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약초학 평가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푸르른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낙엽을 싣고 날아왔다.
하늘 높이 떠오르는 정오의 태양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잦됐다.’
한 손에는 방금 들고 나온 성적표를 손에 쥔 채였다.
아니지, 아니지.
좋게 생각하자.
만약 전날 집회에서의 복귀가 늦었다면 애초에 시험조차 못 쳤을 거다.
내가 한탄해야 할 점은 오늘이 시험인 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다.
‘그래도 오후 강의는 다음 주가 평가라 다행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오후에 있을 실베크의 수업이 다음 주에 평가라 당연히 오전 강의도 다음 주에 평가가 있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요즘 워낙 정신없는 일들이 많아서 진짜로 정신 줄을 놨었던 모양이다.
김진환이었을 때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기는 한데 요즘 들어 아드리아스의 성격이 도드라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육체는 아드리아스니까.’
같은 내용을 똑같이 머릿속에 넣어도 사람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것처럼 김진환이었을 적 기억이 아드리아스에게 들어왔다고 해도 그게 김진환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내일은 약초학 중급. 그나마 자신 있는 분야라 다행이네.’
약초학 교수인 버반이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강생 모두가 보는 평가인 만큼 나만 콕 집어서 해코지는 못 할 거다.
……분명 그럴 거다.
* * *
해코지를 못 할 거라 생각했던 전날의 예상과는 다르게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헛웃음이 나왔다.
‘왜 아무도 없어?’
약초학 수업은 분명 오후였다.
평가에 대한 내용도 당일에 알려 주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들어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교단 칠판에 야외 광장에서 평가를 한다는 메모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메모를 읽고 급하게 광장으로 나가 보자 그곳에는 수많은 실험대와 실험을 하고 있는 약초학 수강생들 그리고 그 모습을 구경하며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보였다.
“이게 뭐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인파를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 버반 교수의 뒤통수가 보여 당장 말을 걸었다.
“교수님.”
“음? 아, 아드리아스 군. 왜 이렇게 늦었나?”
“늦다니요? 강의실에는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내가 분명 태블릿으로 평가 장소와 시간을 알렸을 텐데? 확인하지 못한 건가?”
이 개새끼.
노린 건가?
안타깝게도 내겐 매직 태블릿이 없었다.
태블릿은 아티팩트인 만큼 전공 서적처럼 구매에 있어서 필수가 아닌 자유였다.
그 뜻은 값이 꽤 나간다는 걸 의미했고 이는 곧 가난뱅이 아드리아스로서는 살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합류하게.”
“교수님. 죄송하지만 제가 태블릿이 없어서 평가에 대한 공지나 내용을 전혀 모릅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자네는 귀족이면서도 태블릿 하나 없는 건가? 거 참.”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아주 대놓고 엿을 먹이네.
빨리 시험 내용이나 설명하라고.
내가 무언의 압박을 눈빛으로 보내자 딴청을 피우던 교수 대신 그의 곁에 있던 조교 중 하나가 다가와 설명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버반 교수님께서 본인의 힘으로 새로운 포션을 발명해 내셨습니다.”
“어험!”
왠지 깝죽대더니 한 건 하셔서 어깨가 올라가신 거였구만?
하여간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이번 평가는 버반 교수님이 만드신 포션을 분석하는 겁니다. 각 실험대에는 교수님께서 만드신 포션 샘플이 있습니다. 이를 이용해 포션에 들어간 재료와 배합률을 구하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수강생들과의 대화나 교류는 일절 금지되고 시간은 당일 오후 8시까지로 구해 내신 부분까지만 시험지에 서술하셔도 좋습니다.”
“자,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서 해 보게.”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사적인 감정을 죽이고 덤덤하게 비어 있는 실험대로 향했다.
근데 왜 굳이 이런 야외에서 하는 거지?
물론 나야 어디서 하든 상관없지만 구경꾼들이 있는 건 조금 신경 쓰였다.
“자, 이제 저희 약초학 수강생들이 모두 모였군요. 방금 온 저 학생이 그 유명한 아드리아스 크롬웰 군입니다. 무려 새로운 포션을 제조한 데 이어 흑마법사까지 잡은 유능한 친구죠.”
실험대에 서서 버반이 만들었다는 포션을 확인해 보려는데 갑자기 버반이 광대라도 된 것처럼 주변에 대고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버반, 너…….
아주 날을 잡았구나?
아무래도 버반은 나와 루시아가 만든 포션을 내가 그저 얹혀 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대놓고 쪽을 주겠다 이거지?
“이제 그 대단한 학생이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약초학 평가를 완수하는지 지켜보죠. 참고로 이 평가를 완벽하게 통과할 학생은 없을 거라 예상하지만 아드리아스 군의 경우는 예외라 생각됩니다.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버반은 내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것도 무시하며 입을 나불댔다.
그러자 꽤 많은 학생들이 지나가면서도 멈춰 서서는 내게 시선을 보내며 웅성거렸다.
‘냉정해지자.’
내가 이런 걸로 흔들릴 것 같냐.
솔직히 말하면 흔들리긴 했다.
좋은 방향으로.
‘이 포션. 반드시 알아내 주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시간 안에 포션을 낱낱이 파헤치기로 마음먹었다.
* * *
야외에서 평가를 진행하는 게 무작정 나를 엿 먹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바로 옆에는 마법 재료 상점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자유로이 조교들의 허락을 받고 재료들을 구입해서 실험에 곧바로 사용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비용은 전부 아카데미 측에서 제공되었다.
‘이거, 각성제잖아.’
나는 실험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효능을 알아낼 수 있었다.
버반이 만들어 낸 포션은 현대로 따지면 고카페인 음료였다.
효능을 알아냈으니 그 색깔과 화학 반응, 효능의 세기를 게임 속 아이템과 대조해 보면 금방 무언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꼴에 교수라고 뭔가를 만들어 내기는 했네.’
나는 열심히 다른 재료들과 섞어 보고 흔들어 보며 반응을 확인했다.
다행히 생각해 두었던 아이템 중 하나와 그 반응이 비슷함을 확인하고 곧바로 메모해 두었다.
‘중급 부스트 포션. 이것도 게임에서는 꽤 자주 썼었지.’
회복과 재생 포션보다는 그 쓰임새가 적었지만 가끔씩 사용하고는 했던 포션이다.
게다가 예상보다 높은 등급이라 놀라움도 없지 않아 있었다.
버반이 보기와는 다르게 꽤 하는구나.
교수 직함은 꽁으로 딴 게 아닌 모양이네.
‘잘하면 진짜 8시까지 구할 수도 있겠는데?’
어떤 포션인지 특정을 했으니 들어간 재료의 목록은 끝난 셈이다.
이제 배합률만 찾아내면 끝.
물론 그 배합률이 가장 어려운 거지만 아직 시간은 5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버반 새끼. 내가 반드시 구해 내고야 만다.’
그 어느 때보다 불이 붙은 내 승부욕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나는 남들이 다 보는 상황에서 대놓고 중급 부스트 포션에만 들어가는 재료들을 모아다가 배합률을 찾기 시작했다.
“크, 크흠. 아, 아드리아스 군?”
역시나 곧바로 버반이 내 실험대에 찾아왔다.
나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하며 대답을 했다.
“예. 교수님.”
“그…….”
버반은 차마 어떻게 재료들을 알아냈냐고 묻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다가 이내 말했다.
“여,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 조금 잘못된 길로 가는 모양이지만 힘내게나.”
어쭈? 이젠 아주 대놓고 블러핑을 하네?
잘못된 길은 너 새끼가 가는 길이구요.
“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감독하시느라 고생 많으신데 저기 그늘에서 쉬고 계시죠.”
“…….”
대놓고 날린 축객령에 버반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난 끝까지 시선을 주지 않고 배합률을 찾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한참을 실험에 집중 중이었는데 버반이 끝까지 내 실험대 옆에 서서 구경하고 있음을 느꼈다.
뭐야, 아직도 안 갔어?
“교수님? 아직도 계셨습니까?”
한 번 더 그를 무시하는 말을 하자 얼굴이 벌게진 버반은 고개를 휙 돌리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웃긴 건 아까 전에 했던 내 말에는 따르지 않겠다는 듯 그늘의 반대쪽을 향해 걸어갔다.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네.
그렇게 점차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오후 5시가 되었다.
마침 오후 강의도 끝날 시간이어서 강의가 끝난 학생들과 이른 저녁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붐볐다.
‘거의 다 됐다.’
역시 재능이란 무섭다.
물론 샘플로 준 포션이 있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수재의 능력을 가진 포션 제조 재능은 겨우 몇 시간 만에 중급 부스트 포션의 배합률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제 한 서너 번만 시도해 보면…….’
“교수님. 끝났어요.”
내 생각을 깨부수고 누군가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본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 너냐.’
그녀의 실험대에는 실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자 봉지들과 부스러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런 모습과는 별개로 버반 교수의 포션과 동일한 색상의 포션이 만들어져 있었다.
“벌써 말입니까?”
“예. 이제 가도 되죠?”
“그, 사용한 재료의 목록과 배합률만 시험지에 적어 주시면 가셔도 무방합니다.”
“여기요.”
루시아는 총총 걸어가 시험지를 제출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과정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졸린 눈을 반달처럼 꺾어 미소 짓고는 말했다.
“선배. 이번에는 제가 이겼네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서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잠시 구경을 하고 있던 학생들이 역시 루시아 에버라스트라며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근데 저 아드리아스라는 애는 루시아랑 포션 공동 제작자 아니었냐?”
“그렇지.”
“근데 쟤는 왜 아직도 죽을 쑤고 있냐.”
“야. 아무리 그래도 루시아 에버라스트랑 비교하냐. 걔는 천재야. 천재랑 비교가 되겠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루시아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분명 처음 그녀를 알았을 때만 해도 경쟁은커녕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근데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분함이었다.
황당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녀에게 경쟁 심리를 느끼고 있었다.
‘아드리아스 마이 컸네.’
나는 남몰래 속으로 웃고는 다시 실험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제시간에 왔으면 그녀를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야. 지금은 집중.
시간이 흘러가고 루시아가 떠난 지 30분 정도가 지났을쯤.
“됐다.”
드디어 나도 배합률을 알아냈다.
찾아낸 배합률을 시험지에 적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료 구입인가요?”
근처에 있던 조교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끝났습니다.”
“끝나다니요?”
“답을 구했습니다.”
“……예? 아, 그, 축하드립니다.”
조교가 당황했는지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어 냈다.
그리고 답을 구했다는 내 말은 버반에게도 들렸는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자네, 정말 답을 구했다고?”
“예. 여기 있습니다.”
내가 시험지를 건네는 동시에 만들어 낸 포션을 주자 버반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와 포션 그리고 시험지를 번갈아 보았다.
저러니까 꼭 두꺼비가 먹이 반응하는 것 같네.
“저, 정말 자네가 한 건가?”
“보셨잖아요.”
“미, 믿기지가 않는군.”
뭐라는 거야.
어쨌든 제한 시간을 2시간이나 남기고 해낸 나는 쿨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 나를 구경하던 학생들은 물론 같이 평가를 진행하던 수강생들도 놀라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도 한마디씩 뱉는 게 들려왔다.
그래! 나도 루시아처럼 찬양해 봐라!
“이야. 역시는 역시네. 포션을 발명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어.”
“그 아드리아스한테도 뭔가 재능이 있기는 했네. 역시 신은 공평해.”
왜 나는 루시아처럼 감탄하지 않는 거냐.
그래도 충분히 능력을 보여 준 것 같아서 속은 시원했다.
“교수님 그럼 뺑이 치십, 아니 수고하세요.”
살짝 말실수를 했지만 버반은 내 시험지에 얼굴을 박느라 신경도 못 쓰고 있었다.
어차피 재료 이름이랑 배합률밖에 적혀 있지 않은데 저런다고 뭐가 나오나.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뜨려 할 때, 갑자기 인파가 웅성이며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버반 교수님!”
그는 나보다 상급생으로 보였는데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버반을 부르며 달려갔다.
“교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으응? 게롤프, 자네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어쩐 일이라뇨! 지금, 지금 여기 있는 포션! 제가 만든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를 평가에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교수님이 만들었다니요!”
“어허! 무슨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 오해를 하지 않나!”
오호?
이거 일이 아주 재미있게 흘러간다.
나는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아까 전에 버반에게 당한 것도 있으니 저 학생의 억울함도 풀어 줄 겸 오지랖 좀 부려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