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바하트의 창고 그리고 새로운 목표
“두 개를…… 만들었다는 말이냐?”
바하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말로 물어보기 위한 게 아닌 단순한 감탄사인 것 같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내가 만든 포션을 받았다.
“정말 놀랍군.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근데 그사이에 2종류의 포션을 만들다니.”
그는 새로 꺼낸 포션을 살피다 무언지 대충 감이 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딜론 포션의 부작용을 제거한 거겠군.”
“맞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바하트는 전과 같이 한 번에 포션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맛을 음미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겠다. 허허. 정말 기가 막히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바하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들린 포션 병을 들여다보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내 나에게 괘씸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두 개를 만들었다는 건 이미 진즉 하나는 완성했다는 뜻일 텐데 날 찾아온 건 올해 마지막 날이군. 그래. 내 카드로 뽕은 제대로 뽑았나?”
“덕분에 돈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 뻔뻔한 녀석.”
말과는 달리 유쾌한 표정으로 받아넘긴 그는 내가 내미는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래. 일단 내기에서 이겼으니 보상부터 줘야겠지.”
그리고는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는 모양인지 마나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보인다.’
마나의 유동이 희미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진화를 하며 얻게 된 ‘마나’ 재능 덕분이었다.
에픽 특성이었던 듀얼 코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그릇’이란 특성과 연관이 된 듯하다.
처음 보는 유니크 특성인 ‘그릇’은 말 그대로 몸 전체를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는 특성이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심장과 단전의 경계가 없어지고 몸 전체를 마나 저장소로 쓸 수 있는 상태였다.
‘이제 마법과 검, 모두 같은 마나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언뜻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꽤 큰 차이였다.
애초에 살렘의 마법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마나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진 셈이다.
그렇게 바하트의 마법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 배열이 끝난 마나로 술식이 완성되고 이내 공간 이동 마법이 사용됐다.
‘공간과 관련된 바하트의 마법은 알븐 가문에서만 전해지는 오리지널 마법이었지.’
마나 재능이 성장하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법들을 베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첫 번째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도 있던 재능인데 게임 속에서만 느꼈던 것과 현실에서 직접 느껴지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 사기성이 두드러진다고 해야 하나.
‘특수 기술로 죽을 뻔했던 게 오히려 사기적인 성장의 밑거름이 됐구나.’
아마 이 모든 게 특수 기술인 나태로 일시적으로나마 강대한 힘을 휘둘렀기에 가능한 거겠지.
물론 진화 특성이 없었으면 말짱 도루묵이었겠지만.
생각을 하는 와중에 장소는 창고로 보이는 곳으로 옮겨졌다.
이곳도 바하트의 집무실과 다르지 않게 온갖 잡동사니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 정리가 조금 된 모습이었다.
“우리의 내기는 새로운 포션을 만들어 내면 내가 아끼는 물건 하나를 임의로 주기로 한 거였지. 네놈이 2개를 만들었다고 내가 2개나 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노력한 보람은 있어야 하니 특별히 물건은 네가 고르게 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조금은 기대를 하고 두 개를 다 보여 준 건데 즉흥적인 성격의 바하트답게 통 큰 제안을 했다.
아마 그는 내가 물건을 볼 눈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이런 제안을 내놓은 거겠지.
하지만 어쩌나. 나는 아이템을 볼 수 있었다.
[크낙트의 저주받은 오르골]
[재생이 될 시 마력을 담은 음악이 나옵니다.]
[듣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기력해집니다.]
역시 보인다.
그건 그렇고 아끼는 물건들이라고 해 놓은 주제에 별 쓸데없는 게 많았다.
조금 실망하려는 찰나 드디어 제대로 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트라의 회중시계]
[마나 저장 기능 0/500]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꽤 유용할 것 같은 아이템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차지.
그 누구도 아니고 다름 아닌 바하트의 창고다.
대륙 최강의 마법사 중 하나인 그의 창고에서 이런 걸 골랐다가는 놀림받기 딱 좋았다.
‘너무 많은 것도 골치 아프네.’
창고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건들만 모아 놓은 듯 좋고 나쁜 물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하트의 창고는 게임에서도 와 본 적이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건…….’
그러던 중 쌓여 있는 물건을 헤집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는 발견한 아이템을 손에 들어 보았다.
[봉인된 검―갈락슈르]
[마나 전도율 73%]
[봉인되어 있습니다.]
검집과 함께 있는 허름한 검이었다.
그리고 이 허름한 외형과는 다르게 네임드급 아이템 중 하나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도 이름만 들어 본 아이템.’
설마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어떤 경위로 바하트가 이걸 소유했는지는 몰라도 내 마음은 반쯤 이 검에 기울었다.
내가 고르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바하트는 혀를 차며 다가왔다.
“네 녀석은 마법사라는 놈이 그런 걸 고르고 있느냐.”
“최근 검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아무래도 사고가 자주 발생하다 보니…….”
내가 갈락슈르를 선택할 것처럼 말하자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창고의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들고 왔는데 마법사용 로브와 길쭉한 지팡이였다.
“차라리 이 중에서 골라라. 그딴 걸 고르면 내 마음이 줘도 준 거 같지가 않아.”
그가 내민 아이템들도 훌륭한 아이템들이었다.
하여간 틱틱대는 행동과 달리 은근히 마음 약한 구석이 있었다.
‘저 성격을 보면 아마 아버지에게도 죄책감을 지니고 있겠지.’
그러니 내기를 한 거겠지.
실제로 내가 졌으면 퇴학을 시켰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건 자체는 바하트에게 훨씬 손해인 조건이었으니.
그래도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
“전 그냥 이 검으로 하겠습니다.”
“그게 뭔지 알고 고르는 거냐? 차라리 유명한 대장간에서 검을 맡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괜찮습니다. 정말 이게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겁니다. 후회도 제 몫이죠.”
그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대충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내가 든 갈락슈르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젊었을 적에 얻은 물건이다. 보기에는 허름해 보이지만 샤이야 사막의 이름 없는 던전에서 구한 거지. 그런 곳에서 구한 물건이니만큼 평범하지는 않을 거다.”
샤이야 사막은 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마경 중 하나였다.
사람이 생존하기에는 가혹한 기후와 날씨 그리고 때때로 일어나는 마나 이상 현상으로 평범한 사람은 발조차 들일 수 없는 험지였다.
그런 마경 속에서 발견한 던전이면 보통 던전은 아닐 거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갈락슈르를 발견할 수 있겠지.’
갈락슈르는 게임 속의 한 퀘스트에서 우연히 정보만 얻은 검이었다.
당시에는 한 번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조사를 하고는 했었는데 결국 검의 성능에 대한 정보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얻게 될 줄은 몰랐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니켈이 사용할 수도 있으니 좋았다.
나는 차고 있던 검과 함께 갈락슈르를 허리춤에 맸다.
낡긴 했지만 볼품없다기보다 고상한 품격이 느껴지는 모양새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쯧. 네가 그걸로 정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대신 나중에 와서 바꿔 달라는 말은 하지 말거라.”
“예.”
아마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바하트도 갈락슈르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중에라도 그가 이 검의 정체를 알게 되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봉인을 푸는 방법은 대충 알고 있다. 그때는 단지 검을 못 찾았을 뿐.’
물론 봉인을 푸는 방법도 까다롭긴 했다.
하지만 그를 감수하고서라도 봉인을 풀만큼 갈락슈르의 기댓값은 높았다.
물건을 고르고 나자 바하트가 다시 마법을 사용해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용무는 끝났군. 앞으로도 지켜보마.”
“예. 탑주님.”
“가기 전에 이걸 받아라.”
바하트가 건넨 것은 밀봉이 된 편지였다.
“이게 뭐죠?”
“이번 논공행상에 너에게도 서신이 갔지만 혼수상태라 내가 대신 일을 처리했다.”
“논공행상에 제가 불렸었군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 불렀던 거지.
일단은 편지에 적혀 있을 테니 나중에 읽어 보기로 했다.
내가 편지를 받아 품 안에 넣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바하트가 입을 열었다.
“방학 동안에는 뭘 할 생각이냐.”
도대체 뭐가 그리 궁금한 거지.
오늘따라 그의 태도가 조금 낯설었다.
마치 나한테 빚이라도 진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랄까.
“잠시 숨이나 고를 겸 여행을 다녀올까 합니다.”
“그런가. 여행, 여행이라…….”
갑자기 또 뭔데 그리 골똘히 생각을 하냐.
용무도 끝났으니 이제 슬슬 나가고 싶은데.
바하트는 갑자기 펜과 종이를 마법으로 가져오며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휘갈긴 종이에 알 수 없는 마법을 부여한 뒤 내게 건넸다.
“이왕 검을 받았으니 네 한 몸 지킬 정도의 검술은 익혀야겠지. 과연 네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마법으로 위치를 기록해 놨다. 거기 적힌 곳으로 가서 그곳에 사는 영감에게 종이를 건네라. 내가 보낸 걸 알면 귀찮아하면서도 한 수 정도는 가르쳐 줄 거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내려 종이에 적힌 내용을 봤다.
그리고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데슈른 폴론!’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러 마스터 중 가장 노련한 검객.
그가 오러 마스터가 된 지 벌써 50년이 넘어가고 있으니 살아 있는 오러 마스터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와도 연관이 있지.’
첫 번째 플레이어블 캐릭터, 루이스.
그 루이스에게 짧게나마 검술을 가르쳐 준 게 데슈른이었다.
물론 제자로 생각하고 가르친 게 아닌 단순한 심심풀이였다는 설정이지만.
그런 인물에게 바하트가 직접 소개장을 써 준 셈이었다.
게다가 데슈른이 머무는 장소를 보자 그 근처에 있을 물건이 하나 생각났다.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확실한 건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무언가였다.
가는 김에 얻으면 좋겠군.
방학 동안 네임드급 아이템을 찾으려는 계획을 세워 뒀는데 계획을 바꿔야 될 듯싶었다.
‘어차피 예상치 못하게 갈락슈르를 얻었으니.’
원래 찾으려던 것도 검이었기에 갈락슈르를 얻은 이상 당장 급하지는 않았다.
물론 다다익선이라고 네임드 아이템은 많을수록 이득이긴 했지만 아이템이 당장 도망치는 것도 아니어서 상관없었다.
“이제 가 봐라.”
“감사합니다.”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해 주니 오히려 불안하네.
도대체 바하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덕분에 나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내게는 검술 선생인 니켈이 있었지만 니켈과 데슈른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오러 마스터로서 지냈던 기간이 달랐다.
‘시간이 아깝다.’
하루라도 빨리 가는 길에 물건을 찾고 데슈른을 찾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