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예견된 테러 그리고 안젤라 루시펠
“죄송합니다.”
“할 말 없다. 나가라.”
사람이 너무 화나면 오히려 차가워진다는데 딱 그 꼴이다.
저번에는 소리를 지르며 플라스크병까지 집어 던졌었는데.
물론 나한테는 잘된 일이다.
나는 실베크 교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내가 아직 몸을 차지하기 전, 아드리아스 녀석도 마냥 놀고만 있던 건 아니고, 가끔씩 교수들의 심부름을 해 주고 용돈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막 잘린 참이었다.
근데 나였어도 자를 만했다.
시킨 일을 하지 않은 건 물론, 못 했으면 못 했다고 이야기도 안 했으니까.
쌍욕을 먹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큰 소리로 쫓겨나지 않아 이목을 끌지 않겠지.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
왜 다들 날 보고 있는 거지?
“뭘 봐? 구경났냐?”
왠지 데자뷔가 느껴진다.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우선은 빌렸던 책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도서관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주변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진짜 뭐지? 내가 예민한 건가?’
그저께 바하트를 만난 후로 나는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우선 내 정체가 들킬 뻔했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로 현재는 내가 모르는 시간대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없던 건물이었어.’
마탑에서 나오고 루시아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아카데미 건물.
분명 게임 속에는 없던 건물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 장소에는 건물 대신 묘지가 있었는데.
‘어제 간신히 기억이 났지.’
게임상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 잊고 있었다.
아니, 나름 중요하긴 한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라 해야 하나?
‘제파르 교단의 테러.’
게임 시간상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는 부분.
어차피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언제,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곧 일어난다는 거지.’
하필 넘어와도 이상한 시간대에 넘어왔다.
앞으로 게임 시작 시간이 되기까지 대략 반년.
반년 안에 테러가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물론 저 근처로 갈 일이 없으니 휘말리지만 않으면 만사형통이었지만.
‘그 테러로 인해 죽는 사람이 참…….’
몇 명이 죽는지는 모르나 네임드가 한 명 끼어 있다는 게 곤란했다.
그것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아주 밀접한.
“카를로스 알븐.”
알븐 공작가의 장남이자 디에네 알븐의 10년 터울 오빠.
게임 속에서는 이미 죽은 후의 시간대이기에 실제로 보거나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중요 캐릭터인 디에네 알븐과 바하트 알븐으로 인해 가끔씩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아! 아드리아스 크롬웰 학생.”
“안녕하세요.”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도서관에 도착하자 사서가 웬일인지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책을 반납하러 왔습니다.”
“〈자연과 마나의 상충된 이해〉 딱 일주일이네요. 여기 두시면 됩니다.”
흠, 일주일. 시간이 참 빨리도 갔네.
……잠깐만, 일주일이라고?
“아, 그건 그렇고 아드리아스 학생, 이번에 물약을 하나 개발했다고 주변에 소문이 파다한데…….”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나는 다급하게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이 멍청한 새끼.
아드리아스의 몸으로 들어와서 내 지능도 이 녀석의 몸을 따라갔나?
어떻게 그걸 잊고 있을 수가 있지?
무작정 달려가던 나는 이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근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있나?’
조금 침착해져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
오늘이 안젤라의 진화가 끝나는 날인데 연구실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구실을 만들어야지.”
나는 아카데미 내에 있는 마법 재료 상점부터 방문했다.
* * *
“네가 먼저 날 찾아오다니 처음 있는 일이군.”
“하하. 앞으로는 자주 스승님을 뵈러 오겠습니다.”
“연구실 밖에서는 그 호칭을 쓰지 말라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흠…….”
카론은 개인적인 용무로 아카데미 내의 마법진 연구실에 있었다.
여기저기 물어보며 간신히 위치를 알아내고 그를 찾아가자 그는 마침 일이 끝났다며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온 참이었다.
묘한 눈초리를 보내던 카론은 이내 턱짓했다.
“앉아라.”
“예.”
“그래서, 무슨 일로 왔지?”
“교수님, 제가 사실 물약을 하나 개발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알리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일찍도 찾아오는군. 이제 심사가 끝났으니 뺏기지 않을 거라 본 거냐?”
돌직구를 날리는구만.
그래! 네가 뺏을 것 같아서 몰래 했다! 됐냐!
“……하, 하하. 심사를 통과하고 자신 있게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에…….”
물론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할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다.
카론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날 꿰뚫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계획했던 대로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카론이 예의 마나 상호작용과 반지의 빛으로 연구실을 열었다.
그렇게 그의 뒤를 따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멈춰 선 그의 뒷모습에 나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잠깐 몸을 옆으로 기울여 카론에게 가려져 있던 안쪽을 보자 난장판이 된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발, 늦은 건가?’
그건 그렇고 어떻게 마나 구속구를 벗어 낸 거지?
진화를 해서 구속구를 벗어 낼 정도로 강해진 건가?
잠시만.
설마 아직 안에 있는 건가?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냥 뱀파이어조차 강력한 존재다.
하물며 진화까지 한 녀석이면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안 됐다.
‘근데 성공 확률은 55%였잖아?’
물론 저 난장판을 보면 실패했다고 보긴 힘들지.
그래도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을 때, 카론이 앞장서서 먼저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나는 언제든 뒤로 도망갈 생각을 하며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감히…….”
카론의 냉혹한 목소리가 분노로 떨려 왔다.
연구실의 내부는 마치 누군가가 분풀이라도 한 듯 멀쩡한 곳이 없었다.
각종 기구들과 시약들은 깨지고 버려진 상태고 모아 둔 사체들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이 난리를 피웠을 존재가 떠오르자 나는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심히 고민됐다.
“아드리아스.”
“예. 스승님.”
“네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언제지?”
“그게…….”
갑작스러운 질문에 안 그래도 도망칠 궁리를 하던 난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6일 전에 빈 하르츠 국립묘지에 다녀온 날입니다.”
간신히 떠올린 대답을 뱉어 냈지만 카론은 반응조차 없이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둘러보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제나 오늘 방문한 적은?”
“예? 없습니다.”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네가 열쇠를 가지고 있잖아.
내 대답을 들은 카론이 마침내 안젤라가 있던 창살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혹시라도 카론이 피를 뿜으며 죽지는 않을까 긴장한 채 조금 떨어져서 바라만 봤다.
“이 잡종 년이…….”
나지막한 분노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드리아스.”
“예.”
“혹시 안젤라의 구속구를 건드린 적이 있나?”
“없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건드리냐.
그러다 풀려나면 어떡하려고.
……결국 나 때문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하긴 네 녀석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애초에 제가 건드렸으면 이미 그녀에게 죽었을 겁니다.”
“입 다물어라.”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분명 사령술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후 사용하려던 최고급 재료가 도망가 버렸으니.
만약 나도 니켈을 써 보지도 못하고 눈앞에서 뺏기거나 니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열불이 터졌을 거다.
단지 그와 나의 차이점이라면 난 특성인 진화를 믿고 곧바로 사용해 버렸고, 그는 최대한 아끼다가 똥이 된 것뿐.
쨍그랑!
카론이 주변에 있던 플라스크 병을 들고 집어 던졌다.
그 차분한 카론이 저 정도면 진짜 한계까지 화가 치솟아 오른 모양이다.
“……나가라.”
“예.”
다행히 그는 내게 화풀이를 하지 않고 쫓아내기만 했다.
상황을 보니 안젤라는 이미 빠져나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 모르겠다만 오늘로 일주일인 건 확실하니 아마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카론을 홀로 남겨 두고 조용히 집무실로 나왔다.
텅 빈 집무실은 을씨년스러웠다.
“아드리아스.”
“……!”
너무 놀라서 몸이 굳어 버렸다.
누군가가 내 바로 옆,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어느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고혹적인 목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탈출한 지 얼마 안 됐을 거라고 생각해 놓고는 너무나 무방비했다.
그래도 그렇지 집무실에 숨어 있을 줄은.
“아드리아스, 날 봐.”
근데 말투가 원래 이랬나?
목소리에서 적대감보다는 친근함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일단은 그녀에게 목숨이 저당 잡힌 입장인지라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하.”
나는 순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내 입을 틀어막았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바닥까지 늘어진 안젤라는 이전에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고혹적인 눈매와 눈물점, 그 사이로 흐르는 묘한 색기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한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그러한 분위기를 한층 짙게 만들었다.
게다가 하필 지금 입고 있는 허름하면서도 너덜거리는 옷이 그녀의 모습을 더 야릇하게 만들어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물론 난 당당히 맞서서 보겠다.’
절대 사심이 있는 게 아니다.
얘가 보라고 한 거잖아?
“안젤라 루시펠. 약속을 지켜라.”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내가 선빵을 날렸다.
“약속? 그 전에 이 상황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내 힘으로는 마나 구속구를 해제할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다른 방법을 사용한 거야.”
거짓말이었지만 일단은 그럴듯하게 변명해 보았다.
“그 방법이 뭐냐고 묻는 거야.”
“내가 답해 줘야 할 이유는 없어. 어떻게든 널 꺼내기만 하면 된 거 아니야?”
“흥! 꼭 네가 꺼내 줬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건 내가 스스로 나온 거거든?”
“내 힘이 없었어도 그게 가능했을까? 결국엔 네가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아니었으면 넌 카론한테 그대로 언데드 행이었어.”
살기 위해 발악하다 보니 말이 술술 나왔다.
상대는 손짓 한 번에 날 없앨 수 있는 존재.
어차피 죽는다면 뭐라도 해 봐야지.
“카론? 너, 네 스승을 막 부르는구나?”
“지금 그게 중요해? 어쨌든 약속 지켜.”
“안 돼. 약속을 전부 지키는 건 수지에 안 맞아.”
여기서 무슨 수지 타령이야!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도 약속을 반만 지킬 거야.”
“……반만 지킨다니?”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말 그대로 반이야. 약속했던 것 중에 하나만 지키겠다고.”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는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 앞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안젤라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퇴로가 막힌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