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커져 가는 명성 그리고 발생
“이게 요즘 유행한다는 그 마법진?”
“예. 복제품이긴 하지만 사용된 주문은 똑같습니다.”
마법학부장, 베리얼 카스테로가 근신 중인 자신의 거처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받았다.
베리얼이 마나를 주입하자 꽃이 생성되더니 곧이어 그 주위로 환상 마법이 펼쳐졌다.
“특이한 발상이네요. 무엇보다도 이거. 간단한 주문만으로 ‘모순’을 잘 표현했어요.”
이중 마법진으로 펼쳐진 화려한 환상 마법은 베리얼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미적 감각이 남들과 다르기도 했고 애초에 아름답거나 예쁘다는 것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인격이었기에 그저 푸르른 상태로 시들어 가는 꽃만이 그의 눈에 비쳤다.
“이런 학생이었을 줄이야. 갈수록 놀랍군요.”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말이 많았던 학생인데, 아무래도 제작 계열에서 두각을 드러내나 봅니다.”
베리얼의 맞은편에 위치한 마법학부 교수가 말하자 베리얼이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재미있네요. 아, 참고로 제가 여기서 근신하고 있는 것도 그 학생 덕분입니다. 정말 놀라운 우연이군요.”
“그, 그랬습니까! 이, 이런 몹쓸 녀석!”
“아니에요. 그 학생 ‘탓’이 아니라 ‘덕분’이라니까요. 전 지금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긴 마법학부장의 자리가 많이 힘든 자리이지요. 격무로 그동안 힘드셨을 텐데 이번 기회에 피로를 풀고 복귀하면 좋겠습니다.”
“마법학부장 자리가 뭐가 힘들어요. 졸업반 중에서 저한테 개인 교습을 신청한 몇 명만 신경 쓰면 되는 건데. 그마저도 제가 원치 않으면 거절이 가능하니 힘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말과 베리얼의 생각이 자꾸만 어긋나자 교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교수가 그러든 말든, 베리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저 마법진 위에 피어난 꽃을 보고만 있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네요. 이참에 제가 가르쳐 볼까요?”
“아드리아스 학생을 직접 말씀이십니까?”
“안 그래도 데오스 교장님께서 올해에는 왜 모든 교습 신청을 거절했냐고 핀잔을 주셨는데, 마침 잘됐네요. 아드리아스 학생을 가르치면 되겠어요.”
“하, 하지만 아드리아스 학생은 고작 4학년입니다만.”
“고작 1년 차이 가지고, 뭐 어때요. 왜요. 교수님이 저 막으시려고요?”
“아,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농담이에요. 어쨌든 오늘은 굳이 이렇게 소식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 주시죠.”
“예? 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교수가 나가자 홀로 남은 베리얼은 차근히 마법진을 뜯어보았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웃긴지 실실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아. 정말. 골 때리네요.”
베리얼이 마법진이 새겨진 종이를 든 채 알 수 없는 마법을 발현했다.
분명 마법이 발현되었지만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베리얼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손 위에 있는 꽃은 겉으로는 멀쩡하더라도 이미 모두 시들어 죽어 버린 상태라는 것을.
“가장 위대한 ‘모순’ 중 하나인 불로불사(不老不死). 그중 불로(不老)의 단초는 되었군요. 정말 기특해요.”
이러한 발상들이 모여 강력하고 위대한 마법이 탄생된다.
그 위대한 마법들을 가리켜 오리지널 마법이라 칭하는데 이는 ‘모순’뿐만 아니라 ‘이해’와 ‘순수’가 내재된 마법들도 오리지널 마법에 들어갔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본인만의 오리지널 마법을 창작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워록’이라는 칭호와 함께 무수한 명예가 주어지게 된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과연 당신은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무척 궁금하네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베리얼은 순수한 마력만으로 손안에 있는 종이를 불태웠다.
* * *
요 며칠 내가 만든 마법진으로 인해 주변이 시끄러웠다.
나름 잘 숨겨 두었다고 생각했던 이중 마법진이 들킨 모양인데, 하필이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밝혀진 모양이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마법진이 만들어 낸 환상 마법이 공개되었고 이로 인해 현재 마법학부는 온통 마법진 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특이한 발상이긴 했지. 마법진으로 창조한 식물에 다시 한 번 마법진을 넣어 둔 고도의 트릭이니. 환상 마법의 마법진이 꽤 높은 수준의 주문이기도 했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자리에는 내가 마법진을 선물로 준 디에네뿐만 아니라 비비안과 루시아도 있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루시아야 궁금해할 수 있다고 쳐도 그 자리에 왜 비비안이 있었던 거지?
그것도 굳이 마법학부 부지에.
‘그래도 뭐. 결과는 좋았으니까 됐지.’
사실 내가 숨겨 둔 이중 마법진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아버지가 원죄를 남기고 간 요정의 꽃밭.
그로 인해 마법진을 설계할 당시 꽃을 만들자 자연스레 아버지가 먼저 떠올랐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드디어 교류회의 마지막 날이다.
케슈른과는 마법진 강의 덕분에 금세 친해져 목표했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에 케슈른에게 걸림돌이 될 그레이스를 충분히 밟아 놓지 못했다는 점.
‘첫날 이후부터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니까 함부로 건드리기 애매했지.’
아무것도 안 하는 상대를 괜히 핍박하는 것도 이미지에 좋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결투 때 조금 더 확실히 매듭을 지어 놓았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던 거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왕자는 왕자니까.’
그레이스의 성격대로라면 이후로도 언제든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내 실수다.
결국은 케슈른이 알아서 잘 버텨 낼 수밖에 없겠네.
지금 나는 모든 강의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남은 일정인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미상관이라는 듯 교류회 첫날과 마지막 날이 연회로 장식되었다.
조금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케슈른을 보게 될 기회가 얼마 없을 거라는 걸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냈다.
그렇게 행정동으로 가기 위해 열차역으로 향했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디에네랑 비비안? 디에네는 그렇다 치고 비비안은 왜 여기에 있지?’
마법학부 쪽에 용무가 있었나?
어찌 됐든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디에네. 비비안. 행정동에 가시는 건가요?”
“어? 아드리아스. 마침 잘 왔어.”
디에네가 반색을 하더니 이내 비비안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시선을 돌려 비비안을 보자 그녀는 마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다 걸린 사람처럼 시선을 돌리며 쭈뼛거렸다.
무슨 일이지?
“내가 열차를 타려고 나왔는데 마침 비비안이 있더란 말이야. 근데 얘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아무리 캐물어도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서 답답해하던 참이었어.”
“예. 그랬나요?”
어느새 말을 텄나 보네.
편하게 비비안을 부르는 디에네를 보자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좋아 보인다.
디에네는 유리히하고만 가까이 지내서 조금 걱정이긴 했는데 이제 걱정을 좀 덜어도 되겠군.
“내가 생각할 때는 아무리 봐도 널 기다린 거 같거든? 저번에 네가 준 마법진을 달라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디, 디에네 알븐!”
갑자기 소리를 치는 비비안은 둘째 치고, 지금 뭐라고?
나랑 비비안이 무슨 사이?
‘굳이 따지면 깊은 유대감을 나눈 사이인가? 아니면 생명의 은인 사이?’
나태의 결계로 인한 경험은 살면서 두 번 다시 겪기 힘들 만한 사건이긴 했다.
그 이후에 일어난 테러도 비비안 덕분에 살아남았고.
그나저나 마법진이 발동된 자리에 왜 비비안이 있었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어?
마법사도 아닌데 왜 내 마법진을 가지려고 했지?
일단 의문은 접어 두고 대답부터 해 주었다.
“비비안은 작년 중간 평가 때 같은 조였습니다. 그 당시에 흑마법사를 함께 처치하면서 많이 친해졌거든요.”
“그으래?”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내왔다.
더 해 줄 말 없어. 돌아가.
결국 내게서 그 이상의 대답을 얻어 내지 못하자 이번에는 비비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비비안의 얼굴이 점차 붉게 변해 갔다.
‘화났네.’
어이. 상대는 비비안 벨로칸이라고.
언제 눈이 뒤집혀서 검을 휘두를지 모른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비비안은 얼굴만 붉힐 뿐, 몸을 배배 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비안. 너도 많이 성장했구나. 참을성도 기르고.’
다 내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디에네. 넌 나한테 목숨을 빚진 거다.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셋이서 함께 열차에 탑승했다.
얼마 있지 않아 행정동에 도착하여 이전에 연회가 열렸던 건물에 들어서자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푸른 머리의 케슈른부터 찾았다.
이번을 끝으로 적어도 몇 년 동안은 못 본다고 생각되자 조금 아쉬웠지만 이렇게라도 인연이 닿았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케슈른은 아직 2학년밖에 안 됐으니 아카데미 생활을 몇 년은 더 해야 한다. 그래도 내가 졸업하기 전에 인연을 맺을 수 있어 다행이네.’
케슈른에게 다가가자 그가 반갑게 맞이했다.
“아! 아드리아스 형님.”
“먼저 와 있었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니까 너무 아쉬워서 일정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어요.”
호칭에서부터 그간의 노력이 보이는 듯해 너무나 뿌듯했다.
그렇게 헤어지기 전,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그와 함께 대화나 나누며 연회를 즐기려 하는데 돌연 케슈른이 말했다.
“성함이 비비안 벨로칸, 맞으시죠? 기사학부 분들과는 어울릴 시간이 길지 않아 조금 아쉬웠네요. 근데 항상 아드리아스 형님과 같이 다니시던데 굉장히 친하신가 봐요?”
케슈른의 말을 듣고 옆을 보니 어느새 곁에 붙어 있는 비비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솔직히 눈치도 못 챘었다. 거의 니켈의 유체화랑 맞먹는 기척 숨기기!
그녀는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잔을 홀짝거렸다.
그건 또 언제 가지고 온 거냐.
“비비안이랑은 인연이 깊긴 하지.”
“오? 역시 그런가요? 안 그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습니다.”
“뭐?”
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거야.
나는 혹시나 비비안이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케슈른의 말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그, 케슈른. 비비안한테 빨리 사과해라. 숙녀한테 갑자기 실례되는 말을 하면 안 되지.”
죽기 싫으면 어서 사과해라.
“하하. 예. 제가 실례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케슈른은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너 그러다 진짜로 죽는다고.
그러나 이번에도 비비안의 참을성이 빛을 발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작게 고개를 흔들며 케슈른의 사과를 받아 주었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와 간신히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오늘 여럿 살리는군.’
디에네 그리고 케슈른.
너넨 나한테 빚진 거야. 알았어?
그렇게 비비안의 폭주를 봉인시키고 다시 대화를 하던 찰나, 나는 그레이스가 연회장에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스 왕자가 없네.”
“아, 그레이스 전하께서는 용무가 있다고 나중에 합류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마지막까지 그를 밟아 놓을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어쩌면 그날 이후로 이미 내가 원하던 대로 기가 꺾인 상태일 수도 있었다.
돌아가면 다시 기가 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케슈른의 숨통이 조금은 트였으면 좋겠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내가 왔도다!”
누군가가 갑자기 연회장에 들어와 소리쳤다.
연회를 즐기던 우린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 집중했다.
“그레이스 전하?”
그의 갑작스런 등장도 등장이지만 그의 손에 들린 포션 병이 묘하게 눈에 익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직 카일러의 포션이 유출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아드리아스 크롬웰! 네 녀석을 여기서 죽여 버리겠다!”
“왜 저러는 거야?”
“전하께서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타국의 귀족한테 저런 망발을 하실 줄이야.”
모두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때, 그레이스가 포션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막아야 돼.’
나는 곧바로 앞으로 뛰쳐나가며 검을 뽑았다.
뒤늦게 검풍을 날려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콰아아앙―!
내 검풍을 가볍게 막아 낸 그레이스가 흰자가 지워진 검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고작 그 정도냐?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