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드리아스의 부탁
저녁 하늘이 유난히 어둑했다. 마치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잔뜩 낀 가운데, 크리스 유노르는 연무장에 가만히 선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순수한 상태에서 생각해 보자. 내가 처음 검을 배웠을 때로.’
자신이 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시에 느낀 감정은 묘한 흥분.
그리고 아버지의 멋진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것만 같다는 기대감.
‘아버지의 뒤를 쫓던 것이 어느새 루이스의 뒤를 쫓게 되었군.’
검을 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하루하루 강해지는 자신을 보며 기뻐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더 이상 그런 목표만으로 자신의 검을 지탱하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왜 강해지고 싶은 거지? 그 강함으로 무엇을 증명하려고?’
그렇게 두 눈을 감은 채 연무장 한가운데 서 있던 크리스는 누군가가 연무장에 들어서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연무장에 들어온 이는 기사학부 졸업반의 토들론 테리.
그는 한 손에 거무칙칙한 포션 병을 들고 있었는데 그 색이나 기운이 영 껄끄럽게 느껴졌다.
크리스는 토들론과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수련을 하는 이상 서로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맞으니까.
“하. 이제는 하다 하다 햇병아리한테도 무시받는군.”
그러나 토들론은 그리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토들론의 중얼거림에 다시 눈을 뜬 크리스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리요?”
“이 새끼 말투 봐라? 그럼 누구한테 했겠냐? 여기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토들론 테리. 그대의 이름은 알고 있소. 졸업반 수석이라는 자가 그리 가벼운 언행을 보일지는 몰랐군.”
“뭐? 이게 미쳤나. 야. 신입생. 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선배한테 가벼운 언행이 어쩌고 저째?”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괜한 시비에 휘말렸다고 생각한 크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한숨을 내쉰 크리스가 연무장에 있는 수련용 검을 집어 토들론에게 던졌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실력으로 증명해 보시오.”
“이야. 이거 진짜 골 때리네. 혹시나 그 년이 있나 와 본 건데 미친놈이 하나 더 있었어. 좋아. 내가 우리 햇병아리한테 한 수 가르쳐 주마.”
순식간에 대련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참관인이 없으면 대련은 금지였지만 크리스나 토들론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검을 뽑아 든 둘은 곧바로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깡!
콰가각―!
우락부락해 보이는 토들론은 생각보다 유연한 검술을 사용했고 크리스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검술로 토들론을 다그치듯 몰아붙였다.
“뭐야. 겨우 그 정도냐? 그까짓 실력으로 나불댄 거였어?”
“시끄럽소.”
아드리아스와의 대련 이후 크리스도 자신의 문제점을 눈치챘다.
문제라면 이미 그동안 들여놓은 습관으로 인해 검술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초심으로 돌아가려 애써서 그런지 크리스의 검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흐압!”
쾅!
토들론의 강력한 압박이 들어오고 크리스의 검이 부평초처럼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평정을 유지한 채 자신의 검을 믿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라도 고쳐야 한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안 좋은 버릇을 고쳐야 할 때였다.
쾅! 쾅!
콰각― 퍼엉!
토들론의 검을 막아 낼수록 자신의 검도 깎여 나갔다.
잡념을 없애고 의식적으로 처음 배웠을 때의 검법으로 돌아가려 노력했다.
그렇게 점차 변해 가는 크리스의 검을 토들론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로서는 자신을 발판으로 삼으려는 크리스가 너무도 같잖았다.
“이 새끼가 어디서!”
마나가 실린 일격이 내려 베어졌다.
하지만 전과 달리 크리스는 환검으로 유유히 상대를 희롱하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래. 이 감각.’
자신이 처음 유노르 검법을 익혔을 때의 감각이었다.
유노르 검법의 기본은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한 검술.
다른 어떤 목적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를 보완해 주는 게…….’
기본을 해냈다면 이제 심화로 들어갈 차례.
매끄럽게 토들론의 검을 받아 내던 크리스의 검이 갑작스러운 속도의 변화를 일으켰다. 흘러가듯 했던 그의 검이 순식간에 토들론의 목을 노리는 뱀과 같이 달려들었다.
“으헉.”
갑작스러운 변화에 토들론이 급하게 뒤로 물러나려다 발이 꼬였다.
그렇게 꼬인 발로 인해 뒤로 넘어질 뻔한 토들론의 목에는 이미 크리스의 검이 닿아 있었다.
“아무래도 제 승리 같소만.”
대련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자신감 넘치는 크리스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에 닿은 검을 바라보던 토들론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고는 뒤로 물러났다.
“정말 어이가 없네. 이 내가, 졸업반 수석인 내가 동네북이 되다니.”
토들론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크리스는 검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동네북이라니 가당치 않소. 그대는 충분히 훌륭했소.”
“하하하. 이제는 햇병아리한테 위로까지 받아야 하는 건가?”
토들론의 자조 섞인 웃음소리를 듣던 크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성장한 자신이 당장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좋게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고개만 꾸벅 숙이며 크리스는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 보려 했다.
“멈춰.”
크리스가 떠나려 몸을 돌리고 연무장 밖으로 향하자 뒤에서 토들론이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토들론을 확인하고 있을 때는 이미 토들론은 가지고 온 포션을 들이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요.”
“푸흐. 기다려 보라고. 아직 안 끝났어.”
포션을 모두 마신 토들론이 포션 병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진검을 뽑은 그의 모습에 크리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무리 후배에게 졌다지만 너무 추한 것 아니오?”
“닥쳐! 너도, 비비안 그년도! 날 비웃는 이 아카데미의 다른 녀석들도! 전부 내가 죽여 버리겠어!”
“미쳤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크리스는 내심 긴장을 한 채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흰자위가 사라지고 검은자위밖에 보이지 않는 토들론의 상태가 이상했다.
‘엄청난 압박감.’
토들론의 주변에 마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발산되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토들론이 바닥을 박차고 쏜살같이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큽.”
이전과는 다른 괴력과 스피드에 크리스의 몸이 날아갔다.
빗겨 막는다고 했음에도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포션의 정체가 의심됐다.
‘우선은 살아야 한다.’
토들론의 공격은 쉼 없이 퍼부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쏟아지는 폭격에 크리스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을 가누기 바빴다.
콰앙―!
콰가가가각!
폭음은 주변 일대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크리스는 상대의 공격을 막느라 탈골이 된 자신의 어깨를 억지로 끼워 맞추며 도망치기 바빴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그때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연무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선 인물은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
세레나 에레스티얼이 들어온 걸 본 크리스는 소리쳤다.
“세레나! 밖에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라! 뭔가가 잘못됐…….”
콰아앙―!
다시 한 번 폭음에 휩쓸려 나가는 크리스를 본 세레나가 놀라 굳은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다 이내 검을 뽑았다.
어차피 이 정도의 폭음과 소음이면 자신처럼 누군가가 찾아오는 이가 있을 터.
우선은 크리스를 살려야 했다.
‘저건, 토들론 선배님인가?’
비록 몸집이 더 커지고 눈이 꺼멓게 변했지만 토들론 선배가 확실해 보였다.
어쩌다 둘이 싸우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막아야 했다.
휘익.
그녀는 최근 들어 대검에서 바꾸게 된 롱소드로 토들론을 공격했다.
바뀐 검술은 아직 어설픈 실력이었기에 토들론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고맙다.”
그러나 세레나의 검을 피하느라 크리스에게 향하는 공격이 멈출 수 있었다.
덕분에 크리스를 위기에서 구해 낸 후 둘은 자세를 다시 잡으며 토들론의 앞에 섰다.
세레나는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토들론의 몸집이 더욱 커져 가는 모습을 보며 기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또 다른 햇병아리냐?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 전부 다 죽여 주마!”
토들론의 외침은 마치 마나가 섞인 듯 속을 진탕하게 만들었다.
이내 크리스와 세레나 대 토들론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 * *
‘비비안. 부탁이 있어요.’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비비안은 홍조를 띠었다.
무려 아드리아스가 직접 자신에게 부탁을 한 상황.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아드리아스의 부탁은 단순했다.
연회장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사고가 기사학부에서도 일어났을 수 있으니 살펴봐 달라는 것.
만약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곧장 기사학부 교수들에게 연락을 할 것.
열차에서 내리고 일단은 달렸다.
일단은 어디서 뭐가 일어날지 모르니 기사학부 부지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었다.
쿵…….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깐,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비비안의 경로가 바뀌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자신이 평상시에 수련을 하던 연무장이 있는 곳.
비비안은 지체 없이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뛰어갔고 가까워질수록 소음은 폭음으로 변해 갔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마법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소리에 비비안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소리의 정체가 뭔지 우선은 확인부터 한 뒤에 교수들에게 알려야 했다.
쿵! 쿠아앙―!
비비안은 조심스레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학생 둘과 몸이 거대해진 무언가가 양손에 검을 한 자루씩 든 채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아드리아스는 교수한테 먼저 연락하라고 했는데…….’
아드리아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황을 보니 자신이 교수를 데리고 올 때쯤에는 이미 둘 다 죽어 있을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스였다면 저 둘을 놔두고 교수를 찾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비비안은 둘부터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다짐하듯 혼잣말을 내뱉은 비비안이 검을 뽑자 검이 뽑히는 소리를 들은 괴물과 학생들이 시선을 돌렸다.
“비비안 선배님.”
“크윽.”
학생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에 반해 괴물은 멀쩡해 보였다.
“비. 비. 안?”
괴물이 말했다.
비비안은 안색을 굳히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괴물에게 다가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드리아스의 부탁을 들어줘야 해.”
“내가. 누군지. 몰라?”
“몰라. 너 같은 괴물.”
“으어어어. 으아아아아!”
안 그래도 강렬했던 괴물의 기운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비비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괴물을 응시할 뿐이었다.
“실망시키지 않아.”
비비안의 내면에 남은 광기가 희번덕거렸다.
곧이어 괴물로 변한 토들론과 비비안이 맞부딪혔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