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바하트의 심정 그리고 크라테스 산맥
아드리아스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바하트의 눈에는 은밀한 마법이 발동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변하는군.’
사실 처음 아드리아스와 내기를 했을 때도 눈치채지 못하게 마법을 사용했었다.
그 당시에도 마나 저장소가 두 개가 있는 걸 보고 의아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몸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냐, 아드리아스 크롬웰.’
원죄는 밝혀지지 않은 게 많았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기능들도 많을 거라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바하트는 굳이 아드리아스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원죄를 지녔어도 숨겨 줄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황제는 변했다.’
젊었을 적에는 총명했던 황제도 권력을 지닌 채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자 점차 변했다.
그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케인 크롬웰을 토사구팽한 사건.
물론 많은 이들은 모르는 은밀한 사건이었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하트로서는 고개가 저어지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보고도 황제에게 충성을 한다는 건 어리석지.’
충실한 신하를 내다 버리는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성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바하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오히려 그는 케인을 지켜 주지 못한 점에 대해 죄책감마저 품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동안 아드리아스와 에이미를 남몰래 돌봐 왔지만…….’
황제의 마수로부터 은근슬쩍 지켜 왔었다.
다행히 자신의 능력은 대단했고 로들렌 마탑주로서의 지위도 그를 가능케 했다.
덕분에 황제와의 사이가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알븐가의 가주로서 꿇릴 게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을 이번에 제대로 받았지.’
아드리아스 덕분에 자신의 자식들이 살았다.
사실 이번 테러 사건이 유야무야 종결된 것도 자신의 힘이었다.
물론 그 주도자를 찾아내는 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진행 중이었지만 아드리아스와 비비안에 대한 심문은 조기 종결시켰다.
‘설령 아드리아스 녀석이 수상하더라도…….’
자신의 오랜 친우를 결국 외면해 버렸다.
덕분에 후회가 가득했고 또 다른 후회가 생기지 않게 이번에는 아드리아스를 물밑에서 도와줄 것이다.
* * *
바하트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방 앞에는 계속 기다렸던 건지 조교가 서 있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 다시 1층의 홀로 돌아오자 아직까지도 기다리고 있던 루시아와 비비안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콩고물을 원해서 저렇게 기다리고 있냐.
“선배. 이상한 걸 받으셨네요.”
루시아의 시선이 내 허리춤에 달린 갈락슈르에 향했다.
그러자 비비안의 시선도 내 검으로 향했다.
“……예뻐.”
마음에 든 건가?
그래도 갈락슈르를 줄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감사의 의미로 검이나 하나 구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나에게 엮인 이상 그녀의 불행한 운명도 바꿔 보일 것이다.
이미 반쯤 바뀐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각종 검의 소재를 떠올리며 마탑에서 나왔다.
그나저나 이 둘은 언제까지 나를 쫓아올 셈이지.
“루시아.”
“네. 선배.”
“내가 최근에 포션을 연구하다가 실마리를 하나 잡았거든?”
“근데요?”
“네가 좀 연구해 봐라.”
갑작스러운 말이었을까.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갑자기요? 그것보다 그런 걸 저한테 막 알려 줘도 돼요?”
“어. 그냥 대충 감만 잡은 거라 별 의미도 없어.”
정말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게, 내가 줄 힌트는 그녀의 치료제에 관한 단서였다.
어차피 상업성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오히려 그녀에게 넌지시 알려 주어 그녀가 연구하게끔 하는 게 내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을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그래도 제작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때 내가 나서면 되는 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어차피 목적은 돈이 아니라 그녀를 살리는 거니.
“얼마 전에 우연히 폴락 개구리의 혓바닥 점액이랑 요정의 꽃가루를 섞었거든. 근데 거기다가 실수로 미트륨 용액이랑 슬라임 핵을 넣었는데 반응이 신기해서 말이야.”
“어쨌는데요?”
“잡아먹었어.”
“네?”
“특정 성질을 띠는 것만 잡아먹었어, 그 용액이. 그리고는 스스로 분해를 해서 없애 버리더라고.”
내 말을 들은 루시아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너 정도면 대충 감이 오지?
이게 네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말이야.
“근데 실수로 만든 거다 보니까 배합률을 기록하지 않아서 들어간 재료만 알고 있는 상태야. 그래도 뭔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선배. 죄송해요. 저 잠시 좀 먼저 갈게요.”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내가 말한 재료를 중얼거리며 연구실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하긴. 나였어도 급했을 거다.
사느냐 죽느냐가 달린 문제니까.
‘오히려 너무 늦게 알려 준 거 같아서 미안하네.’
루시아를 보냈으니 이제 비비안의 차례였다.
그동안 고민한 결과, 나는 그녀에게 결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속 시원히 털어 놓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마침 둘밖에 없으니 지금 이야기를 꺼내면 되겠지.
“비비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보았다.
테러 때 보여 주었던 그녀의 행동이라면 아마 대충 짐작은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말을 꺼내 봤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괜찮아. 아드리아스.”
비비안은 내 말을 끊더니 미소 지어 보였다.
“알고 있어. 아드리아스가 요정님인 거.”
역시 그랬나.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행동들이 설명되지 않지.
내가 말하려던 걸 그녀가 선수를 쳐 버리자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그녀를 보고 말했다.
“비비안이 어떻게 살아왔건,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나도야. 내 하나뿐인 요정님.”
뭔가 쑥스럽네.
나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이내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비비안은 조용히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그 모습이 내가 게임 속에서 알던 그 비비안이 맞나 싶었다.
‘운명이란 건 알 수가 없네.’
나는 그 길로 비비안과 헤어진 뒤 기숙사에 들러 공간 확장 가방을 들고 곧바로 크라테스 산맥 방향으로 출발했다.
‘데슈른 폴론. 어디 사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찾아가게 될 줄이야.’
그가 사는 곳은 마경이라 불리는 장소 중 하나인 크라테스 산맥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인 크라탄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괜히 마경이라 불리는 곳이 아닌 만큼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옆에 있는 봉우리인 빌레엄에는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숨겨진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었다.
비밀스러운 장소인 것 치고 그곳의 이름은 단순했다.
‘거인이 잠든 곳.’
히든 피스로 분류되는 장소라 찾는 게 조금 힘들 뿐 위험은 없었다.
원래라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미미한 곳이라 떠올리지 못했겠지만 데슈른의 거처로 인해 생각났다.
막상 떠올리니 내게 있어서 이만한 전력 보강의 기회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꼬박 12시간 정도를 열차에 몸을 싣고 있어야 하기에 책을 읽다가 문득 바하트가 건넸던 밀봉된 편지가 생각났다.
논공행상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들었는데 밀봉을 뜯자 의외의 글이 적혀 있었다.
‘크롬웰 백작가는 품위 유지에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므로 올해에 그 작위를 한 단계 낮출 것을 명하려 했으나 알븐의 가주와 클로슈의 가주의 의견 개진으로 내년까지 그 작위를 연장할 것을 명한다.’
개 같은 황제 새끼.
누구 때문에 우리 가문이 이 꼴이 났는데.
설마 작위까지 낮추려고 들 줄은 몰랐다.
‘물론 내려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비루한 신세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 내려간 건 아니니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그보다 바하트와 싱클레어 클로슈가 나를 도왔다는 게 눈에 띄었다.
단순한 호의인가, 아니면 죄책감에서 일어난 동정인가.
애초에 싱클레어도 아버지의 일과 연관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하다. 게임에서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네.
아무리 생각해도 아드리아스는 여타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비교해 뭔가가 달랐다.
우선 다른 캐릭터와는 다르게 죄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캐릭터라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그간 게임을 해 오며 가장 스토리와 밀접한 아이템이면서도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죄악을 보기만 한 게 아니라 무려 소유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그리고 그동안의 캐릭터들은 정치와 연관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공작들 중에서도 누가 황제의 파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제국이 죄악을 모은다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그렇게 온갖 추측과 추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자 금세 12시간이 지나 목적했던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차도 이제 신물 나네.’
그래도 마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승차감과 속도에서 견줄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크라테스 산맥은 마경. 웬만해서는 마차들이 승차 거부를 하겠지.’
일단은 갈 수 있는 데까지는 흥정을 해 보기로 하고 역 근처의 마차 대기소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죄송하지만 그쪽 방향으로는 안 갑니다.”
“돈을 더 주신다고 해도 목숨값에 비하면…….”
아예 그 방향으로는 말을 몰지 않겠다는 이들을 보며 결국 마시장에서 아무 말이나 한 마리 샀다.
그래도 꼴에 귀족이라고 기본적인 승마는 배웠기에 다행이었다.
대충 구한 지도를 확인해 보자 말을 몰아도 산맥의 초입까지 이틀은 걸릴 거리였다.
게다가 산까지 오를 생각을 하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아마 각종 마수들과 몬스터도 있을 텐데…….
‘지랄 맞네, 정말.’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별수 있겠나.
오랜만에 노숙을 할 생각에 아주 신이 났다.
* * *
제국 수도 내에 위치한 한 거대한 저택.
그 주인은 대륙 5대 상단 중 하나로 이름 높은 제레드 상단의 상단주이자 수도의 암흑가를 손에 쥔 제레드 테이슨이었다.
평상시에는 상단에서 일을 하느라 저택에 방문할 일이 거의 없는 그였지만 어쩐 일인지 며칠 전부터는 저택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후욱.”
연초 연기를 뱉어 내는 제레드의 앞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사내가 보고를 올렸다.
“아카데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쥐새끼가 굴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후우.”
다시 한 번 연초를 길게 빨고 뱉어 낸 제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히 제파르 님에게 올릴 공양을 망친 쥐새끼가 겁대가리가 없군. 아니면 우리가 얕보인 건가?”
제파르 님에게 바칠 공양이 실패했다.
게다가 계획을 망친 것만으로도 모자라 교단의 최정예 간부 중 하나인 파야트 코본까지 목숨을 잃었다.
그 덕분에 제국 내에서는 테러의 주모자들을 찾겠다며 들쑤시고 다니는 탓에 교단의 위세가 한풀 꺾이기까지 했다.
‘파야트의 공백으로 뮤리엘의 지분을 조금 차지한 건 좋았지만…….’
이 기쁨을 티 내서는 안 되겠지.
지금의 자신은 어디까지나 제파르 교단의 간부로서 분노를 해야 할 때.
아카데미 내에 숨어 있는 정보통으로부터 그날 공교롭게 심각한 부상을 입은 학생 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측에서는 테러에 대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용히 넘어간 모양이지만 제레드는 그 두 학생이 이번 계획을 망친 주범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고작 학생 두 명이서 파야트를 죽였을 리는 없으니 알려지지 않은 조력자가 있을 거다.
제레드의 분노에 찬 음성을 들은 하수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당장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 근데 좀 들어나 보자. 녀석이 어디로 향하고 있지?”
“마지막으로 전해진 정보로는 메르테옹 영지라고 합니다.”
“메르테옹?”
제레드는 전혀 의외의 이름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산골 오지에는 도대체 무슨 용무로 간다는 말인가?
메르테옹은 기껏해야 마경이라 불리는 크라테스 산맥과 가깝다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었다.
설마 크라테스 산맥에 가는 건가?
어째서?
“녀석이 메르테옹에는 왜 가는 거야?”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다. 확인한다고 뭘 알 수 있겠나.”
쥐새끼가 메르테옹을 가든 어디를 가든 상관없었다.
녀석과 기사학부의 비비안 벨로칸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실력자까지.
“감히 우리 교단을 건드린 자가 어떻게 되는지 온 세상에 공표하겠다. 녀석들의 뼈와 살로 내 반드시 제파르 님께 공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