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집회 참석
“응? 어이! 드라간! 오랜만이군.”
“살렘 예디디아?”
살렘의 이명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방랑자였는데, 그는 찾는다고 찾을 수 없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그런 살렘이 우리의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 아무리 드라간이라 하더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을 거다.
“인마, 내가 네 친구냐?”
“죄송합니다. 장로님.”
“내가 왜 장로야? 그냥 이름에 님자를 붙여서 불러라.”
“예. 살렘 님.”
천하의 드라간이 저렇게 쭈그러질 줄이야.
살렘은 축 처진 말들을 보더니 이내 손을 한 번 휘저어 마나를 배열했다.
엄청난 속도로 술식의 정리와 마나 배열이 끝나자 말들에게 걸렸던 저주가 풀린 것도 모자라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너도 집회에 가는 거지? 타라. 내 말동무나 해.”
“알겠습니다.”
드라간의 습격은 허무하리만치 어이없게 끝나 버렸다.
아마 살렘도 그가 습격하러 온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냥 봐주는 눈치였다.
“살렘 님께서 집회에 참석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 그 얘기는 이미 카론한테도 들었다. 식상하니까 다른 얘기 좀 꺼내 봐.”
“아. 흠, 흠! 최근에 제가 테네리아 해협에서 인어들과 어인들 수십 마리를 생포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신다면 선물로 몇 명 챙겨드리고자 하는데…….”
“야, 이 새끼야. 왜 죄 없는 인어들을 괴롭히는 거야?”
“예? 아! 죄송합니다. 집회가 끝나는 대로 곧장 풀어 주겠습니다.”
“굳이 잡은 걸 다시 풀어 준다고? 너 바보냐?”
앞을 보느라 보이지는 없었지만 마차 안의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역시 네임드 캐릭터.
괴팍하기가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렇게 둘의 콩트 아닌 콩트를 듣다 보니 어느새 붙잡히는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렘 님. 곧 숲으로 진입합니다.”
“그래? 잠깐 세워 봐.”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렘의 말을 거역할 수 없던 카론은 마차를 멈춰 세웠다.
바로 앞은 시커먼 숲이 아가리를 벌리고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살렘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에서 내리더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자, 입장하기 전에 한 따까리 해야지?”
살렘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카론이 마부석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드라간도 표정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기 모두 기다리고 계신 거 압니다. 좆 되기 전에 빨랑 나와라.”
살렘이 말을 마치며 자신의 등에 메고 있던 긴 헝겊을 풀었다.
‘악창 사악한 뱀.’
외형은 고목나무로 만든 지팡이처럼 보이지만 구불거리는 끝부분에 날카롭고 두꺼운 창두가 달려 있는 게 특징이었다.
놀랍게도 살렘은 나와 같은 듀얼 코어였다.
그리고 선천적인 자질이 아닌 후천적인 듀얼 코어였다.
자신의 몸을 개조해서 듀얼 코어로 만든 살렘은 마법사인 동시에 굉장한 실력의 무투파였다.
그가 사악한 뱀을 꺼내 들자 드디어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해요! 나는 집회에 참석하려고 했던 것뿐이요!”
비굴해 보이는 사내가 투명화 마법을 풀고 나와 자진 신고를 하였다.
“그래. 그래야지. 일로 와.”
흑마법사 테우스. 이 녀석은 보스급은 아니었지만 기억은 확실히 난다.
별 그지 같은 마법들을 사용해서 꽤나 성질을 건드렸었지.
저 녀석 때문에 키보드를 한 번 부숴 먹은 적도 있었다.
“더 없어?”
살렘은 그렇게 말하더니 좋아라고 중얼거리며 창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렇게 대범하게 나오다니 네 녀석들의 겁대가리에는 존경을 표하지. 그 대가로 내가 친히 목숨을 앗아 가 주겠다.”
팡!
살렘의 주위로 마치 공기가 터져나가듯 마나가 터졌다.
그러자 마나의 파동이 이 일대를 전부 휩쓸고 지나갔다.
파동은 우리에게도 스치고 지나갔는데 파동이 스치자 마치 낱낱이 분석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응?”
돌연 살렘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재미있군.”
뭐가? 갑자기 뭔 소리야? 뭔가를 알아낸 건가?
하여간 바하트도 그렇고 살렘도 그렇고 제발 재미있다는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살렘은 이내 고개를 다시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가렛, 앤서니, 호롤로페, 만드라, 슈왈츠, 메건. 너넨 여기서 죽는다.”
방금의 마나 파동으로 주변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들의 정체를 알아낸 모양이다.
마가렛과 호롤로페, 슈왈츠는 아는 이름이었고 나머지는 처음 들어보는데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을 진짜 죽이는 건가였다.
‘여기서 죽을 놈들이 아닌데.’
나로 인해 미래가 틀어진다.
물론 흑마법사들은 죽이면 이득이다.
애초에 녀석들 때문에 이 대륙에 커다란 위기가 닥치니.
문제라면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어쩔 수 없지.’
일일이 따지고 보면 내가 아드리아스가 된 시점부터 미래는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미래가 달라진다면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촤아악!
녹색의 액체와 불길한 기운을 지닌 구체가 어디선가 날아왔다.
하지만 살렘은 손짓 한 번으로 그 공격들을 터트리고 창을 휘둘렀다.
펑!
아무 기교도, 마나 배열과 술식도 없는 그저 단순한 마나의 발산.
하지만 그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콰지지직!
퍼버버벅!
붙잡힌 숲을 마주 보고 있는 반대편 숲에 구멍을 만들었다.
마치 동그란 바위 하나가 지나간 것처럼 앞이 휑하니 뚫렸는데 바닥은 고압과 고열로 인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잘 가라. 앤서니.”
살렘이 중얼거렸고 이내 다른 방향의 수풀이 움찔거렸다.
“사, 살려줘!”
누군가가 그곳에서 급하게 튀어나오며 말했지만 살렘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펑!
단순한 창 놀림이었지만 튀어나온 상대는 그대로 터져서 사라져 버렸다.
흔적조차 없어져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증발해 버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코덱스에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군. 아무리 욕심이 나도 그렇지 감히 내 호의를 무시하다니. 너희가 죽을 이유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태의 페이지를 노려서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를 무시한 것 같아서 죽인다는 건가.
역시 또라이의 생각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살렘은 간단한 마력 발산만으로 자신이 호명한 이들을 전부 처죽인 후 기지개를 켰다.
무려 여섯 명의 흑마법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도 내가 저번에 상대한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제대로 된 실력자들이었다.
제국에서 알면 좋아라 하겠네.
“역시 잠에서 깨면 운동이 제일이지. 좋아, 좋아.”
이런 사이코패스가 대륙 최강자 중 하나라니 이 세상이 어찌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살렘이 무차별적인 학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에 저런 무력으로 무차별 학살을 벌였으면 각국의 강자들이 힘을 합쳐 토벌하려 했을 거다.
물론 지금도 현상금이 걸려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는 이야기다.
“이제 빨리 출발해 보자고. 어서 ‘나태’를 구경하고 싶군.”
살렘에게 붙은 이명 중 가장 유명한 이명은 진리를 쫓는 악마였다.
그는 원래 평범한 마법사였지만 호기심이 너무나 큰 나머지 흑마법에 발을 들인 케이스였다.
말 그대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배우고, 읽고, 익히는 배움 중독자였다.
그런 그이니 나태의 페이지를 위해 달려온 거겠지.
우리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고 드디어 붙잡힌 숲에 들어섰다.
* * *
“재미없다. 다른 얘기.”
“저, 살렘 님. 제가 슬슬 마나가 다 떨어져 가서…….”
헤헤 하고 비굴한 미소를 지은 테우스를 살렘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살려 줬더니 쓸모가 없군. 그냥 죽여 버릴까.”
“아, 아닙니다! 살렘 님! 아직 더 말할 수 있습니다!”
“농담이다. 냄새 나니 입 다물어라.”
“흡!”
테우스가 살렘의 관심에서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드라간이 긴장한 표정으로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본 살렘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이내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열었다.
“어이, 아드리아스.”
“예.”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대답했다.
살렘은 조금 전, 자신의 실력을 보았을 게 분명한 녀석이 기죽지 않고 자신을 대하는 게 꽤나 대견하게 느껴졌다.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스물 하나입니다.”
“그래? 흐음.”
조금 전의 마나 스캔으로 아드리아스가 자신과 같은 신체적 특징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직 개화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분명 또 하나의 마나 저장소가 있었다.
살렘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옆구리에 찬 것 말이다.”
아드리아스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에 찬 검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내렸던 시선을 올리지 않고 있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건 그냥 호신용입니다. 제가 따로 검술을 배우거나 하는 게 아니라…….”
“난, 나를 무시하는 자를 싫어한다. 그리고 거짓을 말하는 자도 싫어하지.”
“죄송합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 이미 늦었는데도?”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목표라…….”
살렘이 잠시 뚫어져라 아드리아스의 얼굴을 보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그래. 네 녀석, 마음에 들었다. 흠. 내가 웬만해서는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지만 크롬웰에는 동질감도 있고 하니 내가 한 가지 도움을 주마.”
“도움, 말씀이십니까?”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을 걸고 한 번 도와주지.”
“감사합니다.”
아드리아스는 그저 덤덤하게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살렘은 그런 아드리아스를 볼수록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누군지도 알 것이고 조금 전의 일방적인 폭력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 내가 도움을 준다는데 어찌 저리 태연하지?
아마 평범한 녀석들이었으면 놀라 자빠졌을 정도의 기연일 텐데.
정말 스물 하나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가 맞나?
“둥지가 보입니다.”
카론의 말이 들려오고 이내 저 멀리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구형의 둥지가 보였다.
평상시에는 결계로 모습을 감추었을 둥지이지만 집회에 맞춰서 개방한 모습.
그 모습에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오랜만에 재밌겠어.”
살렘의 미소가 짙어져만 갔다.
* * *
“왜 이렇게 숲 밖이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둥지 밖으로 나온 모르셰의 시선이 살렘을 향했다.
“너 때문이었군.”
“어이, 모르셰. 오랜만이야. 그리웠지?”
“집회에 소속되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알고 왔지?”
“어이, 그런 삭막한 소리는 넣어 둬. 지금은 오랜만의 해후를 즐기자고.”
모르셰는 둥지의 마녀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독특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온몸에는 마치 나무인 것처럼 가지가 자라나고 있었고 머리는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나뭇가지와 엮어 새의 둥지처럼 하고 있었다.
‘불편하지 않을까?’
뭐, 모르셰도 네임드인 만큼 정상은 아니겠지.
마차의 지붕을 밟고 모르셰의 둥지로 올라간 우리는 이내 둥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비교적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마녀라는 이미지와는 꽤 다르네.
“살렘. 네가 올 줄은 몰랐군.”
안에는 이미 3명의 선객이 있었는데 모두 한 이름값을 하는 쟁쟁한 흑마법사들이었다.
물론 살렘의 이름값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살렘이 워낙 압도적인 명성을 지닌 것일 뿐, 게임에서는 후반 챕터의 중간 보스들과 같은 수준의 괴물들이 바로 이 자리에 모인 녀석들이었다.
“…….”
“와! 저 사람이 살렘이야?”
처음 살렘에게 말을 건넨 인물은 집회의 진행자인 제스터 르반이었고 말없이 앉아 있는 이는 라고,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는 미치광이의 그믐달, 루나였다.
의외로 네크로맨서의 대부인 모른이 없었다.
제자인 카론과 관련된 일이라 당연히 참석할 줄 알았는데.
“모두 오랜만이야. 아가씨는 처음 보는군. 신입인가?”
“난 루나! 그냥 루나야! 만나서 반가워 악마!”
정신이 없네.
근데 생각보다 인원이 적어 보인다.
설마 이게 다인가?
“급하게 집회를 연 탓에 인원은 이게 전부다. 이제 집회를 시작하지.”
마침 제스터가 내 의문을 해결해 주며 집회의 시작을 알렸다.
“우선 나태의 페이지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꺼내 봐라.”
제스터가 집회를 진행하고 카론이 내게 눈짓했다.
나는 며칠 전 미리 세워 두었던 계획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니켈을 소환했다.
덜그럭.
소환된 니켈은 한 손에는 크리스토퍼의 검을, 나머지 한 손에는 나태의 페이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소환과 함께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뭐?’
[스켈레톤 솔저(전설)의 진화 가능성 100%]
[진화를 할 경우 66 가지의 분기가 존재합니다.]
[진화를 시키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