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드리아스의 다짐
퍼걱.
“끄으으. 아파. 아파.”
네 개나 달렸던 팔 중 멀쩡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마에 달린 눈이 마법을 사용하는 주체라는 것을 알아챈 후에는 눈부터 공격했기에 괴물은 눈조차 잃은 상태였다.
“고생했다. 이제 그만 쉬어라.”
아드리아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괴물로 변한 학생의 심장을 찔렀다.
이내 몇 번 경련을 일으킨 괴물을 조심히 내려놓은 그는 고개를 들어 기사학부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비비안. 괜찮겠지.’
정확히 누구 손에 포션이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아드리아스는 비비안에게 부탁을 하면서도 그녀가 무리하지 않게 괴물을 발견하면 교수들부터 부르라고 당부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비비안이니까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
아드리아스는 죽은 시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포션을 먹은 학생을 혼자 상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애초에 게임 자체가 NPC들과의 파티플레이를 권장했기에 지금부터 만나게 될 대부분의 적들은 혼자서 상대하지 못한다.
‘지금의 나는 비정상적으로 강해졌지.’
게임의 플레이어와는 달리 압도적인 성장 덕분에 혼자서도 죽일 수 있었다.
물론 마법사가 아닌 기사가 포션을 먹은 거였으면 아무리 아드리아스였어도 혼자서는 이길 수 없었다.
‘당장 포션을 복용한 기사학부 학생도 나 혼자 상대할 수 없으니, 결국 다른 인물들의 도움 없이는 시나리오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성장에 신경 쓰고 있었던 건데 하마터면 루시아가 죽을 뻔했다. 그래서인지 죽은 시체를 뒤로하고 루시아에게 다가가는 아드리아스의 발걸음이 묘하게 무거웠다.
‘과연 시나리오의 진행 때문에 걱정했던 걸까.’
루시아가 죽을 뻔했다고 생각되자 아찔했다.
그녀가 단지 시나리오 진행에 도움이 되는 플레이어블이라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가?
아니다. 이제는 아니었다.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후배이자 그가 지켜 주어야 할 사람이었다.
“루시아. 다친 데는?”
온몸에 적의 피를 묻힌 채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아드리아스의 모습은 모순적이게도 슬퍼 보였다. 그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루시아는 마치 홀린 듯 바라만 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아드리아스 선배의 저런 모습 처음 봤어. 나 때문에?’
내가 뭐라고.
난 어차피 시한부인데.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가 자신을 찾아와 준 것이 그리고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저 눈빛이.
아드리아스가 검을 집어넣고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그녀를 잡아 주려 손을 뻗었다가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보고 다시 거뒀다.
“선배.”
“왜. 어디 아파?”
“일으켜 줘요.”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하는 루시아를 향해 아드리아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나 피투성이야. 옷 더러워져.”
“상관없어요. 빨리 일으켜 줘요.”
아드리아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팔을 벌리며 기다리고 있는 루시아를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루시아는 옷에 피가 묻으면서도 배시시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선배.”
“웃지 마라. 정든다.”
“헤헤.”
그 바보 같은 웃음을 보자 아드리아스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로서는 루시아가 시한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모습이 너무나 덧없게 느껴졌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많이 힘들겠지. 치료제는 찾을 수도, 만들 수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 테니까.’
이번 일만 모두 해결되면 그 무엇보다 우선 루시아의 치료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그녀의 고통을 방치할 수 없었다.
‘비비안도 루시아도, 이제 더 이상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야.’
루시아를 잃을 뻔해서일까.
아드리아스는 자신과 관계된 모든 존재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우쳤다.
이제 그들은 체스판 위에 말들이 아닌 자신의 친구이자 후배.
게임 클리어를 위해 갈아 넣었던 과거와 달랐다.
“절대 죽게 두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아드리아스의 말에 루시아가 놀라며 바라봤다.
하지만 아드리아스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듯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죽게 두지 않는다고? 나를?’
아드리아스의 숨겨진 진심을 엿들은 것만 같아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아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발개진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 * *
콰가가각―!
콰직! 콰앙―!
세레나는 연무장 한구석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은 크리스를 간호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앞을 가로막은 경천동지할 싸움에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여리여리한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후우, 하아.”
반쯤 눈이 돌아간 비비안이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치 상대를 난도질하는 듯한 검술을 사용하며 토들론을 베어 냈다.
콰직! 콰드드드득―!
육체의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내며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와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수많은 난도질에도 피부가 갈라진 정도로만 피해를 입은 토들론은 포션 복용으로 인해 넘치는 마나와 주체하지 못하는 육체로 검술을 잊은 채 그저 무작정 휘두르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움직임조차도 세레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빠르기였다.
퍼억!
검에서 휘몰아친 검풍이 비비안을 떨쳐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둔기에 맞은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났다.
“크흡.”
비비안의 입가에 선혈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굽히지 않고 들어갔다.
“비비안 선배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세레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이러다간 정말 모두 죽는 수밖에 없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 폭풍우를 뚫고 지나가야 했다.
그렇게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움직이려 할 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무리들을 보며 세레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환희를 느꼈다.
“수라한 학부장님!”
* * *
아직 위험이 끝나지 않아 루시아를 대동하고 기사학부로 넘어왔다.
그리고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강렬한 전투 소리에 곧바로 루시아를 등에 업고 뛰었다.
‘제발. 비비안!’
그렇게 소음의 진원지로 달려가던 중 뜻밖의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수라한 학부장이다.”
등에 업힌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그 무리는 기사학부 교수들과 기사학부장, 수라한이었다.
그들은 급하게 달려오는 우리를 발견했지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급하게 폭음이 터져 나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수라한이 나선 이상 끝이다. 그때까지만 제발 버텨 줘.’
그들의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언젠가 들렀던 적이 있는 연무장이었다.
그리고 연무장에 들어서자 피투성이가 된 비비안과 괴물로 변한 기사학부 학생이 싸우고 있었다.
‘저 녀석은…….’
원래대로라면 저번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어야 할 토들론이라는 이름의 학생이었다.
변한 미래가 저 녀석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콰앙!
쇄애액―!
쿠구구궁!
“비비안!”
나는 곧바로 루시아를 내려놓고 비비안을 구하기 위해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런 내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그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리고 그간 역경을 헤쳐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얼굴에 수많은 흉터를 지닌 사내였다.
“수라한 학부장님.”
“내가 나서마.”
마법학부장 베리얼이 최연소 워록의 칭호를 보유했다면, 그는 최연소로 오러 마스터에 등극한 초인이었다.
그가 오러 마스터가 된 나이는 서른일곱.
나중에는 아이비 클레어에게 그 기록을 경신당하고 그 후로는 다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최연소의 칭호를 앞당기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최연소 오러 마스터에 등극한 인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천천히 싸움 한복판으로 다가서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사라졌다.’
이내 갑작스레 소음이 끊기고 모습을 감추었던 수라한은 어느새 비비안과 토들론의 사이에서 그들의 공격을 각각 한 손으로 잡고 있었다.
“토들론인가. 안타깝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으어어어!”
토들론의 이성은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본능으로만 남은 그의 살의가 폭주하는 마나로 인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비비안 벨로칸. 수고했다. 이제 뒤로 물러나 있거라. 네 친구들도 온 것 같으니.”
수라한의 말에 비비안이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살짝 풀린 듯한 눈은 희미한 광기를 담고 있었지만,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또렷하게 변했다.
“아드리아스.”
그녀는 검을 떨어트리며 비틀비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주변 교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녀에게 다가가 쓰러지려는 그녀를 안았다.
“비비안. 제가 무리하지 말라고…….”
“아드리아스. 나 지켰어, 저 애들. 잘했지?”
피범벅이 된 얼굴로 흐릿하게 미소 짓는 비비안에게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품 안에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포션을 그녀에게 먹였다.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정말 잘하셨어요.”
“그럼. 나 상 줄 거지?”
“예. 제가 꼭 상 줄게요.”
내 대답을 들은 비비안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급하게 그녀의 맥박을 확인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순간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이렇게 마음을 줘 버린 거지.’
전생에서는 거의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루시아와 비비안으로 인해 심장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난 생각보다 정에 약하다.’
전생에서 트라우마가 되었던 사건도.
그리고 이번에 생긴 사건도.
애써 부정해 왔지만 나라는 인간은 사실 인간관계에 너무나 약했다.
끼이이이익.
그때 바로 옆에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자신의 애검인 ‘니라야’를 뽑아 든 수라한이 토들론과 대치하고 있었다.
‘수라한의 오러 비기, 무량귀곡반야가(無量鬼哭般若歌)’
그의 오러 비기명을 떠올린 순간 희읍스름한 수라한의 오러가 그의 검과 마찰을 일으켰다.
끼아아아악.
마치 인간이 내는 비명과 같은 섬뜩한 소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토들론의 몸에서 갑자기 피가 솟구쳤다.
푸화악!
무량귀곡반야가.
그것은 검과 오러가 만들어 내는 살기 어린 노래였다.
수라한은 그저 가만히 서서 검만 뽑고 있었음에도 귀곡성이 울려 퍼질 때마다 단단한 토들론의 몸에 상처가 늘어 갔다.
토들론은 기사학부 졸업반의 수석을 차지할 정도의 인재.
검술 실력으로만 따지면 변변찮은 교수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지닐 정도로 강했다.
그런 토들론이 포션을 복용했다.
지금의 신체 내구력과 육체 능력은 아마 경이로울 정도의 수준이겠지만.
‘역시 오러 마스터.’
수라한에게는 손 한 번 못 쓰고 죽어 가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적이었다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그저 소리가 들려올 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에 계속 당해 줘야 한다니.
게다가 저 모습을 보면 수라한은 온 힘을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수라한이 진심을 다해 싸우면 귀곡성이 이렇게 드문드문 들려오는 게 아니라 정말 노래를 하듯 끊임이 없었고, 무엇보다 수라한 자신도 무량귀곡반야가를 사용하며 직접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가엾구나. 네게는 기대가 많았었는데. 부디 다음 생에는 좋은 인연으로 함께 하자꾸나.”
수라한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거대한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끼에에에엑―!
서걱. 데구르르.
수급이 잘린 토들론의 거대한 동체가 뒤로 천천히 쓰러져 내렸다.
토들론은 죽어 가는 내내 수라한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귀곡성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못 하고 온몸이 난도질이 난 채 끝을 맞이했다.
‘압도적인 힘이다. 이게 진짜 초인이라 불리는 오러 마스터.’
그 비현실적인 강함을 보고 있자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내가 오러 마스터가 된다면…….’
품에 안은 비비안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새근새근 호흡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내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
오러 마스터가 되는 방법은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오러 비기를 만드는 것.
‘마법사랑 비슷하지.’
마법사가 워록의 칭호를 받으려면 오리지널 마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오러 마스터의 칭호는 오러 비기를 만든 초인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워록의 오리지널 마법은 어느 정도 연구의 영역인데 반해, 오러 마스터의 비기는 순수한 재능과 깨달음의 영역이었다.
입문을 위한 재능은 마법보다 검술이 낮을지라도 그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재능이 필요한 것이 오히려 검.
‘나는 두 가지 모두 노린다.’
내게는 수십, 수백 번의 게임 플레이 경험이 있다.
그를 토대로 워록과 오러 마스터, 둘 다 노린다.
그동안은 세상의 멸망이라는 조금은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목표를 위해 달렸다면 오늘로써 그 생각이 조금 변했다.
나는 이제 나를 위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