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진화 그리고 제안
“혹시 여기에 분홍빛이 감도는 단발머리 여자가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응? 분홍 단발머리? 조금 전에 마차 역으로 가는 것 같던데?”
“감사합니다.”
아드리아스는 루시아의 소식을 듣자마자 뒤를 쫓고 있었다.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라도 루시아를 만나 대화부터 해야 했다.
“하아.”
뛰면서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흑마법의 진화로 인한 부작용이 점점 심해져 몸살과 함께 두통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그러나 루시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마차 역을 향해 달려가던 아드리아스는 마침 저 멀리 보이는 마차 역에서 마차에 탑승하고 있는 루시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시아!”
거리가 꽤 멀어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 출발하는 마차를 보며 아드리아스는 지나가는 마차를 붙잡아 탔다.
“저 마차 뒤 좀 쫓아주세요.”
다행히 늦지 않게 뒤쫓을 수 있었다.
루시아의 마차를 따라가면서도 열에 시달리는 아드리아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떤 행동이 나비효과가 된 거지? 루시아가 자퇴를 하는 건, 아니 플레이어블 모두 통틀어서 자퇴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아드리아스가 재촉한 탓인지 마차의 속도를 높여 점차 상대의 마차를 따라잡고 있었다. 상대도 뒤따라 붙는 마차가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움직임이 묘했는데 이내 서서히 속도를 줄여 우리와 마주 보게 되었다.
“뭐요? 왜 따라오는 거요?”
상대 마차의 마부가 나란히 달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아드리아스는 마차의 창을 열어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 루시아 에버라스트!”
그러자 목소리가 닿았는지 저쪽의 창도 열리며 루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 선배가 왜 여기에?”
“일단 마차부터 멈춰!”
마차가 달리는 소리에 대화를 하기가 어려웠다.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를 세웠다.
마침내 서로의 마차가 멈추자 아드리아스와 루시아는 각자의 마차에서 내렸다.
“선배가 여긴 왜 계신 거예요?”
“내가 할 말이다. 갑자기 뭐야? 왜 자퇴를 한 거야?”
아드리아스의 물음에도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땅만 쳐다봤다.
그 모습에 아드리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루시아의 팔을 잡았다.
“돌아가자. 아직 안 늦었어.”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근데 전 안 돌아가요. 이미 늦었거든요.”
그녀는 말을 하며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깨에 긴 창을 짊어진 올백의 머리를 한 중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사은품 행사냐? 왜 너까지 여기 있어?”
“당신이 왜 여기에?”
아드리아스와 살렘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라니 하여간 싸가지 하고는. 내가 너한테 당신이라고 불릴 사람이냐?”
“살렘. 그니까 살렘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살렘의 이름이 나오자 그때까지 곁에 있었던 마부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모습을 바꾸지 않고 등장한 탓에 그 인상착의를 알아본 마부들은 황급히 도망가려 했다.
“어디 가려고. 응?”
순간 모습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살렘이 어느새 마부들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아.”
루시아가 믿기지 않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와 반대로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살렘 예디디아는 악인에 가까운 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에게 있어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사람 둘쯤 죽이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살렘은 마부 둘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왜 여기 있는지요.”
“그래! 너 왜 여기 있냐?”
“루시아를 데리러 왔습니다. 혹시 루시아가 자퇴한 게 살렘이랑 연관이 있습니까?”
“그것도 모르는 걸 보면 그냥 따라온 모양이네. 그래. 루시아 에버라스트는 이제부터 내 제자가 되기로 했다.”
최악이었다.
비록 아드리아스에게는 친절한 살렘이었지만 엄연히 흑마법사에 속하는 빌런.
그런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양지로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니지.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지.’
살렘과 동등해지거나 더 강해진다면 그를 배신하고 양지로 나올 수는 있을 거다.
이미 그런 선례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 모든 걸 제쳐 두고서라도 루시아가 살렘의 제자가 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살렘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인체 연성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흑마법 중에서도 꽤나 악랄한 축에 속하는 그런 마법들을 루시아가 익히게 둘 수는 없었다.
흑마법인 건 둘째 치고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마음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
“루시아. 다시 생각해 봐. 살렘은 흑마법사라고.”
“허허. 누구는 꼭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네.”
살렘이 옆에서 이죽거렸지만 루시아는 못 알아들은 듯했다.
두통이 심해지는 가운데 아드리아스는 애써 살렘의 참견을 무시하고 다시 말했다.
“쫓기는 몸이 될 거야. 가족도 편히 볼 수 없게 되고 야외에서도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야?”
“네. 그런 삶이라도 살고 싶어요.”
루시아의 대답에서 아드리아스는 왜 루시아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치료를 위해 살렘의 손을 잡았군.’
잠시 말을 멈춘 아드리아스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말했다.
“루시아. 나 사실 알고 있었어. 네가 아프다는 걸.”
“네? 그걸 선배가 어떻게…….”
“네가 지금 왜 살렘을 따라가려는지 알 것 같아. 하지만 날 믿어 줘. 내가 반드시 네 치료제를 만들어 볼게. 딱 두 달 정도의 시간만 줘.”
“지금까지 알고 있었으면서, 속인 건가요?”
루시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드리아스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동안, 그동안 제가 아픈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행동해 왔던 건가요? 저는 죽어 가고 있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눈시울이 붉어진 루시아에게서 기묘한 마나의 흐름이 흘러나왔다.
주체하지 못한 감정이 마나로 표출되었다.
“루시아. 그게 아니야. 난 그동안…….”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붙잡지 말아요.”
루시아는 간신히 마나를 가라앉히고 살렘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드리아스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순간 엄청난 오한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작용이…….’
그런 아드리아스를 보며 살렘이 물었다.
“뭐야. 너 어디 아프냐?”
아드리아스가 아프다는 말에 돌연 루시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애써 감추지 못한 걱정스러운 기색이 그녀의 표정에 내비쳐졌다.
“살렘. 안 됩니다. 루시아를 데려가게 두지 않아요.”
“뭐라는 거야. 네가 왜 우리끼리 정한 이야기에 왈가왈부하는 거냐?”
“루시아는. 절대 데려갈 수 없어요. 제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열과 두통으로 인해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루시아 에버라스트는 세상을 구하게 될 열쇠 중 하나. 그런 열쇠를 눈앞에서 오염되게 놔둘 수는 없었기에 필사적이었다.
아니,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루시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루시아를 놓을 수 없었다.
“루시아. 부탁이야. 마지막 기회를 줘.”
몸이 안 좋아 보이는 아드리아스의 호소는 애절함을 보였다.
루시아는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었으면서도 그런 그의 외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루시아는 고민하다가 이내 아드리아스에게 다가갔다.
“열 많이 나요.”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아 이마를 만지자 불덩이처럼 뜨거운 아드리아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로 무리하게 자신을 쫓아왔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애틋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돌려 살렘에게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 할 때, 살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제 와서 못 간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
루시아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살렘은 호구가 아니었다.
“루시아 에버라스트. 경고하마. 네가 날 따라오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죽이겠다. 농담이 아니야. 확인해 보고 싶으면 어디 한 번 가보든지.”
살벌한 경고와 함께 살기가 쏟아지며 아드리아스와 루시아의 몸이 굳었다.
마치 살기 자체가 유형화가 된 듯 거대한 뱀 앞에 선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나로 신체를 활성화시키며 간신히 속박에서 벗어난 아드리아스가 루시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살렘과 싸우면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뻔히 망가질 게 보이는 길로 루시아를 보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살렘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살렘.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다른 방법으로 살렘이 허비한 시간을 보상하겠습니다.”
“보상? 야, 아드리아스. 그동안 내가 너무 좋게 대해 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살렘이 창을 겨눴다.
창끝으로 모이는 그의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보상은 네 목이다. 이 새끼야.”
‘악창 사악한 뱀’이 바르르 떨리더니 수십 갈래로 펼쳐지며 아드리아스에게 꽂혀 들어왔다. 아드리아스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이빨을 들이미는 수십 마리의 뱀을 막았다.
챙! 채재재쟁!
뱀의 머리 하나하나에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아드리아스가 검으로 막는 동시에 루시아가 보호막을 펼쳤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뛰어난 창술사 수십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기분에 아드리아스는 진땀이 났다.
퍼억! 푹!
결국 막아 내지 못한 공격들이 몸에 박혀 들기 시작했다.
바위도 뚫을 만큼 강한 뱀들의 공격은 마나를 두른 아드리아스의 몸도 가볍게 뚫어 냈다.
“그만!”
루시아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따라갈게요. 그러니까 선배는 살려 주세요.”
“그래.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빨리 와라. 나도 괜히 아드리아스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루시아의 항복 선언에 살렘이 이죽거렸다.
그가 창을 거두자 아드리아스의 몸에 박혀 있던 뱀의 머리들이 뽑혀 나갔다.
피가 쏟아져 나오며 아드리아스가 휘청거렸지만 간신히 땅에 갈락슈르를 박고 몸을 지탱했다.
그 모습에 루시아가 다시 다가서려 했지만 살렘이 경고했다.
“이제 네 멋대로 행동하는 건 끝이다. 루시아 에버라스트. 애처럼 굴지 마라.”
살렘의 경고에 멈칫한 루시아가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며 물러났다.
그렇게 루시아는 살렘에게로 향했지만 여전히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뒤돌아보기를 멈추지 못했다.
“아드리아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번에도 그런 시건방을 떨면 아무리 네가 마음에 들어도 죽여 버릴 거다.”
살렘은 그 말을 끝으로 루시아를 앞장세워 뒤돌아 걸었다.
루시아가 떠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드리아스가 간신히 갈락슈르를 땅에서 뽑아내고 일어섰다.
지켜 내지 못했다.
허무한 감정이 두통과 함께 아드리아스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아니. 아직이야.’
이 상황을 바꿀 만한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수많은 게임 플레이 경험으로 얻어 낸 지식은 분명 살렘의 흥미를 끌 수 있을 터.
그때 아드리아스의 망막으로 문구가 비쳤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흑마법 사령 계열이 진화하였습니다.]
[재능 ‘흑마법 사령 계열(수재)’가 ‘흑마법(수재)’로 진화하였습니다.]
꾸드득.
걸어가던 살렘은 갑자기 자신의 발을 잡아채는 무언가를 느끼며 멈춰 섰다.
슬쩍 시선을 돌려 바닥을 보자 꾸덕한 그림자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기다려.”
머리가 맑아지고 오한이 사라졌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카일러에게서 빼앗아 온 그림자 마법을 사용하며 말했다.
“살렘 예디디아. 거래를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