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진화한 니켈 그리고 전투
“어? 카론의 제자잖아. 오늘은 어쩐 일이야. 카론한테 들은 건 없었는데?”
뒤늦게 나를 본 파이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대충 목례를 하며 말했다.
“개인적인 볼일로 왔습니다.”
“개인적인 볼일? 아! 설마 반지 찾으러 왔나?”
반지라는 말에 떠나지 않고 나를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댄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파이먼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를 유심히 신경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오오. 맞나 보네? 뭐야? 돈은 가지고 온 거야?”
파이먼 이 개새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돈 이야기가 나오자 댄은 아예 몸을 우리 쪽으로 하고 대화를 듣고 있었다.
“예.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흐음. 그으래?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난 아직 반지를 팔 생각이 없는데?”
솔직히 반쯤은 예상했었다.
비열한 새끼. 결국 급한 사람은 나니까 어떻게든 몸값을 키우겠다는 소리네.
“흐흐. 그러고 보니 이번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파이먼이 미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나는 그가 들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음지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소문이나 정보가 금방 전파되었다.
아마 이번 집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번에 꽤 좋은 것들을 얻었다며? 이야, 좋겠네. 누구는 이런 묘지에서 몇십 년을 일해도 오러 마스터는커녕 괜찮은 기사 하나도 구하기 힘든데.”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으며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들어 보였다.
“혹시 이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뭔데?”
“방금 직접 말했지 않습니까. 꽤 좋은 것들이라고.”
“설마 거기에?”
파이먼의 두 눈에 탐욕이 깃들였다.
그러나 이내 흥분을 가라앉힌 그는 헛기침을 하며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믿을 수 없다. 내용물을 꺼내면 그때 믿어 주지.”
“파이먼. 당신이 믿고 안 믿고는 의미 없어요. 제가 언제 이걸 거래한다고 말했습니까?”
“뭐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파이먼이 정색을 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곁에 있던 댄의 시선은 내 가방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이걸 원하신다면 제게도 반지를 보여 주세요. 당신이 이미 팔았을지 가지고 있을지 저도 모르잖아요?”
제발.
설마 팔았냐?
왠지 파이먼이라면 진즉에 팔고도 남았을 것 같기는 한데…….
“안 된다. 먼저 보여 주면 나도 보여 주지.”
“벌써 팔았어요?”
“무슨 소리야! 가지고 있다니까. 그러니 먼저 보여라.”
나는 가방을 다시 멨다.
그리고 미련 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쉬운 건 당신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까짓 반지, 제가 가진 시체랑 비교하면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게 낫습니다.”
“안 돼! 멈춰!”
파이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오고 갑자기 주변의 묘지들이 들썩였다.
이 미친놈.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그어어.
무덤을 뚫고 나오는 각종 언데드들이 나를 돌아봤다.
진짜 또라이 새낀가?
난 그냥 밀당하는 것뿐이었는데 급발진 봐라?
하지만 우리 급발진 주자 파이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댄! 새로운 계약을 맺지. 만약 저 녀석의 가방을 가져오면 1억 윌을 주겠다!”
“흐음. 조금 적군.”
“이 개 같은 놈이! 알았다. 2억!”
“그래. 계약 성립이다.”
아주 작정을 했구나.
도대체 뭘 보고 저러지?
가방 안에 진짜로 있다고 생각하고 저러는 건가?
물론 오러 마스터의 시체는 네크로맨서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보물이기는 하다.
언뜻 보면 위기인 듯싶었지만 나는 냉정했다.
애초에 이런 곳에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왔겠어?
차라리 잘 됐다. 반지는 물론이고 후에 걸림돌이 될 블러디 댄까지 처리할 기회였다.
‘니켈. 죽여.’
나직한 명령이 떨어지고.
파이먼의 뒤편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니켈이 검을 휘둘렀다.
탁!
서걱!
“으아악! 이 씨이발!”
아깝네. 살짝 빗나갔다.
파이먼부터 처리하면 싸움이 훨씬 쉬웠을 텐데.
역시 블러디 댄은 명성만큼 녹록지 않았다.
그는 니켈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눈치를 채고 파이먼을 걷어차서 거리를 벌렸다.
니켈의 새로운 특성으로 급습을 시도한 건데 아쉽네.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파이먼의 한쪽 팔을 가져갈 수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댄이 니켈을 보며 웅얼거렸지만 니켈은 그 말을 무시하고 검을 휘둘렀다.
언제부터 있었긴 처음부터 쭈욱 있었지.
나는 마차 안에서부터 니켈을 소환해 함께 들어왔었다.
니켈의 유체화라는 새로운 특성으로 가능하게 된 일이었다.
채채챙!
순식간에 검들이 뒤섞이고, 댄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니켈이 놔두지 않았다.
언데드라고는 생각되지도 못할 실력에 아마 당황스럽겠지.
니켈은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다.
애초에 평범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육체마저 비범해졌다.
[슬로스 팬텀sloth phantom(전설)]
―니켈 라이프힐
―언데드
―5티어
―마나: 2103
―특성: 자아/극의: 검劍, 유체화, 나태
무려 2개나 늘어난 특성.
게다가 2티어에서 한 번에 5티어까지 올라갔다.
스켈레톤이 초기 1티어 언데드인데 반해 팬텀은 무려 초기 5티어의 강력한 언데드였다.
유령과 미라 계열이 반쯤 섞인 종류로 강력한 물리력과 유체화를 통한 모습 감추기가 가능했다.
‘근데 내가 알던 팬텀하고는 모습이 조금 다르다.’
나태의 영향일까.
니켈의 모습은 평범한 팬텀과 달랐다.
평범한 팬텀의 외형은 그저 스켈레톤에다 살가죽을 조금 씌우고 유령처럼 흐릿한 게 전부라면 니켈은 조금 더 생생한 모습과 회백색의 하늘거리는 도복을 지니고 있었다.
도복을 한량처럼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나태라는 이름에 걸맞게 느긋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콰가각!
도복이 펄럭이며 니켈의 동작이 더욱 화려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 화려함은 니켈이 마나를 사용함으로써 정점을 찍었다.
팡!
파가각.
지금의 나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검술이 니켈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오히려 놀라운 건 그런 니켈의 검술을 아슬아슬하지만 버텨 내고 있는 블러디 댄이었다.
진화를 함으로써 코어가 생긴 니켈은 비록 마나의 양은 적었지만 예전과는 다른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특성까지 생겼으니 여기서 더 진화하게 된다면 생전의 오러 마스터로서의 위력까지 보이게 되는 건 아닐까 기대가 되었다.
구어억!
니켈의 놀라운 변화를 감상하고 있자 어느새 가장 먼저 다가온 구울들이 나를 덮쳐든다.
나는 타이밍에 맞춰 어스 실드를 세워 점프해 날아오는 녀석의 턱을 박살 내고 검을 뽑아 들었다.
“흐흑, 허억, 이 개새끼! 죽어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이먼이 지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아공간에 있는 정예 언데드들마저 소환한 모양이다.
오기 전에 했던 계산에는 블러디 댄이 포함되지 않았기에 니켈로 전부 해결하려 했지만 결국 직접 나서야 했다.
파이먼은 이미 주변의 무덤이란 무덤에 전부 사령술을 사용한 모양인데 지금이 낮인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언데드들의 능력치가 저하되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지.’
오히려 실전의 기회가 오자 머릿속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듯 솟구친다.
나는 내가 세운 어스 실드를 이용해 곧바로 락 스피어를 만들었다.
세워졌던 벽이 그대로 날카로운 창처럼 변하며 벽에 몸을 던져 부수려던 언데드들이 알아서 창에 몸을 박고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회전.’
락 스피어들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꽂혀 있던 시체들이 갈기갈기 튕겨 나갔다.
크라락.
옆에서 다가오는 구울을 한 발자국만 움직여 피한 뒤 그대로 목을 자르고.
곧바로 회전하고 있는 락 스피어를 다가오는 언데드들에게 날렸다.
퍼버버벅!
더럽게 많네.
이래서 시체가 많은 곳에서 네크로맨서와 싸우면 안 된다.
나도 같은 네크로맨서였지만 파이먼에 비해 마력이나 숙련도가 부족했기에 아마 같은 시체를 두고 마법을 사용해도 통제권을 뺏길 거다.
애초에 내 능력으로 감지할 수 있는 사거리에 비해 파이먼의 사거리가 훨씬 길어서 내 주변에는 이미 사용할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몰려드는 좀비와 스켈레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구울을 죽이며 파이먼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곧이어 다가온 파이먼의 정예 언데드들로 인해 손이 바빠졌다.
쿵!
한 손에 철퇴를 든 스켈레톤 워리어가 땅을 내려찍었다.
4티어의 스켈레톤인 워리어는 확실히 평범한 스켈레톤과는 그 힘이 달랐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파이먼의 아공간에서 소환된 정예 언데드들이 속속들이 참전하기 시작했다.
“흐으, 흐으. 죽어라!”
눈이 뒤집힌 파이먼의 기괴한 외침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엘더 구울, 스켈레톤 워리어, 스켈레톤 나이트, 포이즌 좀비 등 다양한 언데드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캉!
나이트의 검을 막아 낸 반탄력으로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워리어의 철퇴를 피해 냈다.
내 영재급 전투 재능은 끊임없이 적들의 움직임을 분석하며 내게 최선의 경로를 알려 주었다.
‘오른쪽으로 한 보 반.’
적의 무기를 휘두르는 각도와 힘, 속도를 순식간에 읽고 몸을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상대의 공격을 뒤로하고 반격을 가했다.
콰직!
워리어의 해골로 된 팔을 부러트리고 몸을 숙였다.
날카로운 베기 공격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이번에는 엘더 구울의 육탄 공격.
다급히 몸을 돌려 덮쳐 오는 녀석의 면상에 검을 찔러 넣었다.
단단한 육체에 원래라면 박히지 않았을 검이 달려오는 가속도와 맞물려 거대한 충격과 함께 박혀 들었다.
‘그리스.’
곧바로 마찰력을 낮춰 빡빡한 검을 뽑아냈다.
“넌, 넌 도대체 뭐냐! 왜 죽지 않는 거야!”
거 참, 아까부터 시끄럽네.
나는 락 스피어 하나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물론 가볍게 막히긴 했지만 좀 닥치라는 무언의 뜻이었다.
하도 정신없이 싸우느라 니켈 쪽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직 주변에는 백은 훌쩍 뛰어넘는 수의 언데드들이 있었고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언데드도 4마리나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켈레톤 나이트는 강력한 육체와 정교한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쨍!
다시 한 번 나이트의 공격을 막아 내었지만 두 팔이 떨려 왔다.
상대는 인간이 아닌 괴물.
최대한 빗겨 막았다고는 해도 근력의 압도적인 차이로 충격이 심했다.
근육도 없는 게 어디서 이런 힘을 뽑아내는 거야.
“후우.”
슬슬 체력이 떨어져 왔다.
포션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도저히 시간이 없었다.
그워어어.
아, 이 새끼 성가시네.
느리지만 온몸으로 독을 뿜어 대는 포이즌 좀비를 그리스로 넘어트렸다.
녀석은 괜히 건드려 봤자 오히려 건드린 내가 중독된다.
후웅!
한쪽 팔만 남은 워리어가 철퇴를 휘둘러 왔다.
그리고 동시에 나이트가 사각에서 검을 찔러 왔다.
이건, 피할 수 없다.
푸욱.
“크음.”
그래도 몸을 뒤튼 덕분에 왼쪽 어깨를 찔렸다.
이 정도야, 뭐.
나는 재빨리 꽂힌 검을 빼내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나이트가 더 빨랐다.
후욱― 쾅!
콰각!
“큭.”
나이트는 내 어깨에 검을 꽂은 채로 무식하게 밀어붙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려찍었다.
나는 꼬챙이에 꿰뚫린 생쥐처럼 바닥에 눕혀져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격당한 와중에도 카운터로 상대의 쇄골을 부술 수 있었다.
쇄골이 부서진 나이트의 오른팔은 어색한 움직임을 보였다.
“어때. 이 새끼야.”
괜히 허세를 부려 보며 말도 통하지 않는 상대를 도발했다.
나이트는 오른손으로 나를 내려찍은 검을 계속 잡은 채 남은 주먹으로 내 얼굴을 내려쳤다.
캉!
상대의 움직임이 어색한 덕분에 누워 있음에도 검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문제는 다가오고 있는 다른 언데드들이었다.
‘니켈은 언제 오는 거야.’
나는 이를 악물며 검에 어깨가 꿰인 채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검이 어깨를 관통해 나가며 피를 머금었다.
뼈와 살을 가르는 엄청난 통증이 내 뇌를 갉아먹으며 비명을 토해 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뒤져. 이 새끼야!”
다시 한 번 날아오는 주먹을 무릎을 꿇은 상태로 고개만 숙여 피하고 나이트의 대가리를 검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상대의 두개골은 더럽게 단단했다.
차라리 목을 노릴 걸이라는 후회를 하며 이번에는 녀석의 목을 노릴 때.
[반복된 단련과 재능으로 인해 마나를 각성합니다.]
[특성 ‘듀얼코어’로 인해 육체가 두 번째 마나를 받아들입니다.]
[단전이 열리며 마나가 저장됩니다.]
[‘업적: 두 번째 각성’을 달성했습니다.]
새로운 힘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