올라갈 수 없었겠지만.”
미로에 숨겨져 있던 장치를 건드리자 미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장치로 미로를 바꿔 주지 않으면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좌로 3번, 우로 2번, 다시 좌로 3번, 위로 1번.’
마치 커맨드를 입력하듯 장치를 움직였다.
장치를 움직인 만큼 미로가 변형이 되었는데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졌을 거다.
“이거 알아내려고 노가다 엄청 했었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그때는 그저 게임을 즐기기 위해 했던 일이 이렇게 또 도움이 되었다.
사실 즐긴 것도 아니지. 그야말로 극한의 노가다였으니.
장치 한 번 만지고 계단하고 연결됐는지 확인해 보고, 다시 돌아와 장치 만지고를 계속 반복한 끝에 저 커맨드를 알아낸 거니 얼마나 오래 걸렸겠는가.
‘그나저나 밖은 지금쯤 난리가 났겠네.’
어쩌면 디에네의 경우보다 사람이 많이 몰렸을 수도 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내가 기록을 경신한 셈이니.
그것도 가벼운 기록이 아니라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후로 최초, 최고 타이틀이다.
‘미리 생각은 해 두고 있어야겠어.’
게임 속에서도 모드라스의 탑을 정복하고 나면 항상 주위에서 피곤하게 굴었다.
가문이 쟁쟁한 캐릭터들은 그런 경향이 덜했는데 루시아나 루이스로 플레이 했을 때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다녔었지.
하지만 나는 백작이었다.
어엿한 귀족인 만큼 파벌에 속해 있지 않으면 주변에서 물어뜯을 게 눈에 훤했다.
‘황제는 적이니 될 수 있으면 공작들 중 하나를 이용해야 하는데.’
지금의 내 작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영지도 없는 백작이 무슨 백작이냐, 명목상 백작이지.
하지만 이 능력을 보고 내게 접근하려는 세력들이 반드시 있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변경백이 아니라는 사실인가?’
만약 크롬웰 가문이 변경백 가문이었으면 생각만으로 고개가 저어진다.
의무와 책임은 큰데 돌아오는 건 명예뿐인 직책.
물론 이 시대에 명예란 굉장히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개인적으로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성가시기만 했다.
변경백 중에서도 북부 변경백인 패트릭 바그라스 백작은 천생 군인이라 아마 자신의 지위에 만족할 듯싶었지만, 나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은 줘도 안 가질 직위가 변경백이었다.
“슬슬 자리를 깔아 볼까.”
나는 잠자리를 펼쳤다.
혼자서 자는 거라 불안했지만 그래도 알람 마법진을 주변에 설치해 놓아 걱정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디에네랑 했던 내기도 이겼으니 뭘 부탁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지금쯤 디에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내일이면 30층까지 깨고 31층에 올라갈 수 있을 터.
30층은 반드시 깰 거라 예외는 없고, 관건은 31층.
‘가늠이 되지 않기는 하는데…….’
만약 깬다고 해도 보상이 주어지는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일이면 풀릴 의문이긴 했다.
‘근데 31층은 화면에 안 나오지 않나?’
그동안은 은연중에 보여진다고 생각되어 조심해 왔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31층은 화면으로 공유가 되지 않는 층.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흑마법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