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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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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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행복
2023.01.19.
도화가 4-5살이었을 때, 아이의 세상은 병원이 전부였다.
매일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언니가 친절하게 웃으면서 예뻐해 줬지만 도화는 무서웠다. 엄마가 귀여운 인형을 사다 줘도, 어린이 병원의 아기자기한 풍경도 도화는 싫었다.
쓴 약을 먹는 것도 싫었고 주사도 싫었고 검사도 싫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었다. 얼른 나아서 엄마랑 같이 마음껏 밖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도화는 얼른 튼튼해지려고 밥도 열심히 먹었고 많이 웃었다.
엄마가 웃으면 복이 온다고 말해주었으니까.
도화가 그 동화책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별로 본 적이 없는 친척이 선물로 조금 낡은 동화책을 주었다. 자녀가 좋아하는 책인데 도화도 좋아할 거라며. 도화는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기대완 달리 그저 그런 내용의 동화책이었다.
도화의 얼굴에 금세 지루함이 떠올랐다.
‘재미없어.’
책을 덮으려던 도화의 시선을 잡아당긴 건 한 그림이었다.
따뜻한 노을빛이 인상적인 포근하고 다정한 그림. 절로 마음이 몽실몽실해지는 그림에 도화는 눈을 빛내며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엄마. 이 그림 그린 사람 누구일까.”
도화가 동화책을 내밀며 묻자 잠시 그림에 시선을 둔 세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엄마도 모르겠어.”
“엄마도 몰라?”
도화가 실망한 얼굴로 어깨가 축 처지자 세라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림책 재미없어하더니.”
“그냥.”
“……그 그림이 좋아?”
세라가 처음으로 푹 빠진 얼굴로 그림을 보는 도화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화는 동화책을 꼭 끌어안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너무 좋아. 따뜻해. 분명 이 그림 그린 사람도 따뜻한 사람일 거야.”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얼굴로 말하는 도화를 세라는 말없이 꼭 끌어안았다.
“그래. 엄마가 반드시 그 그림을 그린 사람 찾아줄게.”
세라는 반드시 그렇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도화는 그때부터 그림에 푹 빠졌다.
쓴 약을 먹으면 항상 사탕을 먹었는데, 이제는 그림을 보았다.
주사를 맞을 때도, 검사를 받고 힘들 때도 도화는 칭얼대지 않았다.
주사가 아파서 울다가도 베개 밑에 밀어 넣은 그림을 꺼내 보았다. 보고 있으면 아픈 것도 잊을 만큼 행복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도화는 그림을 보며 항상 생각했다.
‘빨리 나아서 여기에 가야지.’
그림은 도화의 병원 생활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언젠가 그림 속의 장소에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도화는 남몰래 소원을 빌었다.
여기에 간다면 분명 엄마도, 자기도 행복할 거라고 도화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실컷 놀다 노을 서점에 온 도화는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규희를 바라보았다. 규희도 애착 인형인 호랑이 인형을 손에 쥐고 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번 봤지만 여전히 토실토실한 볼이 귀여워서 도화는 저도 모르게 규희의 볼을 콕 찔렀다.
아우? 볼을 찔렸는데도 규희는 울기는커녕 고개를 기울였다.
콕. 콕. 콕.
도화가 쉴 새 없이 볼을 찌르자 마침내 규희가 호랑이 인형을 흔들며 짜증을 냈다. 그 모습마저도 귀여워서 도화가 눈을 빛냈다.
“도화야. 규희 그만 괴롭혀. 규희가 싫어하잖아.”
잠깐 짬을 내어 노을 서점에 온 세라가 경고했다.
그러자 기죽기는커녕 도화가 눈을 빛내며 홱 돌아보았다.
“엄마! 규희 내 거 할래!”
세라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뭐?”
“규희 너무 귀엽다. 내 거 할래. 재희 언니. 규희 나 주라. 응?”
도화가 떼를 쓰기 시작하자 재희가 소리죽여 웃었다.
세라는 도화의 말도 안 되는 떼가 부끄러워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도화. 규희는 물건이 아니야. 재희 언니 딸인데 달라니, 말이 돼?”
“내가 잘 키울게. 그러니까 나 주라. 응?”
포기할 마음이 없는지 도화라 본격적으로 재희 옷자락에 매달려 조르기 시작했다.
세라가 혼내려 하자, 재희가 가만히 도화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규희는 언니 보물이라 줄 수 없는걸.”
“잉.”
도화가 실망한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재희 언니라면 분명히 규희를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거절하자 도화는 속이 상했다.
실망한 티를 내는 도화의 머리를 한번 더 쓰다듬으며 재희가 규희를 무릎에 앉혔다.
“대신 도화가 앞으로 우리 규희랑 많이 많이 놀아줘.”
“내가?”
“응. 친언니처럼 놀아주면 규희도 재밌고 도화도 즐거울 거야.”
“응! 알았어. 내가 놀아줄게. 그럼 규희 데리고 내 비밀 아지트에 올라가도 돼?”
다락방은 어느새 도화의 비밀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무혁이 재희를 위해 침대까지 가져다 두었지만 재희는 개의치 않았다.
서점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노을 서점은 모두의 서점이었다.
“음. 규희는 아직 어려서 언니가 계속 볼 수 있어야 해. 대신 장난감 가지고 와서 여기서 놀아도 돼.”
“알았어. 가서 규희랑 같이 놀 수 있는 장난감 가져올게.”
도화가 장난감을 가지러 다락방에 올라가자 세라가 한숨을 삼켰다.
“너무 오냐오냐하면 안 좋아요. 집에서도 할머니가 오냐오냐해서 요즘 버릇이 없어지는 것 같아 큰일인데.”
“그래도 도화는 선을 넘진 않는걸요.”
“그건 그렇지만.”
재희 말대로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도화는 무작정 떼를 쓰진 않았다. 그래도 저러다 정말 버릇없어지면 어떡하나 세라는 걱정스러웠다.
재희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도화가 학교에 잘 적응해서 다행이에요.”
“내심 걱정했는데 저도 놀랐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제멋대로 굴거나 적응 못 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세라였다. 다행히 도화는 적응을 잘했고 친구도 많이 사귄 데다 선생님에게 칭찬도 곧잘 받았다.
세라는 모두 재희와 노을 서점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그림이 아니었다면, 재희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세라는 할머니와 감정의 골이 깊어진 채 화해조차 못 했을 터였다.
“언니! 규희 이거 좋아할까? 나 이거 너무너무 좋아하는 건데.”
다락방에 올라갔던 도화가 꽁꽁 감춰둔 동화책을 가지고 왔다.
오래전 도화가 병원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그 동화책이었다.
“규희한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꼭 보여주고 싶어. 분명 규희도 좋아할 거야.”
새삼스러운 눈으로 동화책을 보던 재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재희는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분명히 규희도 좋아할 거야.”
도화가 규희 옆에 척 자리를 잡고 앉아 동화책을 펼쳤다.
노을 서점 안은 규희에게 소리 내어 동화책을 읽어주는 도화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 * *
세라와 도화가 돌아간 뒤 자리를 정리하던 재희는 호랑이 인형을 가지고 놀던 규희가 엉금엉금 어디론가 기어가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규희야. 어디가?”
혹시 다칠까 싶어 재희가 뒤따라가는데도 규희는 꿋꿋하게 엉금엉금 기어서 한 곳에 자리까지 잡고 앉았다.
“아.”
재희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규희가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재희가 항상 앉았던 그 책장 앞이었다. 애착 인형인 호랑이 인형을 손에 꾹 쥐고 앉은 규희가 입구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규희야. 아빠 기다려?”
재희가 곁에 앉으며 묻자 아우, 규희가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옹알거렸다.
“엄마도 같이 아빠 기다릴까?”
재희는 규희 곁에 앉았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불투명한 유리문에 노을빛이 머금어졌다.
규희는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호랑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그런 규희를 바라보며 재희는 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이 자리를 알고 앉았는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덜컹, 작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노을빛이 대각선을 그리며 서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무혁의 모습이 보였다.
“…….”
무혁은 서점 안에 발을 들이다가 멈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과 제 심장과 다름없는 아내인 재희가 나란히 책장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재희가 머쓱하게 웃으며 규희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규희가 여기까지 기어 와서 앉았어요. 꼼짝도 하지 않고 내내. 아마 아빠를 기다리고 싶었나 봐요.”
“여기서?”
“네. 신기하죠? 어떻게 제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서 앉는지.”
재희가 웃으며 규희를 무혁의 품에 안겨주었다.
익숙하게 자세를 잡은 규희가 만족스러운 하품을 하자 무혁은 저도 모르게 풀어진 표정으로 규희의 볼을 조심스럽게 만져주었다.
“다녀왔다. 규희야.”
그러곤 무혁은 재희의 볼에 입 맞췄다.
“다녀왔어.”
“어서 와요.”
저녁을 먹으며 재희는 무혁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일상을 무혁과 함께 나누는 시간은 재희에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 후 재희는 미처 못 끝낸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노을 서점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다락방도 있었지만 옛날 이곳에 둘러앉아 공부를 했던 사람들처럼 재희 역시 종종 이곳에 앉아서 공부를 하곤 했었다.
재희가 공부를 하는 동안 무혁은 근처에서 규희를 봐주기로 했다. 저녁엔 퇴근한 무혁이 규희를 돌보고, 재희는 공부하는 것은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무엇보다 무혁이 그러길 강하게 원했다.
“끝났다.”
겨우 과제를 마무리한 재희는 노트북을 껐다. 자리를 정리하던 재희는 문득 수고했다며 말을 걸어오던 무혁이 오늘은 조용한 걸 눈치채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혁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파에 등을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었는데, 잠이 든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무혁의 배 위에서는 규희가 호랑이 인형을 쥐고 놀고 있었다.
‘아무리 무혁 씨라도 육아는 힘들었나 봐.’
잠든 무혁이 신기한 나머지 재희가 옆에 앉으며 규희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혹여라도 무혁이 깰까 조심스러웠던 재희는 근처에 있던 담요를 끌어와 무혁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아빠가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치?”
규희의 볼을 조물거리던 재희가 몸을 기울여 무혁에게 기댔다.
무혁의 낮은 숨소리와 커다란 품. 그리고 기분 좋은 노을 서점의 적막함,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규희까지. 무혁과 규희와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잠든 무혁을 보는 재희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부끄러워서 무혁 씨에게 말을 많이 해주지 못했는데.”
나지막하지만 마치 무혁에게 말하듯 재희가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혼자 중얼거리는 게 부끄러웠는지 재희의 얼굴이 빨개졌다.
민망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강한 손이 조심스럽게 재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시 말해봐.”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한 눈으로 재희를 보며 무혁이 속삭였다.
재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안 자고 있었어요?”
“응.”
“그럼 왜 자는 척을 했어요?”
“그보다 아까 하려던 말 다시. 잘 못 들었어.”
다 들었으면서.
재희는 능청스럽게 거짓말까지 하는 무혁을 밉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무혁은 반드시 재희에게서 그 말을 듣겠다는 듯 품에 가둬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재희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세상 누구보다 무혁 씨를 사랑해요.”
아무리 말해도 부족한 단어를 재희는 또렷하게 말했다.
무혁이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만큼 재희 역시 그만큼, 어쩌면 몇 배는 더 무혁을 사랑했다.
무혁의 입가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사랑해. 영원히 우리 행복하자.”
무혁이 화답하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남편의 애정 가득한 입맞춤에 재희는 해사하게 웃었다.
“아우.”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규희가 갑자기 바둥거렸다.
“규희야. 왜 그래?”
갑갑한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규희를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무혁과 재희는 탄성을 질렀다.
돌을 한 달 앞둔 규희가 조막만 한 손으로 바닥을 짚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었다.
“세상에. 규희야. 지금 일어선 거야?”
재희가 감탄을 내뱉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재희의 눈가에 환희에 젖은 눈물이 맺혔다. 무혁도 놀란 듯 굳어 있다가 팔을 뻗으며 그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규희야. 엄마랑 아빠한테 오렴.”
무혁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규희가 비틀거리면서도 엄마 아빠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재희와 무혁은 규희 스스로 걸어와 품에 안기길 바라며 한껏 응원했다.
마침내 규희가 어설프게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규희의 첫걸음.
응원을 받으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온 규희를 품에 안으며 재희의 무혁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 피어났다.
노을 서점에 또다시 행복한 추억이 새겨졌다.
아주 소중하고 행복한 재희와 무혁의 추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