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진화 그리고 내기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세상을 꽁꽁 얼렸다.
그와 동시에 방학을 맞이한 아카데미의 풍경은 얼마 전까지 있었던 축제가 무색하게 텅 빈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과 관계자들은 오랜만에 본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지만 몇몇은 그대로 아카데미에 남아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냈다.
강의는 없었지만 교수들의 개별 수업도 신청자에 한해서 받을 수 있었고 그 외에 다양한 이유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학생들이었다.
휘이잉.
강한 바람이 루시아 에버라스트의 보호막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옷을 단단히 여미며 눈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아! 루시아 양. 오늘도 오셨군요.”
건물에 들어서자 간호사 복장의 여인이 반갑게 그녀를 맞아 주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 넣고 온 무언가를 건넸다.
“수도에서 나온 신상 과자예요.”
민트초코맛이라고 적힌 과자는 왠지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느낌이 진하게 풍겼지만 간호사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선물을 받았다.
“예. 감사히 먹을게요.”
그녀는 과자가 든 통을 데스크에 올려놓고 이어 말했다.
“아드리아스 학생을 만나러 오신 거죠?”
“그냥 과자를 주러 온 건데 겸사겸사요.”
“마침 비비안 양도 병문안을 오셨거든요.”
“그런가요.”
루시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로 이어진 계단을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병실로 올라갔다.
“정말. 어디가 좋다고 저렇게 번갈아서 병문안을 오는지.”
간호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일을 하러 갔다.
병실 앞에 도착한 루시아는 잠시 문 앞에서 서성이다 이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살짝 놀란 표정의 비비안이 죽은 듯 누워 있는 아드리아스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테러에 대한 사실은 세간에 숨겨졌지만 루시아는 이미 비비안과 여러 번 마주치며 아드리아스가 다친 이유를 들었기에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
“…….”
둘은 서로 시선을 마주친 채 가만히 있다가 이내 루시아가 먼저 뚜벅뚜벅 걸어와 비비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드디어 루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매일 오시나 보네요. 지겹지 않으세요?”
루시아의 물음에 비비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고향에는 안 내려가시나요?”
루시아의 물음에 비비안은 아드리아스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난 나이첼 왕국 출신이야. 멀어서 갈 필요 없어.”
“나이첼 왕국이어도 열차로 5일이면 도착할 텐데요.”
“……별로 가기 싫어.”
뭐, 본인이 가기 싫다는데 굳이 말을 더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루시아는 아드리아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비비안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을 뱉었다.
“혹시 선배를 좋아하세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까.
비비안은 말을 꺼낸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리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금방 나왔다.
“아마도.”
말을 해 놓고도 비비안은 의문이 들었다.
난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절망에서 꺼내 준 요정님을 좋아하는 건가.
‘결국 같은 사람.’
고민이 필요 없다.
나는 아드리아스를 좋아한다.
그거면 된 거다.
물론 본인에게 직접 말하기에는 아직 자신의 감정은 서툴렀다.
조금 더 이 감정이 무르익으면.
그때는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런가요.”
루시아는 놀란 감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저리 당당히 말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자신의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온 것도 놀랐고.
그때 비비안이 같은 질문을 루시아에게 물었다.
“너는?”
“좋아하냐고요?”
“응.”
난 선배를 좋아하는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물론 좋아하기는 한다.
이성으로서가 아닌 친구로서.
하지만 비비안이 지금 물어보는 건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의미할 터.
잠시 고민하던 루시아는 비비안의 당당함에 힘입어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좋아하기는 하는데 당신이랑은 미묘하게 다를 것 같아요.”
“그래.”
비비안은 딱히 상관없다는 태도로 시선을 돌려 아드리아스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녀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아드리아스를 좋아한다는 사실뿐.
자신의 감정이 중요했다.
그렇게 다시 둘은 기묘한 침묵 속에서 그저 시간을 흘려 보냈다.
* * *
[“언제까지 잠만 자고 있을 거냐. 어서 일어나.”]
마치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고 서서히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의식이 깨어나자 곧 천천히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지금…….’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의식은 깨어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기력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쓰자 점차 몸의 감각이 되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혼자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쯤.
[남은 시간: 00초]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진화하였습니다.]
[환골탈태 완료]
[특성 ‘듀얼 코어(에픽)’가 사라집니다.]
[특성 ‘그릇(유니크)’이 생성됩니다.]
[재능 ‘마나(수재)’가 생성됩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메시지창이 보였다.
동시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기억이 났다.
‘파야트와 싸웠었지. 테러는 막은 건가?’
왜 굳이 혼자 사서 고생하느냐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나 혼자만 테러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그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고 도움을 줄까.
말해 봤자 쓸데없는 의심만 사거나 미친놈 취급을 받겠지.
‘카를로스는 살았으려나…….’
단순히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디에네를 위해서 구해야겠다는 처음의 목표와는 달랐다.
아드리아스로서 정체성이 확고해진 지금은 에이미와 함께 거의 유일하다시피 내게 잘 대해 주던 카를로스를 죽게 둘 수 없었다.
‘만약 김진환으로서의 정체성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다.’
해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고 미리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물론 내 계산에서 벗어난 적의 등장으로 죽을 뻔했지만, 알고 있었더라도 결국 테러를 막으려 했을 거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는 함부로 원죄의 특수 기술을 사용하면 안 되겠네.’
반동으로 인해 죽을 뻔했지만 모순적이게도 특수 기술이 없었으면 나와 비비안은 파야트에게 죽었을 거다.
그러나 다시 그 개 같은 허무의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비비안은 무사한가.’
진화 덕분에 내가 살아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비비안이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을 거다.
‘그동안은 애써 무시해 왔었는데…….’
이젠 부정할 수 없다.
나태의 결계에서 보냈던 한 달은 그녀뿐에게만 아니라 내게도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녔다.
게다가 이번 사건으로 목숨까지 빚졌으니.
‘비비안의 대한 내 태도도 확실히 할 필요가 있겠어.’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지금은 눈부터 뜨는 게 먼저다.
청각과 촉각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꺼풀은 무거웠다.
‘이제 좀 일어나자.’
안간힘을 쓰며 몸의 한구석이라도 움직여보려 애썼다.
그러자 간신히 검지가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 움직였어.”
그리고 내 곁에는 누군가가 있는지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루시아의 목소리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몸의 감각이 조금 더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씨름하고 있자 드디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제발 좀.’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눈을 뜨는 데 성공했다.
새하얀 천장 그리고 그런 내 양옆으로 루시아와 비비안이 보였다.
‘치료소인가.’
내 눈이 뜨인 걸 본 루시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신 들어요? 금방 치료사 불러올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살았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살짝 흥분한 듯 두 눈이 크게 뜨인 비비안이 옆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안도했다.
‘비비안도 살았구나. 다행이다.’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내 루시아가 밖으로 나가고 비비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드리아스.”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른 뒤 내 귓가에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드리아스가 보여 준 그 힘은 숨겨야 되는 거 맞지?”
그 힘?
설마 특수 기술을 말하는 건가.
“일단 조사를 받았는데 어떻게든 얼버무렸어.”
아무래도 조용히 테러를 막으려 했는데 조사를 받았다는 걸 보면 그건 실패한 모양이다.
이 꼴이 됐으니 뭐라 변명도 못 하겠지만.
‘비비안에게는 특수 기술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흑마법의 느낌은 전혀 없어서 다행인데.’
그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그녀가 말했다.
“알려 주지 않아도 돼. 난 아드리아스가 산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뒤로 비비안은 조용히 자신이 조사 때 말한 내용을 내게 전해 주었다.
‘나와 비비안은 오랜만에 본 하잘이 반가워서 쫓아가다 수상한 장소를 발견하고 우연히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 후 괴인들의 습격에 우리 둘 다 죽기 직전까지 몰리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도와줬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여러모로 설명도 되지 않고 수상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어쩔 건가.
증인이 나와 비비안밖에 없는 이상 우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고 테러를 막아 낸 지대한 공을 세운 우리를 협박하거나 고문을 해서 실토를 하게 할 수도 없을 테니.
게다가 있는 그대로 말해도 믿을 수 없을 거다.
내가 해냈다는 걸 알아내려면 내게 원죄가 있다는 것과 특수 기술인 ‘나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이건 내가 설명을 한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는 의사를 표현했고 비비안도 내 뜻을 알아듣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루시아가 치료사를 데리고 왔다.
내게 다가온 치료사는 간단한 검사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천운이군요. 사실 영영 깨어나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지금 환자한테 할 소리냐.
뭐라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학생은 지금 2주일간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니 몸이 회복되더라도 약간의 재활이 필요할 거예요.”
내가 졸든 말든 치료사는 말을 이어 나갔고 나는 그의 말에서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내 피 같은 시간.’
그럼 벌써 방학이 시작됐겠네.
방학 동안 해 놓을 걸 미리 계획해 뒀었는데…….
생각을 이어 나가던 나는 결국 깊은 수마에 잠겼다.
* * *
깨어나고 5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치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감행해 스스로 몸을 치료했다.
내게는 남들이 모르는 재생과 회복 포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테러는 세간에 숨겨졌군. 나쁘지 않아.’
막았으면 된 거다.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한 일도 아니니 그저 테러를 막아 기쁠 따름이지.
‘덕분에 카를로스 알븐이 살았다. 이걸로 디에네한테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살았으면 됐지.
뭔가 큰일을 바란 게 아니다.
그저 난 저번 생과 달리 인간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세상의 멸망도 막고…….
가끔은 내게 이런 정보들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멸망이 일어날 거란 사실도 모르는 채 그저 에이미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쓸데없는 가정이다. 알게 된 이상 살기 위해서라도 발버둥 쳐야지.’
자조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눈앞의 건물을 바라봤다.
오늘은 12월 31일.
바하트와의 내기가 걸려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사실 5일 전에 깨어났으니 바로 갔으면 됐지만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오늘이라도 마탑에 가고 있으니 됐지.
근데…….
“너넨 여기서 뭐 하냐.”
마탑을 향하는 내 옆으로 루시아가 나란히 걷고 있었고 뒤에서는 비비안이 마치 호위를 하듯 따라다녔다.
“심심해서요. 그리고 새로 만든 포션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뒤따라오는 비비안의 대답은 없었다.
방해가 되지도 않는데 굳이 떼어 놓는다고 실랑이를 벌이기는 귀찮아 그냥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에 도착해서 1층으로 들어서자 처음에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조교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탑주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조교는 내 양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다 물었다.
“이분들도 약속된 일행입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둘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하긴 마탑주가 개나 소나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둘이 함께 갈 수는 없겠지.
조교는 통신 아티팩트를 이용해 어딘가와 통화를 하더니 내게 말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학우께서만 입장이 허락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두 분은 여기서 기다려 주시거나 볼일을 보시지요.”
결국 둘과는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나는 루시아와 비비안에게 눈인사를 한 뒤 조교의 안내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의 실수로 인해 최대한 한눈팔지 않고 조교의 뒤를 쫓은 결과, 나는 무사히 바하트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탑주님. 아드리아스 크롬웰 학우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난잡한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온갖 서적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펴진 채 놓여 있었고 알 수 없는 기물들이 이곳저곳에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잡동사니의 한가운데에서 책들로 탑을 쌓아 놓은 채 그 위에 앉은 바하트를 볼 수 있었다.
‘딱히 큰 감정은 느껴지지 않네.’
아버지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막상 바하트를 봐도 감정이 옅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
황제에게 느끼는 분노가 조금 더 직접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 나는 약하다.’
내 주제를 알기에 분노가 옅은 걸 수도 있지.
하지만 언젠가는 손에 닿을 거라 생각한다.
혼자 뻘 생각을 하고 있자 바하트가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 큰일을 해낸 건 알고 있지만 내기는 내기. 준비는 다 됐겠지?”
사실 바하트는 내가 깨어난 다음 날에 바로 찾아왔었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던 그는 뭔가 언짢은 표정이었었는데 내게 사건의 경위만 대충 묻고는 자리를 떴었다.
생각보다 대충 물어봤기에 몇 번의 조사가 더 진행될 줄 알았는데 그 후로 더 이상의 조사는 없었다.
이렇게 허술하게 조사해도 되나 오히려 내가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내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조금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가져왔습니다.”
나는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러자 바하트는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내가 꺼낸 포션을 확인했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만들기는 한 모양이군.”
그는 이내 포션을 건네받아 그 자리에서 마셨다.
조금 입맛을 다시던 바하트는 나를 묘한 눈초리로 보았다.
“에미트 포션?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에미트 포션은 원래 있던 회복 포션의 이름이며 내가 만든 것과 달리 최하급의 품질로 부작용이 있는 포션이었다.
아무래도 효능이 비슷하다 보니 착각을 한 모양인데 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같은 거라고 보십니까?”
도리어 내가 묻자 바하트도 뭔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잠시 빈 포션 병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허, 허허허.”
그는 잠시 말없이 허탈한 웃음만 흘리더니 너부러진 책 위에 주저앉아 병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다르군. 인정하마. 부작용을 없앨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간 둔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재능이 있었군. 이걸 어찌 만들 생각을 했지?”
“탑주님, 그 전에 내기는 제가 이긴 게 맞습니까?”
내 당돌한 물음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가 이겼다. 약속대로 빚을 모두 지우고 내가 아끼는 물건 중 하나를 주지.”
“탑주님.”
“왜.”
“만약 제가 만든 게 하나가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나는 품 안에서 하나의 포션을 더 꺼내 보였다.
그를 본 바하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