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화해 (127/128)


#외전 4화. 화해
2023.01.16.


무혁과 재희는 신채근이 직접 예약했다는 식당에 도착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룸에 들어서자 규희가 굴러다니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공간이 보였다.

룸 한가운데에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신채근이 고개를 들었다.

신채근의 시선이 잠시 무혁의 품에 안겨있는 규희에게 닿았다.


“격조했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게. 장례식에 와줘서 고마웠네.”

무혁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신채근의 시선이 재희에게 향했다.


“오랜만이구나. 건강해 보이는구나.”

“네. 아버지도요.”

“앉거라.”

무혁의 무릎에 앉아 호랑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규희가 신기한 듯 커다란 눈으로 신채근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채근은 손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데 귀엽게 생겼구나. 이름이…….”

“규희예요. 강규희.”

“그래. 규희…… 강규희. 잘 어울리는구나.”

“저랑 무혁 씨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에요. 첫 아이라서 뜻깊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요.”

“그래. 예전부터 재희 네가 이런 쪽으로 감각이 좋았지. 그림도 잘 그렸고.”

“…… 보신 적 있으세요?”

“네가 고등학생 때 연습하다 버린 걸 한 번씩 봤다.”

“실패한 건데요…….”

“그래도 잘 그렸었어.”

어색한 대화가 이어지다 신채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그간 많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채근은 맞은편에 앉은 딸 내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이 집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결혼을 시켰는데 아이까지 낳고 많이 안정된 재희를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


‘재희 네 말대로 여기까지 오기가 참 오래도 걸렸구나.’

신채근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게 보이더구나.”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신채근은 그제야 제 집안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아직 죽은 첫 아내가 그리웠지만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건 홍연화였다. 이미 집안에선 첫 아내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얇은 막처럼 현실을 가리고 있던 미련이 걷어졌다.


“그저 네 엄마를 사랑했던 그 시간에 내가 미련이 남아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이별이었기에 더더욱 미련이 남아서 현실을 외면하고 행복했던 시간에 머물렀던 것 같았다. 재희가 그 때문에 상처받은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난 그 미련 때문에 너에게도 많은 상처를 주었다.”

“…….”

“재혁이를 통해서 규희 사진을 많이 봤다. 그리고 규희를 안고 있는 재희 너도. 전혀 다른 사람인데 네가 그 사람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아내와 겹쳐봤었어.”

“…….”

재희는 신채근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열지 않았다. 신채근 역시 재희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못난 아비라 힘들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고 싶구나.”

“…….”

“당장은 편한 친정이 되어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딸이 못난 아비의 도움을 바란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다.”

“…….”

“미안하다. 재희야. 그동안 내가 너에게 잔인했다.”

신채근의 진심 어린 사과에 재희는 먹먹해져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재희의 입술이 달싹였다가 다물리길 몇 번. 문득 재희는 자신의 손을 감싸는 커다란 손이 주는 온기에 그쪽으로 바라보았다.

규희를 안은 무혁이 재희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재희는 그를 보며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가 신채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해요. 저한테 진심으로 사과해 주셔서 기뻐요.”

눈가가 발개졌지만 재희는 아버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고맙다.”

신채근의 진심에 재희의 표정은 한결 편해져 있었다


“규희가 할아버지와 처음 만나서 그런지 궁금한 모양이야.”

덤덤하게 말한 무혁이 규희를 재희에게 넘겨주었다.

규희를 품에 안으며 재희가 바라보자 무혁은 가만히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규희에게 할아버지를 소개해줘야지.”

분위기를 풀어주는 무혁의 배려에 재희가 따뜻하게 웃었다.


“아버지. 규희 안아 보실래요? 무혁 씨 말대로 규희가 할아버지가 무척 궁금한 모양이에요.”

신채근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희가 규희를 안겨주었다.

조심스럽게 손녀를 안아 든 신채근의 얼굴에 감격과 기쁨이 뒤섞였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규희가 짧은 팔을 뻗어 신채근의 얼굴을 더듬었다.

작은 아이가 주는 온기에 신채근의 가슴 한구석에 거스러미처럼 남아 있던 한 조각의 미련마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예쁘구나. 규희가 너무 예뻐.”

이날 재희는 처음으로 편하게 웃는 신채근의 얼굴을 보았다.

* * *

신채근과의 식사는 어색하지만 즐거웠다.

내내 규희를 안고 이것저것 말을 시켜보던 신채근은 규희가 재희를 꼭 닮았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식사 내내 신채근은 단 한 번도 재희를 보며 죽은 전 아내를 떠올리지도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무혁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신채근은 아버지로서 ‘우리 딸’에게 점심을 사주는 것뿐이라며 기어이 결제를 했다. 규희와 인사까지 나누고 돌아가는 신채근의 뒷모습을 보는 재희의 시선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규희를 씻긴 뒤 재우기 위해 재희가 침대에 눕자 무혁 역시 반대편에 모로 몸을 뉘었다.

졸음을 못 이기고 잠드는 규희를 보는 무혁과 재희의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규희 배에 이불을 덮어주며 무혁은 가만히 재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무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재희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위로예요? 아니면 칭찬?”

“둘 다.”

무혁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느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웃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야.”

“……걱정했어요?”

“조금은.”

“미안해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무혁이 재희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받쳐 올렸다. 그늘 한점 없는 맑은 눈동자를 보던 무혁이 가만히 눈가에 입 맞췄다.


“그저 이렇게 다시 웃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재희는 자신의 턱을 받친 무혁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굳은살이 배긴 단단한 손가락을 가만히 매만지며 읊조렸다.


“무혁 씨 덕분에 계속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푸스스 웃는 재희를 보며 무혁은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를 낳아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는 무혁의 시선엔 애정이 가득했다.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어떤 거요?”

“결혼하기 전에 재희가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고 결심한 것.”

무혁이 가만히 재희 이마에 입맞춤했다.


“맞선을 본 날 재희가 감당할 수 있겠냐며 나한테 말했었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내뱉은 말이었다.

그날을 떠올린 재희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요.”

“알고 있어. 그래도 치기 어린 말이었어도 난 다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어.”

사치를 부려도 좋았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다만 재희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했다. 늘 웃고 울 때도 자신의 앞에서만 울길 바랐다.

놓치고 싶지 않았고 욕심이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욕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희가 너무 욕심이 났거든.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내내 붙어 있고 싶어.”

무혁은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몸을 일으켰다. 약간 흐트러진 재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재희를 내려다보며 무혁의 강직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렇게 수시로 입 맞춰도 갈증 나.”

담백한 말이었지만 재희는 무혁의 목소리에 감도는 욕망을 읽어내곤 얼굴을 붉혔다.

규희를 품고 있는 동안 무혁은 극성이다 싶을 정도로 재희를 아껴주었다. 규희가 태어난 뒤에도 무혁은 없는 시간까지 쪼개 재희가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길 바라며 육아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도우미가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육아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는지라 단둘이 시간을 보낸 게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요즘 아버님이 규희가 예쁘신가 봐요.”

“…….”

“규희도 아버님이랑 어머님 잘 따르구요.”

무혁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재희가 볼을 붉히며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정도 규희를 봐달라고 부탁드리면 기뻐하실 것 같은데…….”

은근히 건네는 말에 무혁의 턱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재희가 팔을 뻗어 가만히 무혁의 입술을 엄지로 매만졌다. 작은 손길에도 자극을 받은 무혁의 얼굴에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무혁을 보며 재희가 앙큼하게 웃었다.


“저도 무혁 씨랑 오랜만에 단둘이 보내고 싶어요.”

“재희 너는.”

무혁이 거친 한숨을 토하며 등을 들썩였다.


“이래서 내가 재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재희는 참는 기색이 역력한 무혁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재희 말대로 규희를 하루만 부탁하자 강진과 혜란은 반색했다.

규희를 맡긴 뒤 오랜만에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 재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이 조금 숨 막힐 정도였다. 호기롭게 나름대로 무혁을 유혹했지만 이후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먼저 씻자고 해야 하나. 아니면…….’

수없이 무혁과 밤을 보냈지만 오늘따라 유독 긴장이 되었다.

집에 들어서자 철컥 현관문이 잠겼다. 그 소리에 잔뜩 긴장한 재희가 흠칫 놀라 돌아보자 무혁이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무혁 씨. 그러니까.”

“같이 씻자.”

“네?”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직구가 날아오자 재희가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인가 싶어서 무혁을 살폈지만 오히려 짙은 욕망이 드러난 게 보이자 재희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우리 조금만 천천히…….”

“재희가 먼저 날 자극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저벅, 무혁이 한걸음 다가왔다.

재희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무혁이 그런 재희를 보며 조금은 짓궂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시간 아까워.”

“무혁 씨.”

무혁은 재희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허리를 숙였다. 무혁의 입술이 귓가에 닿자 재희가 간지러움에 몸을 떨었다.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닿고 싶어서 그래.”

기분 좋은 짜릿한 소름이 피부를 훑었다.

재희는 무혁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어색하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저도 그래요.”

 

* * *

쏴아.

샤워기에선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재희는 얼굴을 붉힌 채로 자신의 앞에 선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몇 배는 커다란 몸에 보기 좋게 잡힌 근육이 그녀의 시선을 앗아갔다. 재희가 조심스럽게 무혁의 가슴팍을 쓰다듬자 무혁이 약하게 으르렁거리며 작은 손을 쥐었다.


“자극하지 마.”

“하지만 멋진 몸인걸요. 미대생들이 찾는 완벽한 몸이에요.”

“흐음.”

칭찬이겠지만 무혁은 그 말이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좁혔다.

재희가 약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저 말고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신혼여행 가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어떤?”

“앞으로 재희 앞에선 벗고 있을 테니 익숙해지라고 했던 말.”

“아…….”

그때 일을 떠올린 재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때. 이번 기회에 익숙해지는 건.”

무혁이 재희의 손을 끌어와 심장 부근에 얹었다. 손바닥에서 무혁의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재희는 떨리는 눈으로 무혁의 얼굴부터 시작해 찬찬히 조금씩 그의 몸을 살폈다. 아래로 갈수록 얼굴이 붉어졌지만 재희는 눈을 감지 않았다. 이윽고 한숨을 터뜨리며 재희가 눈을 꾹 감았다.


“안 되겠어요. 어떻게 무혁 씨 몸에 익숙해져요.”

“왜?”

무혁이 허리를 숙여 속삭이자 재희가 밉지 않게 흘겼다.


“근사한 몸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걸요. 무혁 씨는 정말 근사하니까.”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 무혁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익숙해지도록 앞으로 노력해야겠어.”

무혁은 재희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작은 입술을 삼켰다.

약하게 터져 나온 아내의 신음마저도 삼키며 무혁은 재희를 받쳐 들어 깊게 입을 맞췄다. 물기에 젖은 재희의 하얗고 가녀린 몸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이어서 무혁은 그 위에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피부에 닿는 자극에 재희는 무혁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숨을 삼켰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무혁의 짙은 욕망에 재희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곳곳에 자국을 남긴 무혁이 고개를 들었다.

물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 강한 소유욕이 감도는 짙은 눈동자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눈가에 입을 맞췄다.


“자꾸 자극하지 말라고 했잖아.”

경고 실린 거친 음성에 재희가 두 손으로 가만히 무혁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선이 굵은 남편의 얼굴. 처음엔 무서웠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멋진 얼굴이었다.


“자극하면요.”

“재희가 고달파질 거야.”

“괜찮아요, 고달파져도. 대신에.”

재희가 무혁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날 힘껏 사랑해 줘요. 나도 무혁 씨를 힘껏 사랑할 수 있게.”

“그 말 후회하지마.”

“안 해요.”

무혁이 입을 맞췄다.

그간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중한 입맞춤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담은 거칠고 감미로우며 짙은 키스였다.

온몸 곳곳을 훑으며 재희를 먹어버리겠다는 듯 진득한 손길에 재희는 참을 수 없어 숨을 터뜨렸다. 부끄러움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오롯이 무혁만 느껴졌다.

그날 달콤한 단둘의 시간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