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대련
세레나와 크리스는 잠시 대답을 잊고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 말은 대련을 받아 주겠다는 말이오?”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크리스는 조금 전의 아드리아스가 내뿜은 기운은 잊었다는 듯 몸을 풀기 시작했다.
“크리스. 안 돼. 우리 상대가 아니야.”
“거기 신입생. 그쪽도 나랑 대련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
아드리아스가 세레나를 집어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했다.
아드리아스는 분명 대련이라고 했다.
대련이라면 상대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었다.
‘대신 참관자가 필요한데…….’
만약 어찌저찌 참관자를 구한다고 치면.
오히려 이건 기회이지 않을까?
‘아드리아스 선배와의 대련은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사실 아드리아스의 안 좋은 소문과 크리스의 성격으로 인해 대련과 같은 점잖은 형태의 싸움이 아닌 교칙에 어긋나는 다툼을 예상했었다.
애초에 그래서 크리스를 말리러 온 거였고.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판을 깔아 준다면 그녀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마법과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희귀한 케이스.
그런 사람과의 대련 경험은 분명 성장을 위한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짙은 미소가 입가에 새겨진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가자고.”
* * *
아이비 클레어는 한밤중의 호출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부른 인물이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는 것을 알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오밤중에 사람을 부르고 지랄이야.’
만약 예전에 다짜고짜 의심을 하며 무례를 저질렀던 일만 아니라면 그냥 무시했을 호출이지만 그녀는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다.
아마 아드리아스도 그런 점을 노려 자신을 불렀겠지.
그녀는 무방비한 잠옷 차림으로 대충 머리만 묶고 검을 챙겨 방을 나섰다.
조교수 전용 숙소에서 나와 아드리아스가 부른 연무장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아드리아스와 최근 들어 눈여겨보고 있던 신입생 둘이 몸을 풀고 있었다.
“왜 불렀냐.”
“오셨어요.”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뒤이어 세레나와 크리스가 그녀의 등장을 눈치챘다.
“아이비 조교님! 안녕하십니까!”
“참관 자격으로 왔다고 보기에는 옷차림이 껄끄럽지만 어쩔 수 없겠지.”
아이비는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다.
자신을 부른 이유는 둘째 치고 이 병아리들은 왜 같이 있는 거지?
그녀도 아드리아스의 소문은 들었다.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특이체질.
그동안 의심스러웠던 그의 운동 능력이 해명되는 이야기였다.
‘설마…… 대련?’
그 외에는 딱히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추측이 맞았다는 듯 곧바로 아드리아스가 말했다.
“지금부터 이 둘이랑 대련을 하려고 하는데 참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주 제멋대로 불러 놓고 제멋대로 얘기하네.”
“안 될까요?”
“안 되긴 뭘 안 돼. 이미 나왔는데.”
말은 거칠게 했지만 내심 궁금하기는 했다.
그녀도 실제로 아드리아스의 실력을 본 것은 아니기에 과연 저 신입생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 궁금했다.
‘쟤네들은 1학년이라고 보기 힘든 실력들이란 말이지. 단전이 있다고는 해도 체계적으로 검을 배운 적 없을 아드리아스가 어느 정도 해낼까.’
그래도 소문대로라면 마법을 함께 사용하며 전투를 펼치는 아드리아스가 이길 확률이 높았다.
물론 검만으로는 둘 중 하나도 이기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는 아이비였다.
“그럼 참관인도 구했으니까 대련을 시작해 볼까.”
“누구부터 할 건데.”
아이비의 물음에 세레나와 크리스가 서로를 바라봤다.
이내 상의를 하려는 둘 사이를 아드리아스가 끼어들었다.
“누구부터 하다니요.”
아드리아스는 연무장에 있는 대련용 철검을 들어 가볍게 휘두르며 말했다.
“둘 다 한 번에 해야지.”
갑작스러운 아드리아스의 말에 말을 듣고 있던 셋은 벙찐 표정으로 아드리아스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지금 둘 다 한 번에 상대하겠다는 거야?”
“예.”
그 말을 듣고 있던 크리스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대련용 철검을 집어 들었다.
“아주 기고만장하군. 당신은 나 혼자로도 충분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레나도 아드리아스의 말에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그의 실력을 알고 있지만 2 대 1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과 크리스라면 아무리 대단했던 아드리아스라도 버겁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상대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나와 크리스도 어디 가서 무시 받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야.’
그러나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난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도 할 일이 많은데 굳이 시간을 내준 거다. 둘이서 한 번에 덤빌 게 아니라면 대련은 없던 일로 하지.”
그의 말대로 대련을 해 주는 주체는 아드리아스였다.
세레나와 크리스가 원해서 해 주는 대련인 이상 그의 조건을 따라 줘야 했다.
“어쩔 거야. 할 거야, 말 거야.”
철검을 빙빙 돌리며 삐딱하게 말하는 아드리아스를 본 크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서도 이길 수 있는 상대를 굳이 세레나와 함께 협공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렇다면 대련을 포기하고 말지…….
“할게요!”
돌연 옆에 있던 세레나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크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 했지만 세레나의 뒤이은 말이 한발 앞섰다.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경험은 아마 대부분 없겠죠. 전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크리스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확실히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루이스조차 이 녀석에게 무시당했었지.’
비록 2 대 1이라고 해도 루이스조차 거절당한 경험을 자신이 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월감이 느껴졌다.
물론 쓸데없는 감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우월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후우. 하는 수 없지. 한 수 부탁하오.”
결국 생각을 돌린 크리스가 철검을 진지하게 고쳐 들었다.
옆에 있던 세레나도 자신의 몸만 한 크기의 대련용 대검을 들고 자세를 잡자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아이비 조교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네가 개처맞는 모습 잘 지켜보마.”
아이비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럼 지금부터 나, 아이비 클레어의 참관 아래 아드리아스 크롬웰 대 크리스 유노르, 세레나 에레스티얼의 대련을 시작하겠다.”
양측을 확인한 아이비가 소리쳤다.
“대련 시작!”
* * *
2 대 1이라고 했지만 먼저 달려오는 것은 크리스였다.
막상 대련이 시작되니 약속과는 달리 세레나는 뒤로 한 발 물러나 있는 게 보였다.
‘괘씸하네.’
물론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다.
아마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데 그 생각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지려나?
‘두들겨 맞다 보면 비겁하다, 뭐다 하는 생각도 없어질 거다.’
그렇다면 우선 이 녀석부터 교육시켜야겠군.
크리스의 검은 정직했다.
정직한 만큼 정석적으로 강한 검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와의 상성은 좋지 못했다.
‘전투 재능을 가진 내 눈에는 훤히 보인다.’
나는 달려드는 상대에게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회피하기만 했다.
그러자 크리스는 점점 동작이 커지더니, 이내 마나까지 사용했다.
후아앙―!
대련용 철검이라고는 해도 마나에 둘러진 상태로 맞으면 꽤나 아플 거다.
만약 마나로 신체를 활성화하고 있지 않다면 내장이 파열되고 뼈가 박살 나겠지.
나는 여전히 여유롭게 그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피하는 걸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 슬쩍슬쩍 발이나 주먹을 뻗었다.
파악!
피하면서 걷어찬 로우킥에 크리스가 휘청거렸다.
이어서 연달아 뻗은 주먹을 간신히 피해 낸 크리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혼자서도 이길 수 있다며. 그 자신감은 어디 간 거야?"
도발을 해 보았지만, 크리스는 예상과 다르게 그 이상으로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대련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났다.
“후우.”
생각보다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이쯤 하면 약이 오르거나 흥분해서 날뛸 줄 알았건만.
‘역시 플레이어블은 플레이어블이네.’
루이스의 후광에 가려졌지만 그도 엄연한 플레이어블.
한때는 내가 주인공으로 만든 적이 있던 캐릭터였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숨겨 둔 수를 꺼내지 않아서 침착할 수 있는 거겠지.’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마음의 여유가 있는 모양인데…….
과연 언제까지 침착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휘이―잉.
크리스가 검을 고쳐 잡으며 그동안 보여 주었던 자세와는 다른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세레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유노르 검법…….”
좋아. 드디어 본 실력을 드러내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나도 진지하게 임해 주지.
크리스가 들고 있는 검이 자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노르 검법의 특징은 쾌검이 섞인 환검.
‘하지만 지금의 크리스는 이도 저도 아닌 검을 사용하지.’
내가 알기로 그는 지금 과도기적 시점이었다.
그 누구보다 가문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런 가문의 검법으로 루이스를 뛰어넘지 못해 검의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
‘이번 기회에 내가…….’
방향을 잡아 주마.
솔직한 말로 검에 대해서라면 나보다 크리스가 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그는 무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검을 잡아 온, 일평생을 검에 바친 남자.
그러나 단 한 가지.
내가 그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나는 크리스의 끝을 봤다.’
크리스를 플레이 하며 그 성장의 끝을 보았다.
그렇기에 그가 최종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이미 알고 있는 셈.
위이이이잉―!
크리스의 검이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며 마치 매미의 날개 비비는 소리와 같은 소음이 연무장을 뒤덮었다.
엄청난 횟수로 떨리는 그 검은 이내 촤르륵 펼쳐지며 부채꼴을 그렸다.
‘유노르 검법의 환검. 검의 울음.’
마치 수백 개의 검에 휩싸인 형태가 된 크리스는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상대 검술의 파훼법을 알고 있었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크리스의 환검이기에 통하는 파훼법.
시커먼 마나에 휩싸인 내 대련용 검이 묵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내 첫 공격이자 ‘검의 울음’을 부숴버릴 한 수.
콰드드드득!
수십, 수백 번의 충격이 검을 타고 팔을 두드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게 정답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콰가각― 쨍!
단순한 내려 베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지점을 공격해야 하기에 아마 보통의 사람들은 따라하지 못할 거다.
자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운동 재능과 전투 재능을 가진 나이기에 억지로 성공한 파훼법.
부서져 내리는 대련용 검의 파편 사이로 크리스의 경악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