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탐욕의 파편
어쩌다 표인족들과 함께 흑마법사 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라녹스가 뭘 노리고 크라테스 산맥에 온 건지 궁금했기에 나쁘지 않은 우연이었다.
‘만약 죄악에 대한 단서라도 얻게 되면 베스트인데 말이야.’
10명의 표인족들은 견인족에 비해 후각이 발달한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흔적을 쫓을 정도로 감각이 좋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던 나는 꽤 멀리까지 와서 갑자기 멈춰 선 표인족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흔적이 끊겼소. 마치 하늘이나 땅으로 꺼진 것처럼.”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일단 여기서부터는 마나 디텍트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마나 디텍트로도 걸리는 게…….’
그러던 중 무언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마치 일그러진 듯한 마나가 어느 나무에서 느껴졌는데 마나 재능으로 인해 마나가 어렴풋이 보이는 게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흔적이었다.
나무에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자 그 흔적은 그 뒤쪽에 있는 또 다른 나무와 이어져 있었다.
‘이 형태는…….’
결계인가?
나무에서 나무로, 그 뒤에 또 다른 나무로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일그러진 마나의 흔적을 보자 대충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나는 검을 뽑아 들어 마나를 검에 두르고 그대로 휘둘렀다.
콰가가각!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검이 튕겨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나 충격이었다.
‘나도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네.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표인족들은 우르르 몰려와 신기하다는 눈으로 내가 베려 한 나무를 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결계인 것 같다. 아마 이곳에 곤충들을 다루던 녀석이 숨어 있겠지.”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결계의 완성도를 보면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표인족의 마을도 그렇고 이 결계도 그렇고. 게임 속에서는 없던 것들이 과거에는 꽤 있었나 보네.’
게임을 많이 클리어했지만 모든 일들을 아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그것이 게임 시작 이전의 시간대라면 더더욱.
“실종자가 생긴 건 최근인가?”
“그렇소. 며칠 되지 않았소.”
그때 결계를 뚫고 뭔가가 튀어나왔다.
곤충의 앞발 같았는데 순간적인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다.
“적이다!”
표인족들이 각자 전투 준비를 하며 평범해 보이는 숲을 바라봤다.
분명 겉으로는 아무 이상 없는 숲이었지만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오듯 무언가가 걸어 나왔다.
‘아까 그 녀석이군.’
근데 한 놈이 아니었다.
무려 두 마리나 되는 갑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바글거리는 곤충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라녹스가 어떠한 의도를 지니고 크라테스 산맥에 온 줄 알았는데 병력의 수를 보니 애초에 그의 본거지가 여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후에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면 라녹스가 표인족의 마을을 없애 버리고 거처를 바꿨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적의 수가 너무 많다! 자드비혼! 당장 마을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대피명령을 내려라!”
표인족 중 하나가 죽을 각오를 하며 소리쳤다.
적들의 수를 보면 그의 말이 이해가 가기는 했다.
이건 도저히 마을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의 외침은 곧 벌레들의 소음에 묻혀갔다.
파르르.
위잉.
“우리는 여기서 목숨을 바쳐서 마을을 지킨다!”
표인족 하나가 포효를 내지르며 곤충들과 격돌했고 나머지도 그의 뒤를 따라 차례차례 몸을 던졌다.
“꼭 죽을 것처럼 말을 하는데…….”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갈락슈르를 뽑아 곤충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왕 깽판 치기로 한 거 제대로 한 번 보여 주지.’
나는 마침 갑충의 공격을 받아 위태로워 보이는 표인족에게 곧바로 니켈을 소환해 보냈다.
어차피 가면도 쓰고 있겠다, 이런 마경에서 살아가는 녀석들에게 네크로맨서인 걸 들켜도 상관없었다.
휘익― 깡!
“으헉!”
갑작스러운 니켈의 등장에 깜짝 놀란 표인족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내 갑충을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니켈을 보던 그는 상황을 고민하기도 전에 곤충들의 파도에 휩쓸려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티무르까지 소환했다.
그리고 티무르에게는 잡스러운 곤충들을 맡기고 남아 있는 갑충에게 달려갔다.
‘실력 테스트나 해 볼까.’
여러 마리가 뭉치면 오러 마스터 하나도 상대할 실력이라는데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이나 해 봐야겠군.
나는 저공비행을 하는 녀석에게 곧바로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순식간에 공격을 피한 녀석은 네 개의 주먹을 날려 왔다.
비행이 빠를 뿐 주먹은 느린 편이어서 막아 내고 피한 다음 뒤로 물러났다.
‘저 날개가 문제네.’
날개로 인한 고속 비행은 내 예상보다 빨랐다.
하지만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면 녀석에게도 제약이 있어 보였다.
쇄액.
순간 상대가 엄청난 속도로 몸통 박치기를 날려 왔다.
녀석도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몸통째로 부딪히는 게 효율적이라는 걸 아는 모양인지 꽤나 위협적으로 날아왔지만 직선으로 정직하게 날아오는 공격에 맞아 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확실히 강하기는 한데…….’
뭔가 부족했다.
겨우 이 정도 수준으로 몇 마리가 뭉쳐서 오러 마스터를 잡는다고?
내가 볼 때는 아직 라녹스의 실력이 낮을 때 찾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는지 저 멀리 니켈을 상대하던 갑충은 어느새 사지가 분해되고 날개까지 잘려 나간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니켈.”
나는 니켈을 불러 내가 상대하던 녀석도 넘겼다.
굳이 상대할 필요도 못 느낄 정도로 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표인족들이나 돕기로 했다.
그때였다.
쿠아앙!
굉음과 함께 티무르가 뒤로 밀려나는 게 보였다.
마치 힘겨루기를 하듯 티무르가 붙잡고 있는 적은 내가 상대했던 갑충과 같은 녀석이었지만 그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저건 또 언제 튀어나온 거야?’
내 감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티무르가 상대하던 갑충이 주먹을 연속을 날려 왔다.
색만 다를 뿐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티무르가 힘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쾅!
이내 한 대 얻어맞은 티무르가 나무에 처박혔다.
저게 진짜인가?
이내 내가 상대하던 갑충까지 처리한 니켈은 망토처럼 어깨에 걸친 도복을 흩날리며 티무르를 날린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도 니켈에게서 위압감을 느낀 건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갑자기 둘 사이 분위기에 초 쳐서 미안한데…….”
[하급 사령술: 구울 소환을 시전합니다.]
[시체 163구가 감지됩니다.]
[시전자의 역량이 부족합니다. 82구가 반응합니다.]
[하급 사령술: 구울 소환 성공]
[벌레형 구울(일반) 82구를 소환했습니다.]
“난 다구리가 주특기거든.”
주변에서 일어난 곤충 시체들이 이내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곤충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중 절반에 가까운 숫자는 색이 다른 갑충에게 몰려들었다.
갑충은 공기 터트리는 소음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벌레형 구울들을 떼어 냈지만, 그 사이 유체화를 사용하여 다가간 니켈에게 일검에 목이 잘려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비겁하네.’
그래도 상대의 숫자가 더 많았으니 그렇게 비겁한 건 아닐지도?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남은 곤충들을 으깨 죽였다.
라녹스는 자신이 만든 벌레들에게 애정이 많았는데 아마 지금쯤 피를 토하며 오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 당신은 도대체…….”
깔끔하게 적들을 분쇄해 나가는 나와 내 언데드들을 보며 표인족들이 멍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그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죽이지? 아직 꽤 남았는데.
* * *
원죄의 마나 회복 향상은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벌레들은 죽이고 다시 소환하고, 죽이고 다시 소환하기를 다섯 번 정도 반복하자 드디어 끝이 난 듯 잠잠해졌다.
초반에 갑충들을 니켈이 처리한 덕분에 표인족의 인원들도 죽은 이 하나 없었다.
여기저기 다치기는 했지만 저 많은 벌레들을 잡은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이 많은 수를 우리가 막았다는 건가.”
“이제 지겨울 정도야. 어서 몸을 씻고 싶어.”
“우리끼리 막을 줄 알았으면 자드비혼을 마을로 보내지 않았어도 됐겠어.”
그들은 이제 내가 언데드를 소환한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덕분에 살았는데 뭐라 할 처지가 아니겠지.
‘그나저나 라녹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네.’
안에서 울고 있으려나?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야 하니 결계가 쳐진 나무를 힘껏 두드렸다.
마나를 너무 쓴 모양인지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처음과 같이 튕겨져 나왔는데 니켈이 고개를 흔들며 내 옆으로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서걱.
간결하고 깔끔하게 베이는 나무를 보며 감탄이 나왔다.
분명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일까?
결계가 부서지자 감춰졌던 풍경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던 거대한 나무가 밑동에 동굴과 같은 구멍을 드러낸 채 음산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저기가 본거지인가.”
여기서부터는 표인족들을 떼어 놓고 싶은데.
“안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 나 혼자 들어가겠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희 마을의 은인을 혼자 사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어느새 존대를 하네.
그 반응은 고맙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간신히 살린 목숨을 허무하게 날리겠다고? 일 없다. 정 불안하면 따라오지는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곁에 선 니켈과 티무르를 가리켜 보이며 문제없다고 말하자 결국 표인족들은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원하던 대로 표인족들을 놔두고 나무 밑동으로 들어가자 끈적한 체액 비슷한 것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새끼로 보이는 벌레 몬스터들이 후다닥 도망가고 있었다.
‘역시 여기가 라녹스의 던전이 맞았나 보네.’
언제 이사를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태를 보면 여기서 꽤 오래 지낸 듯하다.
그동안은 조용히 지내 놓고 왜 갑자기 표인족들을 공격했을까.
자잘한 벌레의 습격들을 니켈과 티무르로 막아 내고 던전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온갖 몬스터와 짐승들의 시체는 물론, 인간과 이종족들의 시체도 보이기 시작했다.
대충 살펴보자 시체를 이용해 벌레를 사육하고 있던 모양이다.
‘사냥감이 부족해져서 표인족을 공격했던 건가?’
이유야 상관없었다.
나랑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후일 걸림돌이 될 라녹스를 일찍 퇴장시키는 게 내 목적이었다.
“어이. 어디 숨어 있냐?”
나무의 밑동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티무르의 후각을 믿고 계속해서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도망치는 건 아닐까 염려됐다.
한참을 걸어가며 틈틈이 마나 디텍트를 사용하던 중에 드디어 기척이 잡혔다.
나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달려갔다.
라녹스는 여타 소환사들과 마찬가지로 본신의 공격력은 0에 수렴하기에 곤충들을 대부분 죽인 이상 위험할 게 없었다.
“여기 있었네?”
“넌 대체 누구냐! 왜 같은 흑마법사인 나를 공격하는 거냐!”
쭈글쭈글한 외형의 라녹스가 억울하다는 듯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나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설마 집회 소속이냐? 가입을 미뤘다고 보복하러 온 건가?”
“뭐야. 너 집회 소속 아니었어?”
난 당연히 라녹스가 집회 소속인 줄 알았는데 아직 가입하기 전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런 내 물음에 오히려 라녹스가 놀랐다.
“집회에서 온 게 아니야?”
그 순간, 몸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며 메시지가 떴다.
[‘순수한 원죄’가 ‘자선하는 탐욕’의 힘을 느낍니다.]
탐욕?
여기서 갑자기?
내게 원죄가 있어서 그런가.
나는 본능적으로 라녹스가 소유한 물건 중 탐욕의 페이지와 관련된 물건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를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질문을 했다.
“집회 가입을 권한 자가 누구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집회가 아니라면 네 정체가 뭐냐!”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죽이기 전에.”
“헤이겔이라고 했던 것 같다. 제발 살려 줘.”
헤이겔이 여기까지 왔었던 건가.
녀석을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의 실력이라면 녀석에게 졌겠지.
‘저번 집회에는 안 나왔었지만 최상위의 실력을 자랑하는 흑마법사.’
나는 원하던 대답을 듣고 검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갖고 있는 물건들, 지금 여기 다 내놓아라.”
“아, 알겠다.”
그는 로브를 뒤지며 이것저것 바닥에 던져 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서 탐욕의 페이지와 관련이 된 게 있나 찾아보았는데 여전히 탐욕의 기운은 라녹스에게서 흘러나왔다.
“이게 다야. 더 이상 없어.”
“거짓말을 하고 있군.”
팍!
“끄아악!”
어깨를 검으로 쑤셨다.
그러자 라녹스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알았다! 기다려! 제발 살려 줘!”
사실 그냥 죽이고 뺏을 수도 있지만 나는 녀석이 그 물건을 어디서 구했는지까지 알아내고 싶었기에 참았다.
이내 라녹스는 품속에서 핏빛의 보석을 하나 꺼냈다.
‘저거다.’
[자선하는 탐욕의 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