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드리아스의 꽃
갑작스러운 케슈른의 반응에 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상황은 디에네가 합류함으로써 더욱 복잡해졌다.
“아드리아스. 이거 정말 네가 만든 거야?”
디에네마저 그리 말하자 이제는 교수조차 자신이 뭔가 놓친 게 있나 하며 내가 만든 꽃봉오리를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표정이 굳으며 내게 물었다.
“혹시 아드리아스 학생은 이전에 마법진 강의를 들으신 적이, 있겠죠?”
있냐고 물어보려다 마치 반드시 들은 적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교수를 보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마법진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나?
솔직히 지금 만들어 낸 꽃도 게임 속 경험을 차용해서 만들어 낸 거라 강의를 듣고 안 듣고가 의미 없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때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1학년? 그 당시에 배웠다고 하기에는 사용된 주문의 형태나 종류가…….”
도대체 왜 이리 호들갑인지 눈치채지 못하는 학생들이 어서 설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이윽고 케슈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꽃. 별거 없어 보이지만 고도의 주문들이 들어갔습니다. 원래 생명과 관련된 주문을 마법진으로 구현하는 건 어렵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꽃 한 송이쯤은 누구든 만들어 낼 수 있겠죠.”
케슈른의 말에 구경하던 이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지금 아드리아스 학생께서 만든 이 꽃은 기본적인 ‘자연’과 ‘생명’의 주문뿐만 아니라, ‘시간’과 ‘회전’, ‘역전’이 들어간 고도의 결과물입니다.”
“시간?”
“예. 겉보기에는 그저 한 송이의 꽃이지만 그를 역전으로 유지하며, 동시에 시간과 회전의 주문을 넣어 시들게 하고 있습니다.”
케슈른의 설명에도 학생들이 그게 뭐 어쨌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디에네가 옆에서 거들었다.
“쉽게 말하면 푸르른 상태로 시들어 가고 있다는 말이야. 가장 단순한 형태의 주문들로 무려 ‘모순’을 만들어 낸 거지.”
모순.
그것은 마법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이면서도 파고들수록 가장 어려워지는 원리.
이 모순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혹은 이해하게 된다면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거다.
비록 케슈른처럼 스케일이 크거나 디에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도와 주문의 형태 자체는 꿇릴 게 없었다.
“이건 정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군요. 단순한 꽃 한 송이에 이러한 의미와 의도를 담다니. 제 마법진은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케슈른의 자기 비하에 내가 손을 저었다.
케슈른과는 두고두고 친해져야 하니 조금은 착한 학생처럼 굴어야겠군.
“아닙니다. 전 그저 생각 없이 만든 건데 케슈른 학생과 디에네가 절 너무 띄워 주네요. 너무 그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그리고 당장 케슈른이 만든 마법진에도 제가 의도한 모순만 담는다면 이런 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결과물이죠.”
“제 마법진에 모순을 담는다라…….”
내 말을 들은 케슈른이 곧바로 자신의 종이를 들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를 필두로 디에네와 다른 학생들조차 자신이 만들어 낸 마법진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하면 모순, 아니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내가 원하던 모습이야. 무럭무럭 성장해서 나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내가 이 꽃봉오리를 만든 이유.
케슈른과 디에네에게 영감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니 부디 각자 방향을 잡고 잘 받아먹었으면 좋겠다.
* * *
그레이스 메이른은 요 며칠간 최악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녀석, 빌어먹을 녀석!’
아드리아스 크롬웰에게 당한 날 이후, 교류회의 학생들은 자신을 보면 피하기만 했다.
그것도 온갖 조롱과 경멸이 섞인 눈빛이었는데 그레이스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여명의 포효의 주인이자 메이른 왕국의 적통! 그런 나를 감히 무시해?’
이 모든 게 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때문이다.
더불어 그와 함께 있던 비비안이라는 여인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서로 친해졌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 않은가.
감히 메이른의 3왕자인 자신이 함께 식사를 하자는데 건방지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
거기다 더해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교류회 인원들과 함께한 마법진 강의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어 그 시샘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고작 초급 마법사라고 했던 아드리아스가 그런 활약을 펼치다니.
“으으.”
분을 참지 못하고 교류회 학생들을 위해 임시적으로 마련된 고급 숙소를 나왔다.
밖이 조금 쌀쌀했지만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지어진 코트로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는 오직 본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렇게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이라 아무도 없는 야외를 서성이며 분을 삭이고 있을 때, 알 수 없는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거 미르코 아카데미에서 오셨다는 그레이스 전하 아니십니까?”
“누구냐!”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자 긴장한 그레이스가 다급히 지팡이부터 꺼내고 보았다.
그러자 상대는 양손을 들며 미소를 지었다.
“아아.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로들렌 아카데미 졸업반의 안토니오 홀트라고 합니다.”
“흐흠. 그, 그렇군. 절대 놀라서 그런 게 아니다. 이곳이 타지다 보니 조심성이 많아져서 그런 것이니 이해하거라.”
“네. 그럼요. 무려 왕자 전하신데 그 정도의 조심성은 필수죠.”
“그건 그렇고 갑자기 내게 왜 말을 걸었지? 내가 왕자라는 건 어찌 알았고?”
그레이스의 물음에 안토니오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려 메이른 왕가의 왕자님이 직접 교류회에 참석하셨다는. 근데 제가 듣기로 영 안 좋은 일에 휘말리신 모양입니다?”
갑자기 비수로 상처를 헤집어 놓는 듯한 안토니오의 말에 그레이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레이스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너, 네, 네놈이! 가, 감히 지금 이 메이른 왕가의 적통이자 3왕자인 이 그, 그레이스 메이른을 우롱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전 그저 그레이스 왕자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물건을 소개해 드리려고 왔을 뿐입니다.”
안토니오는 품에서 포션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걸 본 그레이스는 거친 호흡을 토해 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 포션은 또 뭐고?”
“이건 복용자에게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 향상과 마나 증진 효과를 주는 놀라운 포션입니다. 아주 특별히 공수한 거죠.”
“뭐라고? 그런 포션이 있다니 믿을 수 없다.”
“물론 믿는 것은 왕자님의 의지입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거짓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전하를 속이겠습니까?”
안토니오의 말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의 이름이 진짜 안토니오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인상착의와 마법학부라는 것을 안 이상 자신에게 사기를 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포션을 내게 팔겠다는 이야기인가?”
“정확합니다. 만약 구매를 하신다면 제가 샘플용 시약을 드리겠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흥! 그까짓 돈이야 차고 넘친다. 속는 셈 치고 네 녀석의 꿍꿍이에 어울려 주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레이스는 거금을 내고 안토니오에게서 포션을 받았다.
안토니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였다.
“정말 좋은 거래였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만약 이걸 마셔도 네가 말한 효과가 없다면 바로 찾아가서 혼쭐을 내주겠다.”
“물론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안토니오는 서서히 물러났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마신 뒤에는 절 찾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을 겁니다. 하하.”
안토니오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서 그레이스는 곧바로 덤으로 받은 샘플을 복용했다.
그러자 안토니오의 말대로 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건 포션계의 혁명이었다.
이런 포션이 있음에도 왜 진즉에 판매하고 있지 않은 거지?
자신이 지불한 금액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이 넘치는 힘! 그것도 고작 이 손톱만 한 샘플을 마시고 이 정도의 힘이다.’
안토니오에게 받은 포션은 샘플의 10배 가까이 되는 용량.
이를 다 복용했을 때의 효과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이거라면!”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드리아스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자신을 만인의 앞에서 창피를 준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를 처단하기까지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 * *
교류회 인원들과 강의 참관이 끝나고 이제 단련실에나 들를까 싶던 디에네는 갑자기 찾아온 뜻밖의 인물로 인해 표정이 굳었다.
‘비비안 벨로칸.’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은 천하의 디에네마저 긴장시켰다.
토너먼트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몰랐던 기사학부 학생.
그러나 그 실력은 토너먼트에서 마주친 그 어떤 상대보다 강력했다.
‘아드리아스와의 전투 경험이 없었으면, 지는 건 나였을 거야.’
만약 아드리아스와 싸워 보지 않고 비비안을 먼저 만났다면 그대로 졌을 정도로 그녀의 검술은 완숙에 경지에 다다른 상태였다.
왜 여태까지 이런 인재가 눈에 띄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토너먼트 이후로 아무 접점도 없는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가이다.
“디에네 알븐.”
“오랜만이에요. 무슨 일이시죠?”
디에네와 비비안이 마주치자 주변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불러왔다.
토너먼트의 우승자와 준우승자.
게다가 외모 또한 뛰어난 둘이었으니 이목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다 들었어.”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저 모양이었다.
디에네는 굳어 있는 표정을 풀며 물었다.
“다 들었다니요? 뭘 말씀하시는 거죠?”
“아드리아스가 너한테 꽃, 줬다면서.”
갑자기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여기서 왜?
하지만 비비안의 말을 듣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아드리아스와 꽃이라고 하면 최근에 있었던 마법진 강의에서의 그걸 말하는 거겠지.
“네. 제가 달라고 부탁하니까 주더라고요. 무슨 문제 있나요?”
“……으.”
갑자기 분한 표정이 된 비비안이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두 눈에 살짝 분한 듯한 눈물이 맺힌 게, 왜 저러지 싶은 디에네였다.
“그거, 나 주면 안 돼?”
“네? 아! 아드리아스가 준 마법진이요?”
“응.”
도대체 기사학부 학생이 마법진을 왜 가지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구라도 할 셈인가? 아니, 기사학부가?
비비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마침 품 안에 아드리아스의 마법진이 담긴 종이를 가지고 있었던 디에네는 곧바로 꺼내 보았다.
“그게 꽃?”
“네. 일단 저도 참고하려고 가지고 있는 거라 주기에는 조금 아쉬운데…….”
디에네가 말끝을 흐리자 비비안의 표정이 처량해졌다.
그 표정이 마치 울상을 짓는 강아지 같아 마음이 약해진 디에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어차피 저도 따로 만들 수 있는 거라. 발상이 뛰어났을 뿐이지 따라 그릴 수는 있는 거거든요.”
그리 말한 디에네는 접었던 종이를 피고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푸른 꽃봉오리가 살며시 떠올랐다.
“와아.”
단번에 표정이 환해진 비비안이 디에네가 건네는 종이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어. 디에네 선배랑 비비안 선배다아.”
강의가 끝난 루시아가 졸린 눈을 하며 다가왔다.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어서 조는 건지 웃는 건지 애매한 얼굴이었다.
“루시아.”
“어? 이거 설마 그거예요? 소문의 그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모순.”
“맞아.”
길거리는 어느새 북새통을 이루었다.
디에네와 비비안만으로도 가던 길을 멈추던 사람들이 루시아마저 등장하자 그야말로 유명인들을 모아 놓은 듯한 느낌이었는지 모두가 바라보고 있었다.
“엥? 이거, 뭔가가 빠져 있는데요?”
꽃봉오리를 구경하던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디에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빠져 있다니?”
“여기 봐 봐요. 이 부분이 조금 어색하지 않아요?”
루시아가 가리킨 곳을 살피자 마법진 한구석이 조금 어색했다.
사실 이미 발견했던 부분인데 그조차도 아드리아스가 의도한 거라 생각했던 디에네였었다.
그러나 루시아의 말로 인해 편견이 조금 깨졌다.
‘의도한 건가? 의도하지 않은 건가?’
헷갈리기 시작한 디에네를 제쳐 두고 루시아가 갑자기 마나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을 좀 더 매끄럽게 연결하고, 또 이쯤에서는 ‘흐름’의 주문을 넣으면…….”
그녀는 즉석에서 아드리아스의 마법진을 손보았다.
그러자 마법진의 어색했던 틈이 사라지며 매끄럽게 변한 마법진에서 새로운 빛이 나며 꽃봉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
“와!”
봉오리가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드러났다.
“하, 하하…….”
“거짓말! 이걸 정말 아드리아스 선배가 했다고요?”
디에네의 넋 나간 웃음과 루시아의 경악 그리고 비비안의 감탄사.
주위에서 구경 중이던 행인들도 갑자기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환상으로 만들어 낸 드넓은 요정의 꽃밭.
꽃봉오리에서 피어난 푸르른 꽃잎에는 아드리아스가 숨겨 두었던 이중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