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버지가 숨긴 것, 티무르 소환 그리고 기말 평가
“수고했어. 에이미!”
“응. 먼저 들어갈게.”
에이미 크롬웰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시린 바람이 그녀의 목덜미를 훑었다.
“후우.”
새하얀 입김을 만들어 보이며 에이미는 역으로 향했다.
사실 아드리아스가 준 돈으로 인해 더 이상 일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반대로 일을 그만둘 이유도 없었기에 에이미는 일하던 가게를 계속 다녔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기도 하고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건 퍽이나 뿌듯한 일이기도 해서 한동안은 그만두지 않을 예정이었다.
“다녀왔어.”
“오셨어요? 밖에 많이 추우셨죠? 따뜻한 차를 끓여 뒀습니다.”
“고마워. 루핀. 일단 옷 좀 갈아입고.”
일주일 전쯤에 아드리아스가 되찾은 사과나무 저택으로 이사 온 에이미는 어렸을 적에 가문의 하녀장이었던 루핀을 다시 고용했다.
혼자 살기에는 저택의 규모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기에 루핀의 가족들을 모두 저택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추억을 되짚으며 저택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게 취미가 되었다.
‘이 계단에서도 장난 많이 쳤었는데.’
어렸을 적의 아드리아스는 지금과는 달리 무척 밝은 소년이었다.
최근 들어 예전보다는 조금 밝아진 인상이었지만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여전히 어두워 안타까웠다.
‘오빠도 많이 힘들었겠지?’
너무도 어린 나이에 빈껍데기뿐인 가문의 허울을 등에 짊어졌을 아드리아스가 갑자기 불쌍해졌다.
자신도 괴로웠지만 그는 얼마나 더 괴로웠을까.
“아가씨! 차가 식어요.”
“응. 금방 갈게.”
생각을 마친 에이미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의 서재였던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아드리아스와 장난을 치다 서재에 숨어든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무척이나 혼났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항상 서재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었는데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뭘 숨겨뒀기에 그렇게까지 하셨던 거지?
물론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집도 팔렸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기에 숨겼던 것이 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책의 냄새가 물씬 풍기며 서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를 온지 일주일이나 되었음에도 어렸을 적 기억 때문에 서재에는 단 한 번도 들어가 볼 생각이 없었던 에이미는 어지럽혀진 방 안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치우지 않았구나.”
경매로 넘어갔던 집이기에 모두 정리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리는커녕 마치 도둑이 들기라도 한 듯 책장에서 책이란 책은 모두 뽑혀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소파는 엎어져 있었으며, 책상은 뒤집혀 있는 채였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뭔가를 찾으려 뒤진 흔적 같았다.
“루핀한테 치우라고 해야겠네.”
아버지의 영향인지 서재는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되어 루핀도 정리할 생각을 못 한 모양이다.
“사진도 그대로네.”
문득 서재 창가에 놓인 작은 액자 사진을 발견한 에이미는 반갑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감정을 느끼며 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에는 아드리아스와 에이미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찍혀 있었다.
“이때는 참 좋았었는데.”
액자는 관리를 안 한 지 오래되어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에이미는 먼지를 깨끗하게 닦아 내고 원래 있던 자리에 액자를 올려놓았다.
그때, 먼지가 닦인 액자가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반사시키며 서재 한구석을 비추었다.
“음?”
자신도 모르게 반사된 빛을 눈으로 쫓던 에이미는 빛이 반사된 곳에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너무나도 작아서 빛이 비추지 않았다면 그냥 흠집으로도 안보였을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호기심에 그랬을 듯 에이미는 아무 생각 없이 그 흠집처럼 보이는 구멍을 만져 보았다.
팟.
“아!”
따끔한 통증과 함께 그녀의 검지에서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 그녀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서재의 한가운데에 서서히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 * *
나는 기숙사 방 한가운데에서 마법진을 그려 놓고 그 위에 호왕 티무르의 시신을 올려 놓은 채 소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는 대충 끝났나?”
말은 대충이라고 했지만 사실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의 수를 사용한 상태.
사실 티무르의 소환은 조금 더 후가 될 터였다.
그러나 얼마 전, 파이먼과의 싸움에서 얻어 낸 보상으로 인해 그 계획이 앞당겨졌다.
[깨달음]
―에픽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고 탐구하면 이해하거나 알아낼 확률이 높아진다.
업적 보상으로 얻어 낸 무작위 특성이었다.
사실 업적 달성을 이렇게 빨리 해낼 줄도 몰랐지만 애초에 게임에는 없었던 업적이라 얻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게임에서 마검사를 몇 번 키워 봤지만 두 번째 각성이라는 업적을 얻은 적은 없었어.’
아무래도 게임에서 현실로 넘어오며 업적의 목록이 바뀐 듯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를 않았다.
어쨌든 새로 생긴 특성의 도움으로 티무르를 예상보다 일찍 준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하필이면 이딴 특성을 얻었나 했지.’
깨달음은 게임 속에도 존재하는 특성이었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거의 있으나 마나 한 특성이라 에픽이라는 등급이 아까운 폐급 특성이었는데 현실은 게임과 달랐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른의 책은 물론 니켈이 알려 주는 검술도 해석되기 시작했고.’
물론 똑똑해지거나 천재가 된 건 아니었다.
그저 3일 정도 책을 읽으면 예전에 읽었던 내용 중에 무언가가 갑자기 이해되는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쑥쑥 성장했다.
얼마나 성장을 했냐면, 흑마법 숙련도가 초급에서 하급으로 성장하고 흑마법 재능이 진화까지 한 상태였다.
덕분에 내 흑마법 사령 계열 재능은 범재에서 수재로 올라섰다.
범재에서 수재는 고작 한 글자의 차이지만 그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수재가 된 이후부터는 모른의 흑마법서가 쭉쭉 읽혔다.’
분명 흑마법사 사령 계열의 재능이 진화한 건데 다른 기초적인 마법 지식들의 이해도도 올라갔다.
결국 마법의 뿌리는 같다는 걸까. 나로서는 좋은 징조였다.
어쨌든 그 후로 내가 모른의 흑마법서로 익힌 스킬들은.
‘본 아머, 콥스 익스플로전, 블러드 커스, 데스 퓨리, 구울 소환, 레버넌트 소환.’
본 아머, 콥스 익스플로전, 구울 소환은 기본적인 네크로맨서의 스킬들이었다.
하지만 블러드 커스, 데스 퓨리, 레버넌트 소환은 모른의 흑마법서에서만 익힐 수 있는 레어 스킬들이었다.
‘저주 마법 하나, 버프 마법 하나 그리고 소환 마법 하나. 모른 영감. 고맙습니다.’
특히 레버넌트 소환은 평범한 언데드 소환과 달리 많은 준비를 요구했는데 지금 내 방에 그려진 마법진과 각종 재료들도 그를 위한 재료들이었다.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스킬이었지만 이렇게 공을 들여 하나의 정예 언데드를 만들 때 유용한 스킬이었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시체를 조금 더 아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바로 얼마 전에 파이먼과의 싸움에서 위험했던 순간이 떠올라 바로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게는 남들과 다르게 진화 특성이 있으니 언데드를 일찍 만든다고 손해는 없었다.
[하급 사령술: 레버넌트 소환을 시전합니다.]
[시전자의 수준보다 상위 수준의 마법입니다. 안정성 하락.]
[시체가 한 구 감지됩니다.]
[사령술에 도움이 되는 재료들을 감지합니다. 추가 효과가 적용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빨려 들어갔다.
이론만 빠삭하지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마법이기에 긴장이 조금 되었다.
‘그래도 실패는 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이미 다 계산을 했지.’
내가 미쳤다고 티무르의 시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겠나.
당연히 내가 계산한 성공률은 100%다.
꽤 상태가 좋았던 반인반호의 티무르의 시신은 갑자기 털이 우수수 빠져나가더니 창백한 맨살이 드러났다.
마치 털을 벗긴 닭고기처럼 변한 티무르는 이내 근육이 울긋불긋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어어헝!
“고놈 참 우렁차네.”
미리 소음 차단 마법을 설치해 놓길 잘했다.
카론이 자주 썼던 마법인데 마법적 지식이 늘어난 지금은 나도 시간이 조금 걸려도 사용은 할 수 있었다.
포효를 내지른 티무르는 이내 반들반들한 하얀 맨살이 점차 진정하며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레버넌트가 된 티무르는 털이 다 벗겨졌지만 살과 근육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언뜻 보면 언데드 같지 않았다.
[하급 사령술: 레버넌트 소환 성공]
[레버넌트(전설) 한 구를 소환했습니다.]
[일으킨 시체의 수준이 뛰어납니다. 스탯 보너스가 붙습니다.]
[일으킨 시체의 수준이 월등하게 뛰어납니다. 티어(tier)가 오릅니다. 레버넌트 파이터가 됩니다.]
[일으킨 시체의 수준이 초월에 근접합니다. 생전의 자아를 약간 되돌려 받습니다.]
‘역시 오러 마스터.’
솔직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오러 마스터인데 니켈보다 못하면 섭섭할 뻔했다.
일단 정보부터 확인해볼까?
[레버넌트 파이터 (전설)]
―티무르
―언데드
―5티어
―마나: 891
―특성: 자아/극의: 권拳, 버서크
훌륭한 상태창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나가 조금 아쉬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진화를 하면 더욱 강해질 테니 차차 성장하면 될 터였다.
“티무르, 네 이름은 티무르다.”
한때 대륙을 공포에 휘몰아 넣었던 호인족의 왕, 꺾이지 않는 티무르.
도대체 어쩌다가 그 시신이 집회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명성은 내 아래에서 이어 나갈 것이다.
크허엉.
티무르는 레버넌트로 소환된 만큼 성대가 남아 있는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니켈과 달리 조금 모자라 보이는 친구였다.
“잘 싸우기만 하면 됐지. 잘 부탁한다. 티무르.”
그렇게 전(前)오러 마스터이자 역사에 한 획을 남겼던 호족의 왕이 내 두 번째 부하가 되었다.
* * *
슬슬 겨울의 절정에 치닫는 날씨는 연구실 구석에서 놀기 좋아하는 마법사들에게는 치명적인 추위를 선사했다.
강의실에 도착하는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법으로 보호막과 온도 유지를 위한 불꽃을 두른 채 들어오고 있었다.
“진짜 요즘 날씨 미쳤다.”
“그래서 난 매일 고민하잖아. 강의 튈지 말지. 추우니까 방에서 나가기가 싫다.”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의 말을 들으며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한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만.
이런 궂은 날씨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와 같은 루틴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근데 다음 주부터 또 평가지 않냐?”
“아니 중간 평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평가냐.”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런 뒷좌석의 학생들의 말을 들었다는 듯 앞문이 열리며 전투 마법학의 톨먼 교수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좋은 오후입니다. 오늘은 강의가 없고 대신에 이번 주에 있을 평가를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톨먼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건 나도 예상 못 했네.
그래도 매도 빨리 맞으면 좋지. 뭔지나 들어 보자.
“전투 마법학의 시험은 이번 주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합쳐서 2박 3일로 치러집니다.”
2박 3일이라는 말에 숨을 들이켜는 학생들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저 말은 밖에서 지낸다는 소리인가? 정보가 더 필요했다.
“이번 평가의 주제는 생존입니다. 그리고 생존과 별개로 점수를 모아야 하는 서바이벌식 평가죠.”
생존, 서바이벌.
그 두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이거. 어쩌면 기회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