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연락 (126/128)


#외전 3화. 연락
2023.01.12.



 
노을 서점 앞에 차가 한 대 멈췄다.

차주 무혁이 차에서 내려 뒷자리 차 문을 열어주자 재희가 규희를 안고 내렸다.


“내가 안을게.”

자연스럽게 규희를 넘겨받은 무혁이 노을 서점 문을 열자 묵은 나무와 책 냄새가 섞인 공기가 세 사람을 맞아주었다. 노을 서점을 둘러보는 재희를 보며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재희가 규희를 데리고 처음으로 노을 서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무혁은 흔쾌히 동의했고, 오늘 노을 서점에 재희를 데려다주었다.


“전 괜찮아요. 규희랑 꼭 같이 노을 서점에 와보고 싶어졌어요.”

저를 구박하고 미워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재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무혁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라 휴가까지 쓰며 줄곧 함께 있어 주었다. 덕분에 재희는 빨리 털어낼 수 있었다.

무혁은 규희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소파에 앉은 규희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낯선 장소라서 울까 싶어 지켜봤지만 다행히 규희는 마음에 드는지 꺄아 웃었다. 찰칵,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재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따 저녁에 꼭 와야 해요.”

“그래.”

“노을 서점에 무혁 씨가 없으면 안 되니까.”

“내가 할 말이야.”

무혁은 가볍게 재희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걱정 말아요.”

“전화할게.”

“얼른 가요. 늦었어요.”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지 무혁이 몇 번이나 그답지 않게 잔소리에 가까운 염려를 표시했다.


“규희야. 아빠 다녀올게.”

무혁이 규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가볍게 볼에 뽀뽀해주었다.

그러곤 재희에게도 마찬가지로 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다녀올게.”

“응. 다녀와요.”

무혁이 출근한 뒤 재희는 소파에 앉으며 규희를 제 무릎에 앉히곤 눈을 마주쳤다.


“규희야. 여기 처음 오지?”

호랑이 인형을 꾹 쥔 규희가 말간 눈으로 보자 재희가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는 엄마랑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입을 오물거리는 규희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며 재희가 아직 알아듣지 못할 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랑 아빠가 여기서 처음 만났거든. 엄마는 여기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너무 행복했어. 그래서 규희가 태어나면 꼭 데리고 와야지 하고 생각했었어.”

재희는 규희와 함께 노을 서점에 갈 날을 기대했다.

노을 서점에서 무혁과 규희와 함께 도란도란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행복해졌다.

소중한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 아이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쌓는 건 멋진 일이었다.


“우리 규희가 건강하게 태어난 덕분에 엄마가 드디어 그 꿈을 이뤘네.”

무혁과 자신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아이.

재희는 규희와 만날 날을 기대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품었던 아이였기에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예쁜 딸이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시기도 그렇고, 규희는 재희에게 멋진 기적을 가져다준 소중한 보물이었다.


“우리 규희. 앞으로도 건강해야 해.”

아우. 대답하듯 옹알거리는 규희 뺨에 뽀뽀한 재희는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작은 체온이 퍽 소중하게 느껴졌다.

한창 딸과 놀아주던 차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나야 재혁이.

재혁이었다.

발인까지 끝나고나서야 재혁은 겨우 한국에 도착했다. 끝내 할머니는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던 재혁을 보지 못한 것이다.

재혁이 입국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재희는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재혁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나 잠깐 누나 만나고 싶은데.

“……괜찮니.”

많은 게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재희의 의도를 파악한 재혁은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 재혁이 간신히 대답했다.


-……응.

“나 노을 서점에 있어. 규희가 있어서 멀리 못 나가. 네가 올래?”

-응. 알았어. 내가 갈게.

“위치가…….”

-아냐. 나 어딘지 알아. 누나가 항상 겨울만 되면 가던 거기잖아.

재혁의 말에 주소를 알려주려던 재희가 멈칫했다.

잠시 재희가 말이 없자 재혁이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나가 겨울만 되면 자주 늦게 들어온 적 많았잖아. 걱정돼서 한번 찾으러 갔다가 알게 된 거야.

겨울이 되면 노을 서점 앞에서 하염없이 헛된 희망을 품고 기다리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재희가 읊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전 일이야.”

-그래도 한번 밖에 안 가봤지만 위치는 기억하고 있어. 금방 갈게.

“알았어. 기다릴게.”

얼마 안 가 재혁이 노을 서점에 찾아왔다.

노을 서점에 들어서던 재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낡은 외관과는 달리 안이 깔끔하고 멋들어져서 놀란 눈치였다.


“여기였구나. 누나가 항상 왔었던 곳이. 안은 처음 봤어.”

진심으로 감탄하는 재혁을 보며 재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응. 멋진 곳이지.”

“그러게. 누나 말대로 멋지다.”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하던 재혁은 재희의 품에 안겨 있는 규희를 발견하곤 씨익 웃었다.


“네가 규희구나. 나 삼촌이야. 우리 여러 번 통화했는데 기억나?”

재희가 영상통화로 여러 번 보여주었지만 규희가 재혁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낯가림이 별로 없는 규희는 스스럼없이 처음 본 재혁에게 안겨선 자세까지 편하게 잡았다.

규희를 안고 둥기둥기해주던 재혁이 재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규희 누나 진짜 많이 닮았다.”

“그래?”

“응. 눈이 이렇게 큰 것도, 코도 다 누나 닮았어. 규희가 조금 더 자라면 매형이 속 좀 타겠는걸.”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앉아 있어. 마실 거라도 내올게.”

뜨거운 차를 내가려던 재희는 마음을 바꿔 얼음 몇 개를 넣었다. 지금은 재혁이에겐 뜨거운 차보단 차갑게 한 차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차를 내가던 재희는 규희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장난치는 재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재혁은 살이 많이 빠졌다. 조금 수척해 보이는 듯도 했다.

할머니의 사망에 꽤 충격이 컸을 텐데도 다행히 걱정한 만큼 어두운 표정은 아니어서 내심 안도했다.


“얼음 좀 많이 넣었어.”

“고마워. 마침 차가운 게 마시고 싶었는데.”

재혁이 마시기 편하게 재희가 규희를 안아 들었다.

단숨에 음료를 마신 재혁이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려고.”

“완전히 돌아오려고?”

“응. 세상 진짜 넓더라. 소매치기도 당해보고 여행 비용 떨어져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실수도 많이 하고 혼나기도 많이 혼났어.”

주절주절 제가 겪은 얘기를 하던 재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철부지인지 깨달았어. 이제 좀 정신 차리고 학교도 마저 마치고 틈틈이 아버지 일도 좀 도우려고.”

“아버지와 얘기는 나눴어?”

“처음으로 아버지랑 술 마시면서 대화 좀 많이 나눴어.”

재희는 가만히 규희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할머니의 죽음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늘 당당하던 재혁의 어깨가 조금은 처져 있었다.

재희에겐 한없이 잔인한 할머니였지만 재혁이에겐 그렇지 않았기에 말을 선뜻 꺼내기 어려웠다.


“누나한텐 못된 분이셨지만 나에겐 안 그랬던 분이야. 솔직히 마지막에 내가 할머니에게 그렇게 행동한 게 후회돼.”

“응. 알아.”

“그렇다고 할머니의 행동이 모두 용서되는 건 아니야. 누나는 그냥 평소대로 지냈으면 좋겠어. 혹시라도 죄책감 느끼고 있다면 그러지 않았으면 해.”

재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슬쩍 보자 재희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그러려구. 할머니는 나에게 끝까지 사과를 안 하셨으니 나도 용서 안 하려고 해.”

담담한 재희의 대답에 재혁이 씨익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누나가 죄책감 느끼고 있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어.”

“이제 나한텐 무혁 씨도 있고 규희도 있고 날 아껴주는 새로운 가족도 있어.”

잠시 말을 끊은 재희는 재혁을 바라보았다.

피부는 좀 탔지만 재혁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은 성장한 듯했다.


‘네가 성장했듯 나 역시 예전처럼 살지 않을 거니까.’

재희가 전보다 단단해진 눈으로 재혁을 보며 말했다.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거야. 소중한 사람만 바라보며 사랑하기에도 아까우니까.”

재희의 대답에 다소 안심한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툭툭 털었다.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왔어. 누나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다.”

재희와 규희를 번갈아 보던 재혁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만간 아버지가 찾아오실지도 몰라.”

“…….”

“생각이 많아 보이셨거든. 그냥, 누나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 그래.”

아버지가 찾아올 줄도 모른다고 하니 잠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재희는 이내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간 한 번 더 겪을 일이었기에 초연해지기로 했다.

주섬주섬 소지품을 정리하던 재혁은 한참 동안 규희를 빤히 보다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누나. 나…… 규희 자주 보러 와도 돼?”

“그럼. 삼촌인걸.”

재희가 흔쾌히 허락하자 그제야 재혁이 편하게 웃었다.


“난 인제 그만 갈게. 잘 마셨어.”

노을 서점 입구를 나서던 재혁이 재희를 보며 씩 웃었다.


“여기 정말 멋지다. 누나가 왜 그렇게 그리워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돌아가는 재혁의 등이 어쩐지 전보다 넓게 보였다.

재혁이가 돌아간 뒤 재희는 낮잠 자는 규희의 배를 토닥였다.

여러 생각이 드는 것과 별개로 한없이 평화로운 오후여서인지 절로 눈이 감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재희는 문득 기척에 눈을 떴다.

어느덧 잠에서 깬 규희를 한 팔로 안아 들고, 다른 팔로 재희에게 담요를 덮어주던 무혁과 눈이 마주쳤다.


“무혁 씨.”

재희가 몸을 일으키자 무혁이 만류했다.


“좀 더 누워 있어.”

“괜찮아요. 잠이 깼어요. 온 줄도 몰랐어.”

“피곤했던 모양이야.”

규희가 배고프다며 칭얼대자 재희가 분유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내가 타올게.”

“무혁 씨도 피곤하잖아요. 분유 정도는 제가 할게요.”

“괜찮아. 이런 건 내가 할 테니 쉬고 있어.”

무혁이 분유를 타온 뒤 익숙하게 규희를 안아 들고 젖병을 물렸다.

무척 배가 고팠는지 규희가 쌕쌕 숨소리까지 내며 꼴깍꼴깍 맛있게 먹자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무혁이 규희의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는 것까지 지켜본 재희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아버지와 만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사실 만나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재희가 마음 가는 대로 해.”

“…….”

“만나기 싫다면 만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무혁이 규희를 재희 품에 안겨주었다.

배가 불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규희를 꼭 끌어안자 작은 아이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만나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

무혁은 손을 뻗어 가만히 재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무혁의 눈에 재희는 약하고 보호하고 싶은, 그러나 한없이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더 이상 규희 사진을 재혁이에게 보내면서 아버지에게 전해지길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재희가 잠시 굳었다가 이내 힘없이 웃었다.

무혁의 말대로였다. 수시로 재혁에게 규희 사진을 보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규희를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재혁이라면 한 장 정도는 아버지에게 전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정말 무혁 씨한테는 뭔가 감출 수도 없네요. 너무 잘 알아요.”

“당연하지. 내가 제일 신경을 쓰는 존재는 재희, 너 하나뿐이니까.”

“알았어요. 만약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오면 무혁 씨. 저와 같이 가줘요.”

“기꺼이.”

무혁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짧지만 여운이 남는 입맞춤에 재희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 * *

얼마 뒤 재혁의 말대로 신채근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다행히 신채근의 목소리는 괜찮게 들렸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만나고 싶구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희는 머뭇머뭇했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디로 가면 돼요?”

-뭐가 먹고 싶으냐.

신채근의 물음에 재희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재희에게 먼저 뭐가 먹고 싶은지 물은 건. 재희는 그 사소한 질문에도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 규희도 데리고 가야 해서 그냥 룸으로 된 한식당이 좋아요.”

신채근은 당장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신채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좋은 곳을 알고 있다. 내가 예약해 두마.

“네. 무혁 씨도 같이 갈까 하는데…….”

-그러거라. 그리고.

신채근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네 엄마와 함께 갔던 곳은 아니다.

신채근은 그날 보자면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재희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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