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노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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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노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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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노을 서점
2023.01.02.
우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형이 갑자기 신혼집에 가족을 초대한 것이다. 혜란이 평창동으로 오라고 했지만, 무혁은 갈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덕분에 우진은 화가 난 혜란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아무 이유 없이 가족을 초대할 형이 아니거니와, 항상 이런 자리에서는 폭탄을 들고 있었던 무혁이어서 우진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후식을 앞두고 강진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여기까지 식구들을 다 부르고.”
무혁이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가 볼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무혁이 가만히 등을 다독여 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심각한 일이야?”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재희를 보며 혜란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무혁 씨랑 저, 부모가 될 것 같아요.”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컵을 쥐고 있던 강진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혜란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리기까지 했다. 쨍그랑, 정적을 깨진 건 우진이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리면서였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새아가.”
강진이 되묻자 무혁이 잘못들은 게 아님을 확인시켜주듯 재차 말했다.
“저희 아이 가졌습니다.”
“아이라니? 누가? 재희가?”
혜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물었다.
재희가 아랫배에 손을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초기이지만 병원도 다녀왔고 아기집도 확인했어요. 잘 자라고 있대요.”
무혁이 아랫배를 감싼 재희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의 말이 농담이 아닌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는 거냐.”
강진이 믿기지 않는 듯 그답지 않게 재차 묻자 재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강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아버지라. 할아버지.”
강진이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린 우진이 진심으로 축하를 해왔다.
“축하해요! 형수님. 형도. 내가 삼촌이 되는 날도 오는구나!”
“고마워요.”
우진의 축하를 받던 재희의 시선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혜란에게 향했다.
전시회는 끝났다 하더라도 재희에게 라윤 갤러리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아이를 가졌으니 혜란이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 걸 내심 각오한 터였다.
“어머니. 죄…….”
“너 몸은 괜찮니?”
혜란의 말에 죄송하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혜란의 표정에선 질책 등의 감정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이 조금 많아진 걸 제외하면요.”
“그래. 다행이다. 초기일 땐 조심해야 해. 갑자기 연차를 써서 왜 그런가 했더니. 세상에.”
믿기지 않는 듯 혜란이 연신 중얼거리다 문득 진지한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축하할 일이지만, 아이를 배 속에 품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난 걱정부터 되는구나.”
혜란의 진심 어린 걱정에 재희가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무혁 씨도 있고 이렇게 다들 축하해 주시고 걱정해 주시는걸요.”
그런 재희를 혜란이 장하다는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야. 축하한다. 재희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넌 내 며느리보단 딸 같으니까. 알겠니?”
“네. 그럴게요. 그보다 어머님.”
“그래. 뭐든 말해보렴.”
“갤러리 일은…….”
아이를 가진 건 기쁘지만 갤러리 일은 여전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재희의 걱정과 다르게 혜란이 담백하게 말했다.
“갤러리 일 같은 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몸이 우선이야.”
“감사해요. 어머니.”
걸렸던 작은 걱정까지 말끔히 사라지자 그제야 재희가 편안하게 웃었다.
“집에 남는 방이 많다.”
자리가 마무리되는 가운데 강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강진에게 집중되었다. 강진은 그답지 않게 큼,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햇볕도 잘 들고 창문도 큰 방이 남아 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예요? 답지 않게 왜 말을 뱅뱅 돌려요.”
혜란이 가볍게 타박했지만 강진은 꿋꿋했다.
“거기를 새아가 마음대로, 아가방으로 꾸며보거라.”
“네?”
“적어도 평창동에 왔을 때 아기가 당장 놀 곳과 잘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아직 한참 멀었지만 강진은 이미 앞서 나가 있었다.
매사 현실적으로 보고 구는 아버지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방을 생각하자 우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웃으면 한동안 아버지에게 시달릴 걸 아는지라 웃음을 참는 우진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혜란이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하려던 찰나, 강진이 예뻐하는 새아기 재희가 웃으며 말했다.
“네. 아버님. 예쁘게 꾸며볼게요.”
재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강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재희가 한마디 더 붙였다.
“사진도 자주자주 보내드릴게요.”
“바쁘다면 굳이 안 그래도 된다.”
싫지 않은지 강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보다 재희야.”
그런 강진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혜란이 문득 말을 꺼냈다.
“이 기회에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떠니.”
“공부요?”
뜻밖의 제안에 재희가 혜란을 바라보았다. 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태교도 해야 하고, 건강관리도 해야 하니 당장은 아니야. 그래도 천천히 준비해서 대학원도 가고, 못 했던 공부를 마저 마치는 게 어떨까 해서.”
“그렇게 하면 갤러리 일에는 소홀해질까 봐서요.”
재희는 싫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학만 졸업하고 마저 공부를 마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렴. 갤러리 일은 나중에 해도 상관없으니까.”
혜란의 뜻밖의 제안에 재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끌리는 제안이었지만, 이미 많은 걸 받았는데 여기서 더 받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식구들이 돌아간 뒤, 재희는 무혁의 팔을 베고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혁은 비스듬하게 누운 채 생각에 잠긴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혁 씨.”
“그래.”
“저 공부하고 싶어요.”
결혼한 뒤 많은 걸 받은 재희였다. 거기에 아이라는 커다란 선물도 받았는데 이 이상 더 받을 게 있다니. 거기다 더 하고 싶었지만 마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할 기회까지 생겼지만, 재희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해.”
“그렇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되겠죠.”
“그래.”
무혁의 대답은 담백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 뒤를 지지해 주겠다는 의지와 같았다.
재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이제 마음껏 욕심을 내도 돼.”
재희가 완전히 잠들자 무혁이 가볍게 이마에 입 맞췄다.
* * *
재희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고 하자 더 기뻐한 것은 혜란이었다.
혜란의 권유에 갤러리 일을 잠시 쉬기로 한 재희는 그때부터 태교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뭐? 임신? 진짜?”
“응. 얼마 전에 알았어.”
“오늘 무슨 만우절이니? 아닌데. 진짜야?”
“진짜야.”
희수는 재희의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놀라워하면서도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축하선물이라며 이것저것 주문해 주려는 희수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지만, 그조차도 재희는 기쁘기만 했다.
다음으로 재혁에게 재희가 소식을 전하자 재혁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
지금 어디 더운 나라에 있는지 반팔을 입고 까무잡잡하게 피부가 탄 재혁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재혁아. 목소리 낮춰.”
-그게 중요해? 아니. 누나. 아, 그 뭐라고 해야 하지.
당장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놀라운지 재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재혁이 씨익 웃었다.
-축하해. 누나.
“고마워.”
당장 귀국할 수는 없지만, 지금 어느 나라에 있다면서 당장 그 나라에서 몸에 좋다는 건 당장 보낼 기세였다. 겨우 진정한 재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나. 아버지한테는…….
“말씀 안 드릴 거야.”
-…….
“아직 아버지에게는 소식을 전할 시기가 아닌 것 같아.”
재혁은 여행을 하다 아버지와 우연히 통화했었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재희와의 일을 들은 재혁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아버지에게 크게 화를 냈었다.
차라리 무관심한 게 나았을 정도로 아버지는 재희에게 잔인했었다. 이후로 재혁은 아버지와의 연락도 거의 하지 않다시피 했다.
-누나. 내가 가면 정말 잘할게!
재혁의 다짐에 웃으며 뭐라 대답하려던 재희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빠져나갔다.
곁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무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건 내가 할 일이니 신경 끄도록.”
히끅.
휴대전화 너머로 재혁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여행 잘 다녀오라고 짤막하게 말한 무혁이 가차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황당한 얼굴로 재희가 바라보자 무혁은 뻔뻔한 얼굴로 가만히 입술에 입 맞췄다.
“이런 거로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요.”
“임신한 아내를 챙기는 건 남편이 할 일이지, 처남이 할 일이 아니야.”
짐짓 재희가 엄하게 말했지만, 무혁의 말에 금세 표정이 풀어졌다.
“조금씩 입담이 늘어가고 있는 거 알아요?”
“아직 한참 멀었어. 내 진심을 전하기에는.”
그 말에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해요.”
화려한 입담이 없어도 재희는 무혁의 진심을 늘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차고 넘칠 만큼 말이다.
* * *
임신 소식을 들은 세라 역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제 거의 제 아지트처럼 노을 서점에 들락거리는 도화가 심각한 눈으로 재희의 배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아기가 있어?”
“응. 아직 티가 나진 않지만.”
“여자아이야?”
“아직은 몰라. 그렇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만져봐도 돼?”
“그럼.”
재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도화가 조심스럽게 작은 손으로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빨리 태어나서 나랑 놀자.”
마치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도화가 속삭이자 재희는 그만 웃고 말았다.
도화가 장독수의 화실에 놀러 간다며 나가버리자 그제야 세라가 웃으며 말했다.
“갤러리 일은 잠시 쉬기로 했다면서요.”
“네. 일단 몸조리부터 하는 게 좋겠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셔서요. 대신 쉬는 동안 좀 더 공부하기로 했어요.”
“공부요?”
“대학원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요. 이번 기회에 준비를 좀 할까 해요.”
할머니의 반대에 유학은커녕 대학원 진학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내심 미련이 남아있던 재희였다. 대학원에 갈 때쯤엔 아기를 낳은 후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이라도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럼 임신 축하선물로 이걸 드려야겠네요.”
세라가 명함을 꺼내 재희에게 내밀었다.
명함을 본 재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명함에는 프랑스 유명 대학교의 교수 겸 미술관 관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랑 친분이 있는 분이세요.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열 때마다 이분과 항상 호흡을 맞춰왔죠. 제가 재희 씨 이야기를 했더니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비록 지금은 프랑스에 계시지만 자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답해주실 거예요. 제 덕분에 한국에도 흥미가 있으시다며 한국어도 꽤 잘하세요.”
세라는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재희에겐 너무나도 큰 선물이었다.
“그래도 이건…….”
“부담 갖지 말아요, 재희 씨. 전 앞으로 계속 라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생각이에요. 그러니 제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세라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고마워요.”
세라가 장독수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며 돌아간 뒤 재희는 노을 서점에 남아 무혁을 기다렸다.
무혁은 좀 더 편한 집에서 태교를 하길 바랐으나, 재희에게는 노을 서점이 가장 편한 곳이었다.
그래도 못마땅한지 무혁은 불편하게 있는 걸 볼 수 없다며 다락방에 푹신한 침대를 들여놓았다. 덕분에 재희는 다락방을 거의 안방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음악을 듣고 책도 읽으며 한가롭게 보내다 깜박 잠에든 모양이었다.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재희가 깜박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혁이 보였다.
“언제 왔어요?”
“방금. 좀 더 누워 있어.”
무혁이 일어나려는 재희를 도로 눕히며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이젠 무혁의 과한 보호는 익숙해졌다. 조금이라도 찬바람이 들지 못하도록 무혁이 이 노을 서점을 몇 번이나 둘러봤는지 모른다. 바로 어제도 둘러봐 놓고선 무혁은 오늘도 어디 바람 들어오는 곳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무혁 씨. 그만하고 이리 와요.”
재희가 침대 옆을 두드리자 무혁이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그러곤 재희의 배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축복아. 다녀왔다.”
태명으로는 축복이라고 지었다.
축복이는 아직 듣지도 못하건만 무혁은 매일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아이에게 짧지만 사랑이 담긴 인사를 했다. 이윽고 무혁이 당연하다는 듯 재희에게 입을 맞춰왔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무혁 씨. 저 노래 불러줘요.”
“노래?”
“듣고 싶어요.”
재희는 한 번도 무혁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혁은 워낙 과묵하기에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가 노래 부르는 걸 듣고 싶었다.
재희의 요구에 무혁은 잠시 고민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이윽고 듣기 좋은 중저음의 노래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옛날 LP판으로 듣는 재즈 같아서 재희는 가만히 눈을 감고 감상했다. 짧은 노래가 끝나자 재희가 웃음 지었다.
“노래, 잘하네요.”
무혁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재희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원한다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불러줄 수 있어.”
“매일 요구하면 어쩌려고요.”
“얼마든지.”
재희는 무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무혁은 재희가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까지 고치며 가만히 머리카락과 뺨을 매만졌다.
“무혁 씨. 전 노을 서점에 온 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같아요.”
“나 역시.”
“무혁 씨는 왜요?”
“재희를 만났으니까. 재희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내 삶은 그대로였을 거야.”
“우리 통했네요. 저도 무혁 씨를 여기서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그 집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15살 겨울. 노을 서점에 오지 않았더라면, 맞선 자리에서 끝까지 무혁을 외면했다면, 무혁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무혁의 손을 쉽게 놔버렸다면…….
수많은 만약의 상황이 머릿속에 스쳤다.
하지만 재희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15살 겨울에 노을 서점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언젠가 재희는 이곳을 분명히 만날 테니까.
재희는 무혁이 사 온 아기 신발과 재희가 산 아기 신발, 그리고 호랑이 인형을 나란히 둔 선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겨울 찬바람이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낡았지만 그 어떤 곳보다 안락하고 포근한 노을 서점.
처음 그와 만났고 헤어졌으며 돌고 돌아 마침내 서로에게 닿고, 새로운 생명까지 품게 해준 노을 서점.
재희는 15살 겨울 이후 처음으로 겨울이 쓸쓸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무혁과 함께 보내는 겨울의 노을 서점의 밤이 그들의 사랑만큼 깊어갔다.