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본선 그리고 등장
호산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니켈의 나태가 끝이 났다.
“커헉.”
각혈을 하는 호산의 앞으로 니켈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열기로 인해 아직까지 김이 나는 몸을 이끌고 호산을 마무리 짓기 위해 움직였다.
삐걱대는 몸뚱이였지만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칼질 한 번 못 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크흐흐흐. 커흡.”
“뭐가 그렇게 웃기냐. 죽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해서 믿기지가 않냐?”
내가 비꼬듯 말하자 몸의 삼분지 일이 반쯤 갈라져 굳이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죽을 것 같은 호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을 거라, 푸헉, 흐으.”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 호산을 바라보다 그대로 심장을 찔렀다.
호산은 미소 짓고 있는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표정으로 뒤지면 죽인 보람이 없잖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리며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 난리가 났네.”
웃으며 죽은 호산을 보자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지랄까지 해 가며 싸웠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실력이 성장했다는 걸 확인한 셈인가.
거 참, 한 번만 더 실력을 확인해 봤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군.
빠지는 힘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빌어먹게 예쁜 하늘이었다.
“너네도 고생했다.”
나는 언데드들을 역소환시키며 천천히 감기는 눈을 의식했다.
이대로 눈이 감기면 기절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버틸 수가 없었다.
“나도, 고생했다.”
눈이 감기고 어둠이 반겨 왔다.
* * *
퍼펑! 펑!
요란한 폭죽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은 춘계 토너먼트 본선이 열리는 날.
아카데미 재학생들에게는 연말 축제보다 의미 있는 행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번 우승자는 누구일까.”
“보나 마나 기사학부 졸업반 중 하나겠지. 그 누구더라 토들론이었나? 그 사람이랑 다잠이라는 선배가 유력하다던데.”
“야. 너 예선 못 봤지?”
“응. 근데?”
“이번 토너먼트에서 어쩌면 12년 만에 다시 마법학부에서 우승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던데.”
“뭐? 아! 설마 디에네 알븐?”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던 세레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동안 아카데미에 적응을 한다는 구실로 단련만 해 오던 그녀는 토너먼트 예선을 보지 않은 상태였다.
‘디에네 알븐이라…….’
제국의 기둥 중 하나인 알븐 공작가.
마법으로 명성이 드높은 가문답게 공작의 둘째 딸, 디에네 알븐은 세레나도 자주 들어 봤을 정도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도 토들론 선배를 이기기는 힘들 거 같은데.’
화력 자체는 당연히 마법사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마법은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을 때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
토너먼트와 같은 일대일 대전에서는 기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 단련을 하며 알게 된 여러 선배들을 떠올리자 그녀로서는 마법사가 이길 수 있는 장면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나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본 적은 없지만.’
오러 러너, 오러 유저, 오러 익스퍼트 그리고 오러 마스터까지.
사실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경지인 오러 마스터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공식적인 경지였지만 간단한 구분을 위해 기사들끼리 정해 놓은 구분이었다.
그녀의 경지는 현재 오러 유저.
물론 같은 경지 내에서도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사람마다 보유한 마나의 양은 제각각이고 그 활용도도 제각각.
게다가 육체 능력이나 그 외에 전투적인 센스, 검술에 대한 감각 등 고려해야 할 능력이 너무 많았다.
사실 가장 직관적인 건 직접 겨뤄 보며 순위를 정하는 것.
그러나 실질적으로 모두가 한 번씩 싸워 볼 수는 없으니 대략적인 구분을 지은 것뿐이었다.
신입생들 중에서도 익스퍼트의 경지라고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루이스 아트만…….
“미안. 오래 기다렸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생각을 하자마자 왔다.
세레나뿐만 아니라 루이스도 매일같이 단련에 빠진 탓에 예선 경기를 모두 놓쳤다.
덕분에 본선만은 꼭 봐야 한다며 함께 하기로 한 상태였다.
“나도 왔지롱.”
“이런 건 같이 보러 가야지!”
루이스만 온 줄 알았더니 그 옆으로 주렁주렁 다른 녀석들을 달고 왔다.
반쯤은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세레나는 단둘이 토너먼트를 구경할 기회를 놓친 기분이라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알았으면 됐어. 빨리 가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누구든 루이스의 빛을 보게 된 순간 그 눈부심에 눈이 멀어 버린다.
그는 곧 빛에 매혹되거나, 도리어 눈이 부시게 만들었음을 증오하거나 둘 중 하나로 갈린다.
‘대부분은 저렇게 그리고 나처럼 매혹되지만…….’
가끔은 증오로 뭉친 크리스 같은 녀석이 나타나기도 한다.
생각을 하는 도중 대경기장 관람석에 들어서자 수많은 관중들이 눈에 띄었다.
그 엄청난 인파에 평소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었다.
“야! 저기 봐! 클로슈의 붉은 사자 기사단 단장 빌버트야!”
“넌 그게 먼저 보이냐? 바로 옆에 로열나이츠 부단장 미트라 도데가 있는데.”
“그 사람은 부단장이잖아!”
“야. 그래도 일개 기사단 단장하고 황실 기사단 부단장이 같냐?”
“일개 기사단이라니! 붉은 사자 기사단이 전국 몇 위에 랭크된 지 알아?”
귀빈석으로 만들어진 자리에는 그야말로 쟁쟁한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일행들이 말한 인물들을 제외하고도 유명한 마법사나 고위 귀족 가문의 가주, 혹은 인재를 원하는 여러 단체의 장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자 루이스 일행들은 가슴에 불이 지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라도 마음 한편에 공명심과 인정 욕구를 쌓아 두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저 유명인들 앞에서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아드레날린이 폭발할 것만 같은 흥분을 안겨 주었다.
“아쉽다. 신입생도 참여 가능하게 해 주지.”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일행들의 심정을 표현해 주었다.
이내 대화를 잠시 멈추고 앉을 곳을 찾은 그들은 간신히 자리를 잡아 앉았다.
“세레나.”
“응?”
“넌 이번 토너먼트에 누가 우승할 거 같아?”
“글쎄다. 솔직히 예선을 못 봐서 확답은 못 하겠는데 아무래도 토들론 선배가 우승하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디에네 알븐도 말하더라. 꽤 유력한 모양이던데?”
“디에네 알븐.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알아?”
“당연히 알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예전에 한 번 마법 견학을 한 적이 있거든. 그때 본적이 있는데 대단하긴 하더라.”
루이스의 시선이 경기장 내부로 향했다.
그리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안 그래도 이번 경기가 디에네 선배 경기인데 잘됐네. 실력 구경 확실하게 하겠는데?”
“상대는 누구지?”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이제 곧 시작 시간인데.”
“혹시 아는 사람?”
세레네의 물음에 함께 온 학생 중 하나가 말했다.
“같은 마법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드리아 크롬웰이었나?”
“아드리아스 크롬웰.”
루이스가 갑자기 경직된 얼굴로 이름을 중얼거렸다.
세레나는 그런 루이스의 반응에 장난스럽게 말했다.
“잘됐네. 우리 천하의 수석님께서 그렇게 강하다고 말한 아드리아스 선배의 실력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돼서.”
“뭐? 루이스가 그런 말을 했어?”
그때 다시 한 번 화려한 마법 폭죽이 터지며 토너먼트의 시작을 알려 왔다.
“시작한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토너먼트 본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 *
귀빈석에는 대륙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결승전이 열리는 날에는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귀빈석, 그중에서도 꽤 높은 상석에 앉은 바하트가 자신에게 건네지는 인사들을 대충 받아쳐 주며 자신의 딸을 보았다.
‘어느새 저리 자랐는지 세월이 참 빠르군.’
그때 앞자리에 있던 그셰인 마탑의 마탑주, 아지크 나탄이 말을 걸어왔다.
“정말 부럽습니다. 마법사로서 본선에 올라가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데 따님께서는 무려 강력한 우승 후보이시니, 제 아들도 로들렌 탑주님의 따님분의 반이라도 쫓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확실히 내 딸이지만 대단하지. 디에네는 나를 뛰어넘는 위대한 마법사가 될 거다.”
“예? 그, 그렇군요. 그런데 탑주님께서도 그리 고명하신 대마법사이신데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습니다. 물론 제 자식을 이기는 아버지가 없긴 합니다만. 하하하.”
“아니. 디에네는 10년 정도만 있으면 나를 따라잡을 거다. 어쩌면 그보다 빨리 따라잡을 수도 있겠지.”
“예에…….”
아지크는 바하트의 엄청난 팔불출에 원래 그가 이런 성격이었나 싶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디에네의 건너편에 있는 상대 출전자에 대한 의문을 드러냈다.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상대가 나오질 않는군요. 어디 보자…… 아드리아스 크롬웰?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군요. 오? 마법사? 올해에는 마법사들이 꽤 본선에 올라온 모양입니다.”
“흠…….”
바하트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도 내심으로는 아드리아스가 왜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은 건지 궁금했다.
‘포기한 건가?’
최근에 보았던 그의 모습이면 싸우고 지면 졌지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준비가 늦는 건가.
하긴 디에네를 상대로 두고 긴장이 많이 되기는 할 거다.
“아무래도 탑주님의 따님분을 두려워해서 기권한 거 같은데……. 솔직히 같은 마법사라면 탑주님의 따님을 상대로 제대로 실력이나 내보일 수 있겠습니까?”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들렌 제국의 옆에 붙어 있는 베르트랑 왕국의 왕실 마법사 호이야드였다.
그도 로들렌 아카데미 출신으로서 나름 명성을 날린 마법사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미 본선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마법학부 학생으로서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한 가지 아쉽다면 출전 거부가 아니라 직접 나와서 경기 기권을 하는 게 좋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바쁘신 분들인데 괜한 시간 낭비가 되고 있군요.”
바하트는 아지크와 호이야드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오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디에네를 보았다.
디에네의 모습은 그 어떤 상대가 오더라도 마땅히 준비가 되어 있는 엘리트 마법사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겼다.
‘하지만 아드리아스 녀석도 묘했지.’
심장과 단전의 경계가 없어진 괴이한 마나 저장소.
거기다 자신의 창고에서 검을 고르기까지 한 그를 생각하면 숨겨 둔 한 수가 있을 터.
물론 자신의 딸이 질 거라는 생각은 1도 못 했지만 한 수가 있는 아드리아스가 기권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아니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 위해 기권을 할 수도 있겠구먼.’
만약 그게 맞다면 얌체 같은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자신을 이곳에서 기다리게 하고 무엇보다 디에네를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은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제58회 춘계 토너먼트 본선이 시작되겠습니다!”
펑! 퍼펑!
곧이어 사회자의 진행과 함께 토너먼트의 시작을 알려 왔다.
그때까지도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로들렌 아카데미의 교장님이시자 저명한 학자이신 데오스 캐니언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이제 저 연설이 끝나면 정말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데오스는 연설 시간이 정말 짧기로 유명한 교장이었다.
“음,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1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내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흰 수염을 길게 빗어 낸 인자한 외모의 교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연설을 끝마쳤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짧은 연설이 끝나자 드디어 사회자가 첫 시합의 참가자들을 호명했다.
“청코너입니다. 대 알븐 공작가의 딸이자 위대하신 로들렌 마탑주님의 재능을 이어받은 천재 마법사! 디에네 알븐 선수입니다!”
“와아―!”
수많은 함성이 사회자의 목소리를 가려 버릴 정도로 호응이 대단했다.
디에네 알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 외모와 재능이 유명했던 디에네를 향한 대중들의 반응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코너! 최근 에버라스트 포션을 만들어 내며 포션 제작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마법사! 아드리아스 크롬웰!”
사회자가 힘껏 외쳐보았지만 적코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관중석에서도 그를 의아하게 여겨 약간의 소란이 벌어질 때 사회자가 애써 수습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선수! 안 계십니까? 만약 이대로 3분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권 처리가 되고 승자는 디에네 알븐 선수로 마무리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관중석에서 야유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기를 보기 위해 온 그들에게는 기권패란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디에네도 나타나지 않는 아드리아스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겁먹고 도망친 건가?’
진짜로 그런 거라면 최근에 좋게 봤었던 그의 평가를 다시 낮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지는 경기라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에게는 한없이 냉혹해지는 디에네였다.
‘기말 평가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더 이상 진행을 늦출 수 없는 사회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3분이 지났습니다. 아무래도 아드리아스 선수는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승자는…….”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디에네의 음성에 사회자의 말이 끊겼다.
디에네는 그런 사회자를 보며 손끝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쫓자 그곳에는 달려온 듯 숨이 차 하는 아드리아스가 등장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었군요.”
아드리아스의 모습을 본 모든 관중들과 사회자 그리고 디에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마치 전장에라도 다녀온 듯 옷이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으며 성한 구석이 없을 정도로 온몸이 상처로 빼곡했다.
특히 볼에 생긴 심한 자상이 유독 인상을 거칠게 만들었는데, 아드리아스는 가볍게 숨을 고르고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