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모이는 관심
싸늘한 정적이 모드라스의 탑 앞을 감쌌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새하얀 빛이 화면을 뒤덮었을 때, 긴장된 분위기는 최고조를 찍었다.
꿀꺽.
누군가의 목울대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이내 화면이 다시 탑 안의 모습을 비추자…….
“허허…….”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을 기점으로 모여 있던 관중들은 폭발했다.
“와아아아!”
“저게 말이 돼? 아니, 진짜 말이 되냐고!”
“직접 눈으로 봤잖아! 진짜 미쳤다, 미쳤어!”
사람들이 비명과 아우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화면을 향해 시선을 돌려 웃음을 지어 보이자 절정에 치달았다.
“아아…….”
누군가가 실신을 하며 쓰러져 버리고 이내 들것에 실려 나갔다.
“정말 아드리아스 선배답네요.”
관람을 하고 있던 루시아가 중얼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이미 묘한 열기와 흥분이 엿보였으며 두 볼은 짙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저건 인정할 만하네.”
마침 함께 있던 디에네가 여유로운 척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디에네를 따라 옆에 붙어 있던 유리히는 디에네의 말에서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디에네가 초조함을 보이는 게 얼마 만이지.’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기에 아드리아스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유리히의 기준에는 조원 전원 생존으로 10층을 깬 것보다 디에네를 동요시킨 게 더 대단하게 보일 정도였다.
“디에네, 괜찮겠어?”
은근히 장난기가 돋은 유리히가 음흉한 표정으로 묻자 함께 있던 루시아와 비비안이 디에네와 유리히를 돌아봤다.
“괜찮겠냐니?”
“너희 내기했다며. 만약에 아드리아스가 이기면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내기는 내기니까 소원을 들어줘야지. 그리고 아직 10층 깬 거야. 아드리아스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아직까지는 내가 이기고 있다고.”
유리히도 내심 아드리아스가 20층을 깰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디에네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약에 아드리아스가 이겨서 이상한 요구를 해도 들어줄 거야?”
“ㅁ, 뭐? 무, 무슨 이상한 요구?”
이야기가 흐뭇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루시아가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둘의 이야기를 들었고, 반대로 비비안의 얼굴은 점차 굳어 갔다.
“에이, 이미 알 거 다 아는 아가씨가 왜 그러실까?”
“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아직까지는 내가 승산이 높다니까? 왜 자꾸 아드리아스가 이긴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당황한 디에네의 모습은 신선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이라 사람들의 이목이 디에네에게 집중되었다.
“히히, 농담이야. 나도 우리 디에네가 질 거라고 생각 안 해. 으이구, 우리 귀여운 디에네.”
디에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한 유리히가 디에네를 끌어안았다.
루시아가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손가락 사이를 벌려 빤히 그 모습을 보았고, 비비안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로 인해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드리아스……, 처음을…… 뺏기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토너먼트의 우승자이자 아카데미의 42년 전 기록을 깬 디에네와 토너먼트 준우승자인 비비안, 그리고 3학년 중에서 천재라 불리며 두각을 드러내는 루시아가 모두 함께 모여 있으니 외부인들의 시선도 당연히 그쪽으로 몰렸다.
그들 사이에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던 아카데미 교장, 데오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번 세대는 정말 인재들이 많군요. 이게 다 로들렌 제국의 복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전 저기 몰려 있는 아이들보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더 높게 쳐주고 싶군요.”
입을 연 이는 기사학부장인 수라한이었다.
마침 아드리아스에게 개인 교습을 해 주고 있던 베리얼도 자리해 있었기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수라한을 지켜보았다.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저들은 이미 떡잎부터 남달랐습니다. 그러니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요. 하지만 아드리아스는 다릅니다. 물론 토너먼트 준우승자인 비비안 벨로칸 학생도 예상치 못한 성장이지만 과연 아드리아스 학생만 할까요. 그의 기록부를 보면 어떻게 저리 성장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두각을 드러낸 건 작년 2학기, 그것도 지금과 같은 활약이 아니라 포션으로 인한 명성이었죠.”
데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아드리아스와 면담을 해 보아 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실감한 사람 중 하나였기에.
그때 옆에서 다른 인물이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에 잘됐군. 그 녀석에 대해 더 말해 줄 수 있나.”
헥토르 카자프.
현 로들렌 제국의 재상이자 카자프 가문의 가주.
4개의 기둥 중 하나라 불리는 카자프 공작이었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다른 공작들과는 달리 친황제파로서 대대로 황실에 충성을 다해 온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카자프 공작은 길게 기른 자주색 올백 머리를 목덜미까지 늘어트리고 습관적으로 머리를 꼬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작년 2학기 때, 문득 에버라스트 포션을 발명하더니 그 이후로는 묘한 소문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매일 같이 운동을 하는 괴짜 마법사로 유명했다고 하죠. 물론 그 운동량이 평범한 기사학부 학생의 수준이라 유명해질 만했죠. 마법사가 그리 운동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니.”
“흠, 그럼 그때부터 특이체질인 걸 눈치챘던 모양인가 보군.”
“본인에게 직접 듣기 전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어이, 카자프 영감. 여기까지는 웬일이십니까? 국정을 살피느라 바쁘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때 껄렁거리는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미누스 모하임 공작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모하임 기사단의 부단장, 대너드 슬레이가 있었다.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모하임 공작은 꽉 끼는 소매를 걷으며 자신의 두꺼운 팔뚝에 그려진 문신을 드러냈다.
“미누스 모하임.”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궁금해서 오신 거요? 키야, 양심이 있으면 그런 짓도 못 할 텐데. 아무리 나라도 이건 고개가 저어지네.”
“쓸데없는 참견이다. 나야말로 신기하군. 영역 밖으로는 나올 생각도 없던 녀석이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먹이 냄새라도 맡은 거냐.”
영역 짐승에 비유하며 은근히 돌려 까는 헥토르의 말에 미누스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영감, 같은 올백 머리라고 영감이랑 같은 취급을 하면 곤란하지. 난 하이에나가 아니거든.”
미누스와 헥토르 사이에서 신경전이 오갔다.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미누스와는 다르게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헥토르였지만 전혀 밀리는 기색 없이 덤덤하게 미누스의 기세를 눌렀다.
점차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헥토르의 호위 기사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헥토르가 손을 저었다.
“됐다. 어차피 볼 건 다 봤으니 이만 돌아가 봐야겠군.”
“조심히 가쇼. 누구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특히 뒤통수 조심하고.”
미누스의 말을 무시한 헥토르 카자프는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런 그를 보며 이죽거린 미누스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뭐야, 벌써 10층 깼잖아. 대너드, 왜 이렇게 늦게 부른 거야.”
“죄송합니다. 도련, 아니 가주님.”
미누스는 넉살 좋게 헥토르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 앉고는 교장인 데오스에게 물었다.
“저거 녹화본 따 놨죠?”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지금 좀 부탁해요. 어차피 이제 막 10층을 깨서 한동안은 휴식하고 있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부탁을 한 미누스는 주먹으로 턱을 괴고 화면으로 보이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로들렌에 슬슬 새로운 바람이 부나? 재밌어지겠어.”
* * *
11층 이후부터는 급격히 올라간 난이도로 인해 조금씩 탈락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조원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미 디에네의 조를 제외하고는 2위는 따 놓은 당상이기도 했고, 전원 10층 통과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크으, 아쉽네요. 나가서 뵙겠습니다.”
그림자 자칼에게 당한 조원 하나가 탈락하며 드디어 나 혼자만이 남았다.
현재 내가 있는 층은 14층.
엑스트라치고는 높이 올라오긴 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내 시간이지.’
이왕이면 다 같이 올라가는 게 나도 좋았기에 마음대로 날뛰지 않고 최대한 조원들을 배려하며 행동했다. 실제로 전생의 기억도 살아나며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되었다.
‘그래도 답답했던 건 사실이다.’
달려드는 그림자 자칼을 단숨에 베어 넘기고 윈드 커터로 마무리 지었다.
마나의 효율로 따지면 검풍이 더 위력적이었지만 이왕이면 마법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마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이내 모든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14층이 클리어 되었다.
몸의 상태는 최상에 가까웠다.
함께 했던 조원들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아예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어서 컨디션 유지에는 도움이 되었다.
‘바로 올라간다.’
지체할 이유가 없다.
나는 곧바로 15층으로 올라갔다.
15층, 16층, 17층을 넘고 18층을 클리어.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었다.
내가 현재 보유한 기술 중에서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 것도 없었기에 마나 소모량이 마나 회복량을 따라잡지 못해 항상 마나는 가득 차 있었다.
“포션을 빨아 볼까.”
마나와는 별개로 육체의 피로는 누적되어 쌓여 갔기에 도핑을 했다.
에버라스트 포션과 회복, 재생 포션으로 금세 피로를 회복했다.
19층.
게임으로 익힌 몬스터의 약점과 층마다 존재하는 지형적 특성, 그리고 함정 등을 이용해 조금 시간은 걸리더라도 결국 상처 하나 없이 클리어가 가능했다.
‘이제 슬슬 긴장해야 할 때네.’
20층.
보스 플로어.
긴장은 하되 깨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 목표는 30층.
30층에도 보스가 존재하는 만큼 20층에서 고전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밤이었다.
일단은 잠을 자고 다음 날 20층 등반을 할 생각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재능: 원소 마법(범재)의 진화 가능성 100%]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원소 마법 재능은 어느새 진화 가능성 100%를 달성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진화시키고 싶었지만 진화로 인해 생기는 몸살을 감당하면서까지 30층에 오를 자신은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30층까지는 바짝 긴장을 하고 실수를 줄여야 했다.
‘게임에서도 30층까지 깨려고 세이브 로드를 몇 번이나 했는지.’
단 한 번도 한 번에 깬 적이 없었다.
적어도 네다섯 번은 불러오기를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그때의 캐릭터들보다도 하이스펙이었다. 아마 내가 지금의 디에네를 플레이 했어도 공략법을 전부 알고 있으니 한 번에 깰 자신이 있었다.
단 하나.
내가 지금까지 플레이를 해 보며 클리어 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31층.’
30층을 최초로 클리어 하면 나오는 히든 스테이지.
설립자인 모드라스를 제외하면 알고 있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숨겨진 공간이었다.
30층만 클리어 해도 모드라스의 탑 정복 보상은 나온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 몇 번이나 불러오기를 하며 31층을 깨 보려 했지만 도저히 클리어가 불가능했던 스테이지였다.
애초에 깨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펀칭머신으로 주먹의 힘을 측정하는 것처럼 실력을 확인하는 느낌의 스테이지였기에 포기도 금방이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