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드리아스 크롬웰 (2)
오뚝한 코와 기품 있는 자세.
억지로 꾸며 낸 것이 아닌, 존재 자체만으로 위엄을 발하는 듯한 소녀.
아니, 이제 막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만개하고 있어 소녀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했다.
그런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청초한 흑발이 휘날리며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디에네 양이다. 이번에 마법 역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던데?”
“어. 나도 같은 강의 들어. 9년 만에 나온 만점이래. 내가 볼 때 인간이 맞나 싶다.”
“와! 진짜? 나도 같은 수업 한번 들어 보고 싶다. 어떻게 외모부터 능력까지 어디 한 군데 부족한 부분이 없냐.”
“외모랑 능력뿐이냐, 배경은 어떻고?”
디에네가 주변의 소음을 신경도 쓰지 않고 차분하지만 당당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던 그때.
그녀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이내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멈춰 섰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크롬웰 백작가의 장남.
아니, 이제 백작가라고 부르기도 뭐하지.
아마 곧 있으면 강등될 테니.
그녀가 그런 비루한 가문의 장남을 바라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의 가문은 그녀의 가문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렸을 적부터 여러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고 나름 친하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에는 그랬지.’
좋았던 시절이 지나고 지금은 그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
재작년에 선대 크롬웰 백작이 죽고 나서는 그녀만 보면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저자세를 보였다.
그야말로 벌레 같은 사내였다.
능력도 없지, 재능도 없지, 그렇다고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 있고, 그저 잠시간의 평안을 위해 굴욕적인 모습도 마다 않는 쓰레기.
그럴 터인데…….
‘왜지?’
뭔가 평소 같지가 않았다.
정리가 되지 않아 미역처럼 치렁거리는 머리카락과 멍청해 보이는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이 구부정한 자세도 아니고, 항상 음침했던 표정이 우수에 찬 듯 몽롱했다.
물론 시름에 잠긴 표정은 몇 번 보았지만 지금의 그와는 확연히 다르다.
문득 그가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이 갔다.
‘자연과 마나의 상충된 이해?’
물론 본인은 이미 독파한 책이다.
그렇다고 저런 쓰레기가 이해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아마 누군가의 심부름이거나 모종의 이유가 있을 거다.
그녀가 아는 아드리아스는 그런 사내였으니까.
“음?”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상념에서 깨어나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그대로 지나쳐 갔다.
……지나쳐 갔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그는 정말로 그냥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헤?”
그녀의 입에서 어설픈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다급히 입을 닫았지만 소리를 냈다는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아드리아스, 맞지?’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멀리서 볼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직접 마주치니 분위기가 달랐다.
애초에 아드리아스가 자신을 보고 고개인사만 하고 지나간다고?
‘희한해.’
화가 난다기보다 호기심과 의문이 물결처럼 일었다.
분명 저번 달에 봤을 때만 해도 쓰레기, 벌레가 맞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디에네 알븐. 와, 소름 돋네.’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왜 나를 쳐다보는지는 몰라도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았다.
디에네 알븐.
알븐 공작가의 영애이자 손에 꼽히는 마법 천재.
또한 한때 내가 플레이 해 본 캐릭터이고 현재로써는 이 몸뚱어리의 주인인 아드리아스와 가장 밀접한 플레이어블 캐릭터.
그 말은 즉, 나를 죽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녀석이라는 뜻이지.
‘그래도 저렇게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
회차가 진행될수록 비루해지는 캐릭터로 난이도가 높아지는 게임 특성상, 디에네 알븐과 같은 하이스펙은 초보자용 캐릭터였다.
아마 3번째로 선택한 캐릭터로 기억나는데, 재능도 재능이지만 가문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알븐 공작가는 제국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가문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나도 저기에 빚을 지고 있었네.’
문득 떠오른 기억에 괴로웠다.
이 몸뚱어리가 지녔던 수치심과 열등감이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하지만 확실하게 구분해야지.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아드리아스.
비록 졸개 역할로 나오는 게 전부인 캐릭터였지만 게임에서 알아낼 수 있는 그의 정보는 모두 찾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게임에 진심이었다.
비록 세세한 설정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전과 같이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이제는 내가 아드리아스니까.’
나는 김진환이자 아드리아스다.
비록 받아들이는 데 일주일 가까이 걸렸지만 지금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그 첫 번째 단추는 정해져 있었다.
‘특성.’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던 이유 중 하나.
여긴 현실이면서도 게임과 같은 능력이 섞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는 듯했다.
―띵!
[선택하지 않은 특성이 있습니다.]
이 화면이 그 증거지.
아마 이것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빨리 적응했을 수도 있다.
장소나 주변 인물은 그렇다 치고 눈앞에 게임과 같은 창이 뜨면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하지.
지금은 비록 적응했지만 처음에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나는 게임 창을 닫고 내 정보도 펼쳐 보았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인간
―마나: 1581
―특성: 듀얼 코어
―재능: 흑마법 사령 계열(범재), 원소마법 물 계열(둔재)
―스킬: 흑마법 상세〉〉 원소마법 상세〉〉
처참하기 그지없다.
우선은 마나 양.
마나 양은 마나와 관련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원래 저 정도가 보통이긴 하다.
하지만 보통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키워 온 수많은 캐릭터들은 전부 마나와 관련된 재능들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어떻게 마법사가 된 거냐.’
애초에 마나 재능이 있지 않은 한 마법사가 되기 힘들다.
재능 없는 녀석이 마법사가 되려면 무지막지한 돈이 깨지지.
……그래서 가문이 파산한 걸까?
일단 이건 넘기고, 다음으로는 특성.
특성은 게임을 시작하면 무작위로 하나가 주어진다.
물론 쓰레기 같은 특성들부터 단 하나만으로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좋은 특성도 있었다.
애초에 노멀, 레어, 에픽, 유니크, 네 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좋고 나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나온 특성인데…….
‘듀얼 코어라니.’
특성은 무작위이기에 새로 게임을 시작하게 되면 수도 없이 캐릭터를 생성했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일명 리세마라.
물론 최고 등급인 유니크 특성은 안 나오지만 그 아래인 에픽만 해도 엄청나다.
게임에서는 그렇게 해서 좋은 특성이 나오면 시작했는데 현실인 이곳에서는 그런 꼼수도 사용하지 못했다.
[듀얼 코어]
―에픽
―마나 저장소가 두 개입니다.
―마검사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에픽 등급의 특성.
물론 등급만 보면 끝판왕급 특성이다.
그리고 마검사라니 얼마나 낭만 있는 울림인가.
‘개소리지.’
낭만 따라가다 다리가 찢겨 죽은 게 수십 번이다.
나라고 시도해 보지 않았겠는가?
엔딩만 12번을 봤는데.
한 우물만 파지 않으면 절대 깰 수가 없었다.
자원과 시간은 한정적이고 키워야 할 능력치는 두 배니 강해지는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
며칠간 알아본 바로는 아직 게임이 시작하는 시간대의 과거다.
비록 위기가 닥치는 유예기간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
‘아니, 오히려 현실이니까 잡캐로 키워야 하나?’
“하아.”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게임에서조차 노-데스 클리어는 한 번도 없었다.
아드리아스보다 훨씬 뛰어난 캐릭터들로도 노데스가 없다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만약 게임이었으면 죽든 말든 한 우물만 판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지만 생존을 목표로 둔다면 오히려 듀얼 코어 특성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지금의 난 게임 클리어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이 우선이었으니.
특성은 결국 계륵처럼 남기고 밑에 있는 재능을 보자 이곳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보기조차 싫었다.
‘잡스러운 재능이 있는 거야 그렇다 쳐. 근데 그것마저 범재에 둔재냐?’
A급 재능은 그냥 ‘마법’ 딱 두 글자만 써져 있다.
아니면 ‘검술’이라든가.
저렇게 뭔가 내용이 길어지면 오히려 안 좋은 거다.
딱 그 분야에서만 재능이 있다는 거니까.
근데 나는 그마저도 범재에 둔재다.
특히나 둔재의 경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오히려 역효과만 준다.
일반인이 100이라면 둔재는 70에서 80이라는 뜻.
‘물 마법은 젬병이라는 거네.’
나는 여기서 깨달았다.
세상이 날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다고.
아드리아스가 게임 초반에 수도 없이 죽은 이유도 이런 하찮은 능력 때문이겠지.
마지막으로, 스킬은 재능의 연장선상이었다.
재능이 뛰어나야 스킬의 숙련도와 레벨을 빠르게 올릴 수 있었지만 재능이 없으면 백날을 노력해도 안 되는 게 하필 마법 스킬이었다.
―흑마법: 기초 사령술 (3/100) 〉〉 스켈레톤 소환 LV1
―원소마법: 초급 땅 계열 (2/100) 〉〉 그리스 LV6, 락 스피어 LV3, 어스 실드 LV5
아카데미 3학년인 주제에 초급인 숙련도도 놀랍지만 겨우 한 개뿐인 원소 계열 마법도 미치고 팔짝 뛰겠다.
5학년이 되면 졸업을 위해 마법적 성과를 보여야 마탑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면 이 녀석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
아, 이 녀석이 아니라 나였지.
결국 이런 내게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띵!
[선택하지 않은 특성이 있습니다.]
선택 특성.
수많은 게임 플레이 중에서도 특성을 내 마음대로 골라 본 적은 없다.
이 게임은 로그라이크의 요소도 있어서 중간 보스를 해치우거나 업적을 세웠을 때도 가끔 특성을 얻을 수 있었는데 전부 무작위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골라야겠지.’
기숙사 방에 돌아온 나는 책을 놔두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면전에 뜬 문구에 긍정의 뜻을 비치자 문구가 바뀌었다.
[가지고 싶은 특성을 골라 주세요.]
눈앞에서 수백 개의 특성이 촤르륵 하고 나열되었다.
나는 목록에 있는 특성들을 신중히 살폈다.
우선 노멀 등급과 레어 등급의 특성은 전부 걸렀다.
‘이런 특성도 있었어?’
웬만한 특성은 전부 봤다고 자부했는데 에픽이나 유니크에는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유니크 특성은 게임 재시작으로도 얻을 수 없는 특성이다 보니 두세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특성이 하나 눈에 띄었다.
“이건…….”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계속해서 고민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최선일까.
이게 과연 최선인가?
내게 있는 자원과 시간은 얼마인가.
상황은 어떤가.
“후우.”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보니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미 내 앞에는 고민하는 동안 메모를 적은 온갖 종이 뭉치가 한껏 쌓여 있었다.
거기서 나온 결론은…….
‘결국 난 네크로맨서.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배웠던 걸 없앨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용하는 수밖에 없지.
들키지만 않으면.
정말 목숨이 위험할 때만.
게다가 네크로맨서는 무사히 성장하기만 하면 그 어떤 마법사보다 강력한 전천후 괴물이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매 플레이마다 네크로맨서를 먼저 찾아가 죽였을 정도로 악랄한 존재였다.
‘그중 하나가 이 녀석의 스승……. 잠깐.’
나는 급하게 달력을 확인해 보았다.
“늦었네.”
아드리아스의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이제야 떠오른 기억 속에서는 분명 어젯밤에 그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곤란했다.
죽지는 않을 거다.
……아마.
나는 곧바로 벗어 두었던 옷을 다시 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지금이라도 찾아가야지 안 그러면 진짜 죽을 거다.
‘그 전에…….’
나는 고민을 그만두고 생각해 두었던 특성을 선택했다.
며칠 더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빨리 특성을 얻고 이용해야지.
특성을 골랐으니 이제는 계획을 잘 세워서 최대한 살아남는 게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한 다음 단추는 아마 지금 찾아가는 곳이 될 거다.
난 이 빌어먹을 상황 속에서 반드시 살아남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