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파국의 짬뽕조
싱클레어의 눈길을 받고 서 있자니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몸이 떨리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바하트의 앞에 섰을 때와는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정도가 달랐다.
‘이게 진짜 오러 마스터.’
실제로 마주해 보니 전생의 경험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괴물 그 자체였다.
인간의 앞에 마주 선 게 아니라 흉포한 야생 동물 앞에 서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반사적으로 경계가 되고 나도 모르게 상대 근육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이거 봐라?”
싱클레어가 입을 열자 나는 긴장을 늦추며 시선을 상대의 얼굴로 돌렸다.
“자네, 학생 맞나?”
“예. 맞습니다.”
“근데 날 보는 꼬라지가 꼭…….”
거기까지 말을 하고 그친 싱클레어는 자신의 뒤를 쫓아온 톨먼에게 물었다.
“톨먼.”
“예. 전하.”
“이곳의 학생들은 실전도 치른다지?”
“예. 거의 매년의 한 번씩은 그러한 유형의 평가를 실시합니다.”
“흠…….”
“혹시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대답 없이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특유의 이를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이왕이면 관심 좀 꺼 줬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왜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왜 내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냥 멀뚱히 서 있자 갑자기 싱클레어가 두툼한 손을 건네었다.
“……?”
뭐지?
어쩌라는 겨?
그런 내 반응을 무시하고 그가 다시 손을 뻗어 건넸다.
그게 마치 악수를 하자는 듯한 제스처여서 나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연스럽게 잡기는 했는데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하긴 오러 마스터가 정상일 리 없지.
“하하. 아드리아스 크롬웰!”
“예. 전하.”
“자네에게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네.”
“예? 예. 감사합니다.”
뭐가? 왜? 뭐지?
아드리아스. 너 내가 오기 전에 뭔 짓을 했던 거냐?
아무리 기억을 굴려 봐도 클로슈 공작, 아니 클로슈 가문과 연관되었던 적은 없었다.
“자네 덕분에 내 휘하에 멕케인 자작이 자식을 가진 듯해.”
“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오러 마스터들이 제멋대로라지만 이건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는 수준인데.
“이게 모두 자네가 만든 포션 덕분이야.”
“아!”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그니까 지금 내 포션을 멕케인 자작에게 줬고 그걸 먹은 멕케인 자작이 아이를 가졌다는……?
‘정력제!’
전혀 예상치 못한 사용처였다.
아니 그걸 그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가?’
체력 상승 물약이면 당연히 정력제로 봐도 되는 건데 게임에서만 사용하다 보니 그런 방향으로는 상상도 못 했다.
아직 등록이 마무리 단계인 포션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둘째 치고 포션의 생각지도 못한 사용법에 나는 큰 후폭풍이 닥칠 것을 짐작했다.
‘효과는 확실한데 부작용이 없는 정력제? 이건 반향이 장난 아니겠는데?’
남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아이템은 없을 거다.
물론 그만큼 많이 팔릴 거라는 이야기니 돈을 버는 나로서는 좋다.
문제는 그 관심이 너무 커질 우려가 있다는 것.
이미 지금만 해도 그 대단한 무안공이 내 손을 맞잡고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으니.
제 한 몸 지킬 정도로 강해지기 전까지 숨죽여 살아야 하는 나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예견된 셈이었다.
“그, 잘되었다니 축하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래. 내가 앞으로 자네를 지켜보겠어. 후원도 할 테니 부디 받아 두고.”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억지 미소를 띠우며 감사를 표했다.
여기서 거절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지.
“감사합니다. 전하.”
이야기가 끝나자 싱클레어는 톨먼과 이야기를 조금 나눈 뒤 그대로 열차를 타고 떠났다.
공작씩이나 되는 데도 곁에 수행원 하나 없는 게 얼마나 무력에 자신 있는지 알 만한 부분이었다.
“주목!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군. 그러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톨먼이 기사학부 학생들과 마법학부 학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디어 평가에 대해 설명하는구나 싶어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이번 평가는 기사학부 3학년과 마법학부 3학년생의 합동 평가다. 그리고 이는 경쟁이 아닌 협력 평가라는 것을 명심해 두고 설명 시작하겠다.”
협력 평가?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인지 주변이 술렁였다.
“지금부터 기사학부 3인과 마법학부 1인으로 조를 짜겠다. 마지막 한 조는 남는 인원이 있으니 기사학부 3인에 마법학부 2인으로 구성됨을 명심하고 지금부터 미리 편성한 조를 발표하겠다.”
뭘 할 건지는 몰라도 조별 과제면 개꿀이다.
왜냐하면 내가 폭탄이거든.
난 그냥 기사학부생들에게 묻혀 가기로 마음먹었다.
“……에반스, 크로도스, 피네. 이상 4명이 8조다. 다음으로는 크리스토퍼, 하잘, 비비안, 아드리아스. 이상 4명이 9조다…….”
한 명씩 호명이 된 대로 앞으로 나가 조에 맞게 대기했다.
곧이어 내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듣고 앞으로 나가는데 뭔가 잘못된 기분이 물씬 풍겼다.
‘방금 분명 하잘이랑 비비안이라고……?’
내 이름에만 집중하느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이내 내가 속한 9조의 인원들을 보고 뒷덜미가 당겨 왔다.
후우, 진정하자. 벌써부터 겁낼 필요 없어.
“흥. 비실비실해 보이는군.”
내가 다가가자 아마 크리스토퍼일 게 분명한 사내가 날 비웃었다.
나머지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니 아마 크리스토퍼가 맞을 거다.
“에이. 그래도 방금 클로슈 전하가 칭찬하고 간 사람인데 너무 그러지 말자. 안녕하세요, 전 하잘 가프리라고 합니다.”
윤기가 도는 갈색 피부에 실눈을 한 사내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인사를 받았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반갑습니다. 모두들 뭐해. 각자 소개해야지.”
하잘의 말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적대감을 표출하던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크리스토퍼 그로니다. 이번 평가에서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군.”
“비비안.”
크리스토퍼의 날 선 반응을 뒤로하고 홍일점인 비비안을 보자 그녀는 짧게 본인의 이름을 말하고는 다시 딴청을 피웠다.
“아, 하하. 미안해요. 하필 제일 사교성 없는 녀석들이 같은 조가 되었네요.”
“이 녀석. 지금 누구보고 하는 말인가!”
“당연히 너지 누구겠어.”
갑자기 자기들끼리 싸우는 걸 놔두고 나는 슬쩍 비비안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내게 1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 제발 끝까지 나한테 관심 주지 마라.’
정말 하필이면이다.
왜 하필 저 둘이랑 같은 조냐. 조를 바꿀 수는 없나?
솔직히 조용히 있는 비비안이야 그렇다 쳐도 저기서 멀쩡한 척 연기하는 하잘이 더 무서웠다.
‘제파르 교단 광신도랑 아카데미의 광녀라…….’
둘 다 따지고 보면 미친 거긴 하다.
조별 과제라고 좋아했던 5분 전의 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제발 이번 평가 동안 아무 일도 없기를.
그때 주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 듯 기사학부 담당의 교수가 앞으로 나왔다.
‘비고르 교수.’
별 비중 없는 교수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오히려 신경 써야 할 건 그의 조교.
“이번 평가는 무작위 의뢰 수행이다.”
그의 말에 기사학부 학생들은 대충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마법학부 학생들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어진 기간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간 동안 강의가 있는 학생들은 우리가 미리 양해를 구해 뒀으니 출석은 신경 쓰지 마라. 강의 내용도 따로 전해 줄 거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질문을 기다렸다.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자 다시 말을 이어서 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여기서 제비뽑기 형식으로 의뢰를 추첨할 거다. 그 의뢰를 무사히 완수해 오면 된다. 단지 여기서 신경 써야 할 것은 각자가 서로에게 점수를 매긴다는 것. 만약 협조성이 떨어지거나 능력이 떨어지면 조원들의 평가가 낮게 나올 테니 주의하도록. 또 혹시 모를 사고 방지와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조교들이 조별로 한 명씩 동행할 거다. 조교들도 평가 점수를 매기니 참고하도록. 내용은 이상이다. 질문?”
의뢰 완수 평가라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정치 게임이 됐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최대한 잘 보여야 된다는 거네.
그리고 혹시 모를 ‘억까’ 방지를 위해 객관적 판단을 위한 조교를 배정한 모양이다.
“지금부터 조교가 배정된다. 그리고 앞으로 며칠 동안 함께할 동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도록.”
비고르 교수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교들이 조별로 한 명씩 배정되었다.
나는 우리 조에 배정된 조교를 보고 뭔가 운명이라는 게 있나 싶었다.
신경 써야 할 조교가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기가 막히게 같은 조가 돼 버리네.
“9조 담당, 아이비 클레어다.”
긴 금발의 태닝한 듯 갈색 피부의 여인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왔다.
노출이 심한 옷으로 인해 근육으로 다져진 몸매가 한껏 부각되었다.
그 양아치 같은 외모와 행색에 같은 조에 배정된 인원들 모두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이.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대답을 해야지.”
퉷.
씹던 껌을 거칠게 뱉는 그녀를 보며 참 골치 아프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마법학부 3학년생,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흐응~”
마치 흥미가 동한다는 듯한 콧소리에 심장이 쫄깃했다.
아이비 클레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위 말하는 ‘힘숨찐’, 아니 찐따는 아니니 그냥 힘을 숨긴 캐릭터라고 보면 되었다.
겉모습과 행동은 저 모양이지만 그 실력만큼은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괴물 중 하나였다.
그런 여자가 도대체 왜 여기서 조교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게임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결국 알아내지 못했지.’
가벼워 보이는 언행과 외모와는 달리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타인에 대해 배타적인 인물이었다.
동료로 만든 적은 몇 번 있었으나 딱 거기까지인 관계.
호감도를 높여 보려 아무리 노력해도 통하지 않던 인물 중 하나였다.
“방금 무안공이랑 한 대화는 인상 깊었어.”
“그런가요?”
“응.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정력제를 만들다니, 어지간히 자신 없나 봐?”
“…….”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섹드립’이냐.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
“하긴, 약골뿐인 마법사들이니 그런 포션의 도움이 없으면 그 짓도 못 하겠지.”
“확인해 봤어요?”
아, 나도 모르게 도발에 넘어가 버렸다.
절대 꿇리지 않는데 왜 발끈했지.
다 아드리아스 탓이다.
“그럼. 벌써 몇 명이나 상대해 봤지. 너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호오, 과연 그럴까요?”
아드리아스, 멈춰!
내가 아니다! 이건 내가 아니야! 아드리아스가 내 몸을 지배한다!
나와 아이비가 성희롱 대결을 펼치고 있자 지켜보던 조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제파르 광신도, 아카데미 광녀, 엑스트라 기사, 힘을 숨긴 양아치 조교, 마지막으로 네크로맨서인 나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파국의 짬뽕조가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