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드리아스의 판단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비비안의 흐트러진 녹색 머릿결과 피에 젖은 얼굴이었다.
이미 말라붙은 검붉은 피가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얼굴을 몽환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서 조금 전까지 보았던 어린 비비안의 얼굴이 겹쳐 보여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당황해서 일어나려 하자 비비안의 오른손과 소지를 걸고 있는 내 손이 느껴졌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고작해야 소지인 주제에 얼마나 세게 붙잡고 있는지 손을 털어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으음.”
팔을 흔들자 잠에서 깬 비비안이 눈을 떴다.
“음?”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 비비안은 내 손과 본인의 손이 엮여 있는 걸 보고 손을 풀었다.
“여긴……?”
아직 정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라 나는 안도를 삼키며 말했다.
“수림 마을. 기억나요?”
“수림 마을?”
아무래도 저주의 후유증이 큰지 금방 정신을 차리지 못하나 보다.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이, 마법사. 비비안.”
뒤를 돌아보자 아이비가 멀쩡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처럼 자력으로 탈출한 건가?
“무사하셨군요.”
“그래. 잦같은 일이 있기는 했지만. 너네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흑마법사는?”
“그게…….”
뭐라고 둘러대지?
말할 걸 찾다 나도 모르게 비비안을 내려다보자 그녀는 아직도 멍한 얼굴이었다.
“응? 죽었잖아? 볼로릭 집사?”
아이비가 주위를 둘러보다 목이 잘린 흑마법사의 시체를 보았다.
“크리스랑 하잘은 어디 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게…….”
골치 아프네.
본 사람이 없으니 내가 흑마법사인 게 들키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내가 적을 죽였다는 증거도 없었다.
내가 죽였다고 말하면 과연 그녀가 믿을까?
도대체 무슨 수로 죽였냐며 추궁당하겠지.
나는 전투에 휘말려 죽었는지 사라졌는지 모를 크리스토퍼를 이용하기로 했다.
“크리스토퍼와 제가 합공해서 죽였습니다.”
“뭐? 걔 반 죽은 상태 아니었냐? 지금 어디 있는데.”
“흑마법사의 공격에 그만…….”
“그만? 그만 뭐.”
“시체도 못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아이비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크리스토퍼는 그렇다 치고 하잘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흑마법사가 있는 좌표를 알려줬는데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씨발. 뭔, 개 잦같은 일이 일어나서 이딴 식으로 꼬이냐.”
갑자기 성질이 폭발했는지 그 뒤로도 걸쭉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아이비는 흑마법사의 시신을 챙겼다.
그리고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는 비비안을 살폈다.
“얘도 나랑 같은 거에 당했나?”
“그런 거 같습니다.”
“뭐야. 너 뭔지 알고 말하는 거야? 너도 당했어?”
“예.”
“오올? 근데 빠져나온 것도 모자라서 흑마법사를 크리스랑 같이 잡았다고?”
“예.”
순간 대답이 늦을 뻔했지만 그냥 대답했다.
사실인 걸 뭐 어쩌라고.
그녀는 여전히 뭔가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와 비비안을 내려다보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녀로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겠지.
“그래. 일단 난 이거 들고 있으니까, 네가 비비안 좀 챙겨라.”
“예.”
나는 앉아 있는 비비안에게 다가가 손을 건넸다.
“비비안. 돌아가죠?”
“응. 알았어. 요정님.”
“예?”
“응?”
나는 물론이고 비비안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나인 걸 안 건 아니지?
“요정님이라뇨?”
내가 모르는 척 묻자 비비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비비안?”
“목소리.”
“예?”
“목소리가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어서 가죠?”
그녀는 내 재촉에 결국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밀었던 내 손이 무안해지게 벌떡 일어난 그녀는 앞서가면서도 이따금씩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모르는 척하면 어차피 알지도 못할 텐데 어디 한 번 실컷 의심해 봐라.
* * *
돌아가는 길에 나는 볼로릭 남작부터 먼저 찾아갈 것을 아이비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흑마법사가 집사인 게 걸렸으니까.”
아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은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놓고는 있어야지. 흑마법사랑 관련된 사건은 단순히 아카데미가 아니라 제국 차원의 문제니까.”
그렇게 볼로릭 성에 다다르자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성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씨발럼들이 장난하나.”
안 그래도 학생 두 명이 죽거나 실종이 된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이비는 뚜벅뚜벅 걸어가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아. 길 안 비켜?”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로들렌 아카데미 검술학부 조교수 아이비 클레어다! 지금 볼로릭 남작을 지키는 행위는 제국의 반기를 들겠다는 의미로 알고 삼족을 멸할 거다.”
“뭐, 뭣! 갑자기 무슨 소리냐!”
“너희 남작 새끼가 흑마법사와 내통한 정황이 드러났다.”
아이비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시체를 앞에 던지고 수급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얼굴을 본 병사들과 기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그래. 잘 아는 얼굴이지? 이 새끼가 수림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흑마법사였다. 거기다 감히 아카데미 학생 둘을 헤치기까지 했지. 이래도 남작을 지킬 거냐?”
“저,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남작님이 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성문을 지키라는 명령만 내렸기에…….”
“이제 알았으면 뭘 해야 되지?”
“비, 비키겠습니다.”
“비켜? 비키는 건 당연한 거고 니들도 빨리 남작을 잡으러 가야 할 거 아니야!”
“예, 옙!”
흑마법사와 관련된 일은 그 누가 되었든 제국에서 엄벌을 내리기에 병사들과 기사들은 사색이 된 채 성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갔다.
“수고를 덜었네요.”
“뭔 소리야. 우리도 빨리 가야지.”
시체를 다시 주워든 아이비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적극적이었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 보면 납득이 갔다.
게임 속 그녀는 흑마법사에 대한 적의가 가득했었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과거와 연관된 일이라 짐작이 되는데 그 덕분에 흑마법사와 관련된 에피소드에서는 그녀의 덕을 톡톡히 봤었다.
‘근데 이제는 내가 흑마법사지.’
아무쪼록 목숨을 연명하려면 사려야 했다.
그렇게 달려가는 아이비의 뒤를 쫓아 마침내 내성에 들어섰다.
앞서간 기사들이 미리 말해 뒀는지 내성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제지하는 이 하나 없었다.
“어머, 어머. 진짜네. 진짜 이반 집사야.”
“이상하긴 했지. 원래 있던 토마스 집사를 갑자기 내쫓고 새로운 사람을 데려왔으니.”
아이비가 흑마법사의 시체를 들고 다니자 성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들으며 아이비에게 말했다.
“볼로릭 남작은 왜 흑마법사와 결탁했을까요?”
“내가 알 바야? 그게 무슨 이유에서든 볼로릭가는 이제 끝장이야.”
하긴. 맞는 말이다.
그게 무슨 이유가 되었든 정황이 확실하게 드러난 이상 볼로릭가는 멸문만이 남았다.
그렇게 볼로릭 남작의 집무실을 향해 올라가던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기사에 의해 멈춰 섰다.
“남작을 찾았습니다. 지금 에델 도련님의 방에 있습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남작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그 앞에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검과 창을 뽑아 든 채 포위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아, 이 중에 아무나 제국 수사대에 연락 좀 해놔.”
“예!”
분위기를 제대로 휘어잡은 아이비는 마치 본인의 수하들을 다루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마침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는 기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기사 중 하나가 떨리는 음색으로 우리를 반겼다.
“오, 오셨습니까.”
“저게……뭐지?”
아이비가 기가 찬다는 목소리로 물어보았고 기사도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다는 이야기만 연신 내뱉었다.
그 사이, 나는 그 기괴한 풍경에 다가갔다.
“야, 아드리아스. 물러서.”
“괜찮습니다.”
내가 다가간 곳에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핏빛 살덩이 형태의 무언가가 있었다.
남작은 그런 살덩이 옆에 앉은 채 다가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반은 죽은 모양이군.”
“예.”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고는 살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살덩이에서 사람의 말이 아닌 동물이 낼 법한 소리가 나왔다.
“그래, 그래. 에델. 아빠가 미안하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아들 때문에 그와 손을 잡은 겁니까?”
“……그래. 뭐, 애초에 이런 결말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아픈 아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다.”
“아드님이 과연 이런 모습으로 더 살고 싶어 했을까요?”
“하! 나라고 이런 모습이 될 줄 알았겠나? 속은 내가 잘못이긴 하다만 나중에는 그래도 이런 모습으로라도 좋으니 에델이 살아 있다는 게 좋았다.”
그는 회한에 잠긴 눈으로 살덩이를 보았다.
“후회는 없다. 어차피 내게 남은 건 에델밖에 없었어. 먼저 떠나간 내 아내에겐 조금 미안할 수도 있겠군.”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아이비에게 말했다.
“흑마법사가 죽은 이상, 에델은 어차피 며칠 뒤면 죽을 거요. 난 즉결 처분해도 되지만 에델은 그때까지 그냥 놔두어 주겠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내가 부탁할 처지가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아이에겐 잘못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하오.”
“닥쳐. 그 더러운 주둥아리 놀리지 마.”
아이비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어? 너만 지랄 났니?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한테 그딴 말을 지껄여 봐라, 이 개새끼야.”
“아이비.”
내가 조용히 아이비의 앞을 막아섰다.
“뭐냐, 씨발. 너도 뭐 갑자기 저 새끼가 불쌍해졌냐?”
“흑마법사는 무조건적으로 사제 관계가 존재합니다. 검열이 심해서 독학으로는 성장하기가 힘든 구조죠.”
“갑자기 뭔 소리야.”
“죽은 흑마법사의 스승에 대한 정보를 위해서라도 죽이지 말고 일단 제국 수사대에 넘기는 게 이득이란 소립니다. 일단 이 자를 심문해야 다른 정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내 말에 거친 숨을 뱉어 내던 아이비는 이내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검을 집어넣었다.
“하아, 시발새끼.”
“이성적인 판단입니다. 설마 제가 동정심이라도 가질 거라 생각한 겁니까? 저를 너무 무르게 생각하시네요.”
“시끄러우니까 닥쳐.”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숱하게 사람을 죽여 본 나다.
감정을 지우고 오로지 임무 달성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삶.
아이비의 말대로 내가 죽인 이들 중에서도 사연 없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내가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의 주민들을 학살한 자를 동정?
물론 아드리아스가 되고 성격이 조금 달라진 건 맞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지.
그렇게 아이비가 화를 삭이며 돌아서려던 때에.
푸욱!
“에, 에델!”
팔뚝만 한 락 스피어가 남작의 옆에 있던 살덩이에게 꽂혔다.
갑작스런 내 돌발행동에 당황한 아이비가 이게 뭔 짓이냐는 듯 나를 노려봤다.
“어차피 남작만 살아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보니까 저건 말도 못 하는 것 같은데.”
“너, 미쳤구나?”
“합리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아이비가 별 또라이를 본다는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병사들에게 남작의 구속을 명령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남작은 죽은 살덩이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하아, 과연 이 사람들은 알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에델을 죽였는지.
물론 아이비에게 나도 이만큼이나 흑마법을 혐오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 봐라.
과연 제국 수사대가 도착하면 남작만 심문할까?
‘아마 사용된 흑마법을 알아내겠다며 에델에게 온갖 고문과 실험을 해 보겠지.’
안 그래도 저런 괴물로 변해 괴로웠을 거다.
아마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 왔겠지.
그런 것도 모자라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에게 온갖 실험을 당할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죽는 게 훨씬 나을 거다.
물론 내가 남의 목숨을 가지고 멋대로 판단을 내린 건 주제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래도…….’
눈앞에서 아들을 잃은 아비의 통곡을 들으니 씁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네.
* * *
비비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아드리아스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자 그가 했던 말과는 달리 다른 생각이 있었다는 걸 비비안은 눈치챌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남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는 도가 튼 그녀이기에 알아낼 수 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아드리아스의 이름을 되뇌며 그녀의 녹빛 눈동자가 생기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